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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살아남는 방식-52화 (52/83)

<-- 6. 첫눈 오는날. -->

6.

카일이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밖에서 가만히 서있던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동안 가까이 붙어있거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는건 흔한일이 였는데. 오늘따라 카일이 다가오면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가? 조금 카일이 낯설었다.

"들어와."

두근거림이 진정 될 무렵, 문 안쪽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들러왔다. 흐읍!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조심하자, 왜인지 오늘 카일이 몇배는 잘생겨보인다. 혹시라도 정신줄을 놓게 되면 큰일이 날 것 같아.

"라델."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가보니 카일이 편안한 일상복을 입은 채, 의자에 걸터 앉아있었다. 단정한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카일은 뒤에 후광이 비추는것 처럼 눈이 부셨다. 어쩜 자세까지 저리 완벽한지 모르겠네. 그저 편하게 앉아있을 뿐인데 마치 모델같았다.

붉은 눈이 어서 오라는 듯이 빛나고 있다. 커튼이 쳐져있어 조금 어두운 방안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카일의 눈을 보고 또 다시 넋놓고 있던 나는 고개를 내젓고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수건을 들고 카일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겨우 머리 말리는 건데 이렇게 긴장하다니...이건 다 카일의 외모가 너무 잘나서 그런거야.

"가만히 있어요."

"응."

검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톡톡 두드렸다. 섬세한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듯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휴, 머리 말리는게 이리도 집중력이 필요한 일인 줄 몰랐다.

마치 머리말리기 장인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어쩐지 카일이 너무 조용했다. 혹시 내 손길이 능숙해서 잠이 들게 한건가!

"카일."

어, 설마 진짜 자고 있는건 아니겠지? 카일을 불러보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수건을 내려 놓고 카일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는데, 예상대로 카일은 잠을 자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눈을 감고 있으니 얼굴이 더욱 잘나보였다. 이 참에 얼굴이나 감상할까 싶어서 쭈그려 앉았다. 카일의 얼굴이 훤히 보인다.

'우와, 어쩜 이리 잘났을까.'

길게 뻗은 속눈썹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여자보다 더 예쁘고 귀엽고...만약 카일이 여자였으면 분명 남자한테 인기 있었을거다. 헉, 콧날봐! 예술이다, 진짜.

예술 작품같은 카일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설레서 미칠것 같았다. 이래서 여자들이 따라다니는구나, 나도 팬클럽에 가입해야하는건가.

'어? 앞머리가..."

계속 카일의 얼굴을 관찰하는데, 앞머리가 심하게 신경쓰였다. 눈을 살짝 덮는 앞머리가 답답해보여서 손을 뻗어 정리를 해줄려고 하였는데...

"아..."

하지만 번뜩 떠진 카일의 두눈을 보고 나는 몸을 굳히고 말았다. 으음, 카일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것은 위험한데...깊은 심해와 같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많이 졸려요?"

정신줄 꽉 잡고 카일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았다. 절대로 카일 얼굴을 구경하다가 들킨 것이 민망해서 웃는게 아니다.

"...졸려."

카일은 아직도 졸린 듯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하지만 체력 괴물인 카일이 겨우 검술 연습 몇시간 했다고 이렇게 졸고 있는건 이상했다. 혹시 내가 머리를 만져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였다.

"졸리면 자요. 깨워줄게요."

카일을 일으켜 침대로 이끌었다. 카일은 나를 따라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단 졸려보이는 카일을 재우고 한숨 돌릴려는데, 카일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엇."

비틀 거리며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 바로 아래에 폭신한 감촉이 느껴진다. '우와, 공작저 침대도 역시 차원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내 허리를 감쌌다.

"흐읍."

내 허리를 감싼건 다름아닌 카일의 팔이였다. 일단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배에 힘을 주었다. 뱃살을 들키면 부끄러우니까!

몸을 뻣뻣하게 긴장한 채, 카일을 흘끔 쳐다보았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두눈을 꼭 감은 채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카일이 보인다. 뭐, 뭐야. 잠꼬대인건가? 그런 것 치고는 팔 힘이 너무 강하다.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꼼짝도 할수 없어서 이내 포기 하고 말았다.

소드마스터는 잠을 잘때에도 팔 힘이 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싶네.

"카일 힘들어요..."

힘을 쭉빼고 애원하는듯이 말했다. 자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지만, 혹시 몰라서 카일을 향해 말하였다.

"힘들어?"

카일이 스르륵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자는거 아니였어? 나는 벗어날수 있겠다는 찰나의 희망을 붙잡고 카일에게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저 이제 일어나...으악!"

이번에는 눕혀졌다. 아이고, 이 양반아! 내 말은 그뜻이 아닌데! 카일은 힘들다는 내 말을 다르게 해석하여 나를 침대에 편히 눕혔다. 왜 내 몸을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거니, 조금 억울해졌다.

"이제 편하지?"

"...네, 아주 편합니다. 허허."

허탈하게 웃으며 천장을 보고 있는 나를 카일이 꼭 끌어안았다. 그를 흘끔 쳐다보니,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일이 이렇게 어리광이 많은 사람인지는 처음 알았어. 이렇게보면 그저 커다란 강아지 같은데...

