소설리스트

그 악녀가 살아남는 방식-27화 (27/83)

<-- 4. 파티라 쓰고 난장판이라 읽는다 -->

4.

나는 맹수 앞에 벌벌떠는 초식 동물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이래서 하나같이 다 항복을 외치거나, 바로 쓰러졌구만. 솔직히 나도 기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뭐야, 이거 뭐야! 굉장히 무섭다!

"둘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탐색전을 벌이는것 같군요!"

아니요, 아닙니다.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거라구요! 저 진행자 양반 진짜 마음에 안들어!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카일 또한 움직이지 않는건 이상했다. 나는 의문을 품고 있다가, 카일이 가만히 서있는 지금이 항복을 외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드디어, 카일론스 선수가 움직였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먼저 들렸나, 아님 카일의 움직임이 더 빨리 보였나 모르겠다. 갑자기 동물의 왕국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사나운 표범이 아주 빠른 속도로 가젤을 사냥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입을 떡벌리며 놀라워 했었는데...

지금 여기에 표범이 있어요!

순식간에 검을 집어들고는 카일은 나를 향해 뛰어왔다. 이제껏 카일이 나를 향해 뛰어오거나, 쫓아오는건 많이 봐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줄은 몰랐다. 지금껏 날 봐준건가? 내 앞에 사나운 맹수가 낯설게 느껴진다.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나는 막을 새도 없이 다가오는 검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아무리 내가 정체를 숨겨서 모른다고 해도 여자를 상대로 무자비하게 공격하다니! 그동안 카일과 가까이 지내느라 잊고 있었지만, 그는 본래 냉정하고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자유분방한 이 남자는 지금 나를 쓰러뜨리는게 목적이다. 난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였다, 하하.

"카일론스 선수의 맹공격!"

평소 비비안에게 민첩하다고 칭찬 받았었는데, 그건 그냥 아부였나보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도 카일의 공격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옆으로 크게 피하다가 로브가 벗겨질 것 같아서 푹 눌러 쓸려는데, 내 행동보다는 카일이 검을 휘두르는게 더 빨랐다. 결국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나는, 멍하게 카일을 올려다 보았다.

카일은 주저 앉아있는 나를 향해 검을 내리칠려다가 내얼굴을 보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왜 멈춘거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평소보다 더 커진것 같은데, 놀란건가?

"어, 저거 라델 카르엘 아니야?"

관중에서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또렷히 들리는 내 이름, 혹시나 해서 머리를 만져보니 역시나 로브가 벗겨져 있다. 주저 앉으면서 벗겨졌나보다.

"아, 이런."

관중석에서 나를 아는사람이 절반 이상 될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다 까발려졌으니, 난 이대로 실격처리 되거나 벌을 받겠지. 이렇게 어이없게 들킬줄 알았으면 그냥 참가하지 말걸, 괜히 카일 소원이나 이뤄주고... 지금이게 무슨 꼴이야!

"라델."

"아하하, 안녕하세요?"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힌 카일은 믿을수 없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조금 많이 민망한 상황이기에 일단 머쩍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는데, 카일은 받아주기는 커녕 다른 말을 꺼냈다.

"괜찮아?"

지금 괜찮냐고요?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 입니다! 아이고, 내가 스스로 흑역사를 만드는 날이 올줄은 몰랐다. 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다니...꿈에 나오는거 아니야?

나는 카일의 물음을 듣고는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카일은 쪽팔린건 괜찮냐고 물어본것 같은데, 지금 내얼굴이 대신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새빨개져 있을거야, 내얼굴. 홍당무가 친구하자고 하겠네. 망할.

"이럴수가, 라델 카르엘 아닙니까? 분명 마법부 학생인..."

특별석에서 시합을 즐겨보고 있던 마법이론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아니, 근데 왜 여기 계시는 거에요? 분명 마법 대회를 보러 가신줄 알았는데...내 정체가 들킨 것 보다, 마법이론 교수님이 검술대회를 보러온게 더 놀라웠다.

깜짝 등장하신 마법이론 교수님께서는 지팡이를 짚고서는 대련장 한가운데로 걸어오셨다. 바들거리면서 오는 모습이 너무나 불안해 보였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내가 주저 앉아있는 곳까지 당도하셨다.

"라델 학생, 규칙을 위반했군요."

"네, 교수님..."

평소와 다르게 위엄 넘치는 모습에 저절로 어깨가 축처진다. 역시 혼나겠지. 규칙을 위반했으니, 아주 큰 벌을 받을것이다. 청소를 시키실까, 아님 반성문? 어떤것이든 전부 하기 싫다. 나는 잠시 반성문을 쓰고 청소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것 같다.

"뜻밖에 라델 학생의 재능을 발견할수 있었지만, 규칙 위반은 안됩니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겠죠."

"...네."

마법이론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리셨다. 혹시 마법으로 벌을 내리는건가 싶어 긴장한 채 눈을 꼭 감고 있으니 머리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얏..!"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을 떠보았다. 눈 앞에는 인자하게 웃고 계시는 교수님이 보였다. 엥, 혹시 그 지팡이로 제 머리를 때리신 건가요..? 나는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교수님을 향해 말하였다.

"지금 대체...무슨?"

"오늘 벌로 저와 함께 검술 시합을 끝까지 보도록하세요."

