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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살아남는 방식-50화 (50/83)

<-- 6. 첫눈 오는날. -->

6.

레이번 공작저의 전속 집사는 심각한 길치였다. 일한지 1년 가까이 된다면서 저택에서 길을 잃는 백치미를 내게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완벽한 집사인줄 알았는데..."

이미 두번이나 방을 잘못 들어간 세바스찬을 짜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완벽하게 하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허당끼가 있는 길치였다.

"전 절대 길치가 아닙니다."

내 시선을 눈치 챈 세바스찬이 견고한 표정으로 길치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 각인된 세바스찬에 이미지는 허당 길치였다.

결과적으로 접대실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지만, 다리가 조금... 아니 많이 아팠다. 평소와 다르게 높은 굽인 하이힐을 신어서 그런지 걷는 것도 조금 불편하였다.

"편히 앉아계십시오. 티타임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금빛 테두리로 둘러싸인 쇼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자마자 푹 하고 들어가는 쇼파의 감촉이 퍽 마음에 들었다. 허당 길치...가 아니라 세바스찬은 내게 꾸벅 인사하고는 접대실을 나갔다.

흠, 예상했었지만, 저택 안이 엄청 호화스럽네. 장식이 하나같이 금빛에다가 보석이 왕창 붙어있다. 설마 저거 다 진짜 금은 아니겠지.

한동안 앉은 채로 접대실 이곳 저곳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대충 봐도 레이번 공작가문의 재력이 얼마나 굉장한지 알수 있었다. 카르엘 백작저도 꽤 큰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레이번 공작저랑 비교도 못할 정도로 작았구나.

"아가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어라, 벌써 준비가 된건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바스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능한 집사라는 건 틀림없는지 순식간에 준비를 끝낸 모양이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내게 다가왔다.

"공작 부인께서 정원에서 기다리십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드디어 공작부인을 만나는 것인가. 전에는 마티나 부인이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꽤나 편하게 대했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신분을 알기에 함부로 말도 걸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설마 전에 내 태도를 구실삼아 나를 들들 볶는건 아니겠지.

하도 귀족들 사이에서 이리 저리 치이다 보니 불안감이 먼저 엄습해온다. 아, 아니야. 진정하자. 저번에 만난 마티나 부인은 천사처럼 친절하고 상냥했다. 별일 안생기겠지, 하하...

"이번에는 길 안 잃어버릴거죠?"

"저는 길치가 아닙니다."

네, 그러시겠죠. 길 안내 만큼은 믿을수 없는 집사였다. 역시 신은 공평하다. 세바스찬에게 완벽한 얼굴과 몸짓을 주고 방향 감각과 길안내 기능을 뺏어갔나 보다.

"아, 도련님."

무표정으로 복도를 걷던 세바스찬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앞에 어떤 남자아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밤하늘 같아서 저절로 감탄이 새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작고 강렬한 붉은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켰다. 음, 딱봐도 그 사람하고 닮았어!

내 앞에 이 작은 어린아이가 누군지 바로 알아챌수 있었다. 검은머리, 붉은눈, 게다가 저 무뚝뚝한 표정까지! 모든게 카일과 판박이였다.

"혹시 카일 동생이니?"

이미 마음속으로는 확신하고 있지만, 혹시 몰라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나를 슬쩍 올려다본다. 귀, 귀여워! 카일을 축소시켜놓은 듯한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도 잠시, 나는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어야 했다.

"말걸지마!"

와장창.

귀여운 겉모습에서 상상할수 없던 말이 튀어나왔고, 덕분에 내 멘탈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으, 응? 내가 잘못들은 건가. 지금 뭔가 들은거 같은데? 애써 현실 부정을 하고 있는 내게 못을 박듯 다시 한번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형 손님이지? 짜증나게..."

멘탈이 무너지다 못해 먼지가 되어 날라갈 것 같았다. 말투와 얼굴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 고양이 처럼 눈매가 사납지만,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남자아이 입에서 자꾸만 험한 말이 나와서 혼란스럽다.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있는 나와 달리 세바스찬은 남자아이에게 태연하게 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쪽은 라델 카르엘 아가씨입니다."

"흥, 관심없어."

내 소개를 하던 말던 카일의 동생은 나와 세바스찬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저 아이가 진짜로 카일 동생..?'

카일의 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이 다르다. 카일은 그래도 배려와 매너가 어느정도는 있는데, 동생은 완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아직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데, 벌써 사춘기가 온건가?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희 카른 도련님께서 무례를 저질렀군요."

"아, 괜찮아요."

카른이라고 하는구나. 카른의 태도에 놀라긴 했지만, 어쩐지 화가나거나 짜증나진 않았다. 그냥 꼬마가 심술을 부리는 느낌이였기에 별로 큰 타격은 없었다. 조금 멘탈이 부숴지긴 했지만...