"라델."

저 눈이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사나운 맹수 같아서 잡아먹힐 것 같단 말이지. 지금도 나른하게 웃고 있는 카일은 마치 늑대같았다. 나를 잡아먹을려고 기회를 노리는 커다란 맹수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나는 소리쳤다.

"카, 카일! 공작저 안내를 해주세요!"

"안내..?"

설마 싫다고 하진 않겠지. 아니야, 귀찮은걸 싫어하는 카일이라면 단호하게 거절할수도 있었다. 작중에서도 세리아의 부탁을 귀찮다고 거절했던 사람이다. 세리아가 애교를 부리고 나서야 겨우 움직이던 남자인데, 내 부탁을 들어줄지 의문이였다.

"라델이 원한다면."

내 걱정을 비웃듯이 카일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놀라운데, 카일의 표정을 보고 더 놀랐다. 분명 귀찮아 하는 표정일줄 알았는데, 어쩐지 기뻐보인다. 혹시 의지가 되서 기쁜건가?

"정원은 가봤어?"

"가보긴 했는데, 자세히 구경하진 못했어요."

공작부인과 차를 마시느라 정원 구경은 하지 못했다. 얼핏 봐도 굉장히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아무래도 카일이 구경을 시켜줄 모양이다.

"자."

카일이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응? 이 손은 뭡니까? 나는 멍하게 카일 손을 바라보았다. 뭐지, 카일도 황태자처럼 하이파이브를 좋아하는건가? 그런거 치고는 손바닥이 향한 방향이 다르다.

"손 잡아."

"으잉."

헉, 이상한 소리가 나버렸다. 카일의 행동이 너무 생소해서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내가 먼저 잡고 쓰다듬은건 괜찮았는데, 카일 쪽에서 이렇게 다가오면 조금 곤란했다. 어쩔줄 몰라하며 손을 살짝 내밀었더니, 카일이 내 손을 확 잡아버렸다. 으아, 세상에!

"정원으로 가자."

그의 듬직하고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꽉 잡는다. 이렇게 보니 내 손이 작게 느껴졌다. 뭔가 부끄러워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으니 카일이 나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는다. 헉, 그렇게 갑자기 웃으면 심장에 무리가..!

아렌과 다른 의미로 눈부신 미소였다. 환하게 웃은 것도 아닌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희미한 미소였는데, 어쩐지 반짝거리는거 같았다.

윽, 손에 땀이 찰 것 같아. 너무 긴장한 탓에 손은 금방 땀으로 축축해질 것 같았다. 왜이리 긴장하는 거지, 진정하자...

정원으로 가는 길이 꽤나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다시 정원으로 가보니 세바스찬이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집사도 이런일을 하는 건가 싶어 쳐다보았더니, 세바스찬이 나를 발견하고 꾸벅 인사를 하였다.

"도련님하고 안주인...이 아니라 라델 아가씨군요. 여긴 무슨일로 오신 겁니까?"

이봐요, 집사씨? 방금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나는 찝찝한 표정으로 세바스찬을 보았다. 하지만, 너무 반듯하고 바른 얼굴인 세바스찬에게 뭐라고 말할지 몰라서 그냥 대답만 하였다.

"카일이 정원을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왔어요."

"아, 그러시군요."

세바스찬은 다시 꽃에 물을 주는 것에 열중하다가 이내 할말이 생겼는지 나와 카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 그러고보니 공작부인께서 아가씨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와, 저녁식사 좋네요."

...그거 강제 참가인가요? 저녁식사라면 레이번 공작까지 와서 함께할 터인데, 나 혼자 어색해서 어쩐담. 어차피 거절할수도 없기 때문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였다. 하하, 내가 무슨 수로 공작부인의 저녁초대를 거절하니...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네요."

이게 좋아하는 모습이냐. 나는 짜게 식은 눈빛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후, 그래 어차피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하잖아? 이 참에 공작저의 고급진 요리나 맛보고 가야겠다....과연 음식이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역시 꼼꼼한 집사다. 길치 인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집사인데 아쉽다. 나는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세바스찬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만 얘기하고 이리와."

카일이 맞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저절로 카일이 있는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나는 당황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미묘하게 일그러진 카일의 얼굴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그러지?

"가자."

카일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손을 잡고 있는 터라 나도 자연스럽게 카일을 따라 걷게 되었다. 어, 어어? 부드럽지만 거침없는 손길에 속수 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으려니, 카일의 뒤태가 굉장히 무서워보였다. 응? 화난건가?

나 아무것도 안했는데? 세바스찬하고 말 조금 나눈 것 밖에 한 일이 없는데, 카일이 화를 내고 있었다. 영문을 알수 없어서 뒤를 돌아보니, 세바스찬이 입모양으로 무어라 말 하는 것이 보였다.

'힘내세요.'

아무 표정 없이 세바스찬이 주먹을 쥐고 힘내라는 포즈를 하고 있었다. 세바스찬의 기운없는 응원을 받으니 더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세바스찬, 응원해준건 고마운데 전혀 힘이 안나요...

========== 작품 후기 ==========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세바스찬이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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