"네...?"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나를 살며시 일으켜주셨다. 그리고는 특별석으로 나를 이끌더니 과자를 한가득 안겨주셨다. 음, 이 느낌은 친절한 동네 할아버지..?

영문 모른 채 교수님을 따라 과자를 먹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이게 벌인가요? 다른 벌은...안주시는 거에요?"

믿을수 없어서 과자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교수님은 어디서 나온건지 모를 홍차를 홀짝이고 계셨다.

"저번에 받은 화관의 답례입니다. 이번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교수님..!"

왈칵. 제자를 위해주는 마음이 감동적이다. 나도 모르게 두손으로 입을 막고 감동한 얼굴로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이제 나쁜짓 안할게요, 화관도 잔뜩 만들어 드리겠어요..!

교수님을 향한 존경심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였다. 열심히 과자를 씹어 먹으며 아직까지 멍하니 대련장 한가운데에 있는 카일을 보았다. 내가 실격처리 되었으니 카일이 이긴거겠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정체가 들켜서 다행이다. 카일이 실수로 죽여놓고 '아이쿠, 라델이였네. 죽여버려서 어쩌지?' 라는 상황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근데, 뭔가 이상하네.'

왜 카일은 내 얼굴을 보고 검을 멈춘걸까. 아무리 놀랐어도 망설임 없기로 유명한 카일이라면 검을 내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멈추다니, 굉장히 이상한 일이였다.

"...놀라운 사건이 있었지만, 어쨌든 승자는 카일론스 레이번입니다!"

진행자는 겨우 정신을 차린건지 진행을 막힘없이 하였다. 관객들도 카일을 보며 환호를 하고있었다. 뭐, 어쨌든 카일이 도중에 멈춘 덕에 살아있는 거니까, 잘 된거겠지...?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대기석으로 걸어가고 있는 카일을 쳐다보며 애써 의문을 떨쳐버렸다.

"근데 교수님은 여기 왜 계시는 거에요?"

"사실 검술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경기를 보는게 취미랍니다."

"어머, 저랑 취미가 비슷하시네요!"

정확히는 보는것 보다 대련하는것을 더 좋아하지만, 일단 검술을 좋아하는건 똑같으니까!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교수님께 받은 홍차를 마셨다.

*

검술 대회는 작은 사건 때문에 잠시 쉬는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내가 벌인 사건이라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멀리서 아까 봤던 남자 둘이 보인다. 아무래도 나를 참가시킨 탓에 혼이 나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구, 미안해요. 젊은이들...나중에 사과해야 겠다.

나도 벌은 받지 않았지만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에 조금 긴 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검술담당 교수님이나, 이번 행사의 담당자, 그리고 어떻게 안 건지 오페라를 감상하다가 서둘러 달려온 비비안 까지. 잔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점점 피폐해졌다. 다시는...이런짓 하지 말자. 폭풍 잔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다짐하게 되었다.

"라델!"

남은 쉬는시간 동안 과자를 잔뜩 먹으며 잔소리로 인해 너덜너덜 해진 정신을 회복시켰다. 그러던 중 밝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다이아가 보였다.

"다이아, 안녕."

"안녕! 너 정말 엄청난 짓을 저질렀구나!"

다이아는 웃으며 즐겁게 말했다. 으윽, 다이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반성하고 있단다. 나는 축처진 몸을 겨우 일으키며 다이아에게 물었다.

"저기 근데, 카일은?"

아까 일방적으로 내가 죽을 뻔한 대련을 끝낸 뒤, 카일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대기석에도 안보이고...대체 어디를 간거지?

"카일론스가 어디있는지 관심없어."

"역시 다이아."

참 단호한 대답이라서 순간 당황했다. 다이아는 내 옆에 풀썩 앉더니 마법이론 교수님이 안보는 사이에 과자가 든 상자를 하나 가져갔다. 다이아 너, 손놀림이 심상치 않구나.

"뭔가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더라고."

다이아는 버터로 만든 과자를 집어 먹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혼란스럽다니, 누가? 설마 카일이?

내가 믿을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다이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카일론스가 검을 내리치다가 중간에 멈추는 모습 처음봤어."

"정말...?"

우와, 그럼 지금껏 얼마나 무지막지 하게 대련을 해온거야. 좀 많이 경악스럽다. 그럼 카일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난 저세상 행이였구나. 카일 덕에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카일도 스스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 더라고...아, 교수님 이건 제가 다 먹을게요!"

"아이고...내 과자가..."

다이아는 버터 과자를 입에 다 털어넣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대기석으로 가버렸다. 나는 그런 다이아에게 손을 흔들어주다가 과자를 빼앗겨서 우울해 하시는 교수님을 위로하였다.

나한테도 안주던 과자인데 다이아가 다 먹어버려서 상심이 크신 모양이다. 살짝 눈물을 흘리시는 교수님께 손수건을 건네 드릴려다가 버렸다는것을 깨달았다.

알렉, 그자식. 생각하니까 열받네..!

손수건을 몇장씩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음 시합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선추코 감사합니다! 아침에 한편더 올리겠습니다!

이전 페이지

이전 편

메뉴 화면

다음 편

다음 페이지

loading img

조아라 뷰어

m.joara.com

(5/2 삭제예정) 그 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