"다 왔습니다."

세바스찬을 따라 가다보니 금세 정원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는 길을 헤메지 않아서 다행이다. 세바스찬은 나를 보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길치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했다고 저러는것 같은데, 칭찬이라도 해야하나.

"와우, 길 안내를 잘하시네요! 정말 휼륭한 솜씨였어요!"

"과찬이십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세바스찬은 허리를 접고 인사하였다. 헉, 저 완벽한 각도! 자세! 역시 몸짓 만큼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다음에도 공작저를 안내 받고 싶으시다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아, 네..."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편 세바스찬은 무표정이였지만, 어쩐지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나 점점 표정을 읽는 솜씨가 늘어가는거 같아.

세바스찬에게 내가 사온 케이크를 건네고 정원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갔다.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마티나 부인은 다시봐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어머, 어서오세요."

미리 와서 홍차를 마시고 있던 마티나 부인은 나를 발견하고선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잔한 노을빛의 눈동자와, 기품있고 우아한 미소는 여전히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직접 만나보니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후, 나는 공작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티나 공작부인."

"후훗, 너무 딱딱하네요. 그냥 부인이나,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요."

부인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라니? 나는 생각도 못한 단어에 눈만 깜빡였다. 당황하는 나를 보고 공작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을 덧 붙였다.

"아들만 있다보니 귀여운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마티나 공작부인의 눈동자가 슬프게 일렁거렸다. 가련하고 애절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굉장히 아팠다. 그래도 어머니라고 부르는건 아닌것 같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죄송해요, 일단은 마티나 부인이라고 부를게요."

"어머, 아쉬워라."

애절해 보이던 모습이 거짓말 처럼 마티나부인은 다시 활기차게 웃음을 띄었다. 설마, 부인도 연기파 이신가요? 뛰어난 표정 변화를 보고 한번 의심해 볼만 했다.

"카일론스에게 들었어요. 같은 아카데미라면서요?"

"네, 같은 검술부에요."

아직은 마법부였지만, 다음주가 되면 나는 검술부였다. 이제 더 이상 강의실을 태워먹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에 홍차를 한 모금 마셨더니, 마티나 부인이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라델 양은, 우리 카일론스의 여자친구인가요?"

"푸흡!"

빙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던지는 직구에 나는 마시고 있던 홍차를 뿜고 말았다. 세상에, 내가 홍차를 뿜게 되는 날이 오다니! 신선한 충격이였다. 그것보다 마티나 부인?! 갑자기 그런 엄청난 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쿨럭, 쿨럭!"

"괜찮아요? 지금 당장 닦을 만한 것을 가져오라고 시킬게요."

마티나 부인의 손짓 한번으로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뿜어버린 홍차를 전부 닦아내고,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손길이 굉장히 능숙해서 놀라웠다. 그동안 비비안이 최고라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유능한 시녀는 많구나.

나는 손수건으로 입주변을 닦으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저, 저희는 그냥 친구에요."

"친구가 연인이 되고 연인이 부부가 되는것이지요, 호호."

아니, 부인...자꾸 그런 얘기를 하시면 제가 많이 곤란한데요. 마티나 부인의 농담에 당황하며 목을 가다듬고 있을때, 세바스찬이 케이크를 가지고 다시 등장하였다.

"공작부인, 계속 그렇게 놀리시면 아가씨께서 곤란해 하십니다."

"아들이 여자애를 초대한건 처음이라 그만..."

마티나 부인은 다시 기품있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사온 케이크를 쳐다보더니, 눈을 빛내기 시작하였다.

"혹시 라델양이 사온 건가요?"

"네, 케이크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오는길에 사왔어요."

케이크 가게에 가서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국 딸기 케이크와, 가장 기본적인 생크림 케이크를 골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마티나부인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녀는 감격에 찬 얼굴로 케이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센스가 좋다니, 며느리로 삼고 싶네요!"

"와, 그럼 저야 영광이죠!"

이제 어느정도 공작부인의 농담을 받아칠수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공작부인이 갑자기 눈빛을 진지하게 바꾸면서 어떤 종이를 꺼냈다.

"그럼 여기에 서명좀 해주실래요?"

굉장히 불안하다. 갑자기 공작부인이 작은 동물을 사냥하려는 커다란 늑대로 보인다. 내가 당황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자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이른것 같습니다. 공작부인."

"어머나, 역시 그런가?"

옆에서 케이크를 나르고 있던 세바스찬의 만류로 공작부인은 그 종이를 다시 집어넣었다. 종이는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굉장히 신경쓰였다. 뭐야, 아까 그거 무슨 종이인데?

'역시 레이번 공작저 사람들은 모두 조심해야해.'

조금만 방심해도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

저도 그 배구하는 아이들 아주 아끼고 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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