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현장학습은 맑은날에 갑시다. -->
7.
"둘이 이제 안 싸울거죠?"
악수를 시킨 채, 다시 다짐을 받아냈다. 카일과 아렌은 불쾌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역시 심성은 착한 아이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쭉 둘러봤는데, 순간 전쟁터에 온 줄 알았다. 산산 조각 난 꽃병부터, 찢어진 책, 그리고 두 동강이 난 침대를 보고 난 동공을 심하게 흔들었다. 심성은...착한..?
"음, 그럼 이제 방청소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아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렌에게 눈빛으로 이정도는 쉽지? 라고 물었고 아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 한번에 방을 원래대로 만들었다. 음? 조금 깨끗해진거 같기도 하고... 너 덤으로 청소까지 했구나? 먼지라는게 존재할까 궁금해질 정도로 깔끔해진 방안은 눈이 부셨다.
'따르릉.'
아렌의 청소 실력을 감탄하고 있는데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통신구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전화가 온 듯 울리는 통신구를 한번 톡하고 두드린 아렌은, 발신자를 보고는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영감님 호출..."
아렌이 통신구에 떠있는 메세지를 읽고 한숨을 토해냈다. 영감님이라면...아마 마탑주를 말하고 있는 거겠지? 그럼 아렌이 호출 되었다는건 긴급사태라는 건가! 아렌의 조금 어두운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문제 있냐고 물었고, 아렌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영감님께서 사소한 일로 많이 부르셔요. 예를 들면 눈이 침침하니 글 좀 읽어달라거나, 아니면 허리가 아프니 안마나 해달라거나...대충 이런거요."
정말 사소한 부탁이였다. 전지전능한 마탑주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소한 부탁이라서 놀랐다. 마탑주라기 보다...그냥 평범한 할아버지 같은데? 의문을 담아 아렌을 쳐다보았더니, 그는 미소만 살짝 지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나이를 먹으면 다 소용없나봐요."
"아..."
그러고보니 아렌이 마탑주가 되는건, 앞으로 1,2년 정도 밖에 안남았다. 그렇다면 마탑주 할아버지의 수명도 그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탑은 현 마탑주가 목숨을 잃으면 다음 후계자가 마탑주가 된다. 뭔가 갑자기 씁쓸해지는데...
"그러니, 이렇게라도 시간을 같이 보내드려야지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어서가, 빨리가."
카일이 아렌을 향해 적의를 보내며 어서가라고 재촉하였다. 아렌 또한 카일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으악, 화해시킨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싸울려고 해!?
"...저 없는 사이에 라델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너보다는 안전하니까 걱정마."
"그만, 그만!!"
이러다 다시 싸울거 같아서 얼른 두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더이상 그런 전쟁 같은 싸움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아렌을 재촉했다.
"아, 아렌. 이제 가봐야지."
"...네, 라델 이따가 봐요."
아렌은 아쉽다는 듯이 내게 손을 흔들며 슉하고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아렌의 자리를 잠시 보고 있다가 나는 카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의 거친 싸움을 보느라 어색한지도 몰랐네.
"..."
둘만 남았더니 카일이 내 눈치를 본다. 축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그동안 접근 금지령으로 내 주위만 서성였던 카일은 지금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거리. 카일의 손이 움직일듯 말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카일."
카일은 내 부름에 움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동안 피한 것도 미안했고,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 부끄러워서 카일에게 먼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안해요."
이 참에 사과까지 전했으니 실로 만족스럽기 그지 없었다. 카일은 내 손길을 받아드리며 기분 좋은듯 눈을 감았다. 그의 길게 뻗은 속눈썹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 음...제가 그동안 부끄러워서 피한거지, 절대로 싫어서 피했다거나 그런건..으억?"
오랜만에 가까이서 이야기를 하니 부끄러웠다. 그렇기에 고개를 푹숙이고 이런 저런 핑계를 말했더니, 카일이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이 사람아!'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서 굳어있는데 카일이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빗어내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시는 피하지마."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매혹적이다. 부드럽지만 강렬하고 굳건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더 이상 부담스럽게 안할테니."
아, 다이아의 말을 신경쓰고 있었구나. 평소에는 거의 다이아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카일이지만, 나와 관련되면 이렇게 진지해져서 조금 기뻤다. 우와, 특별취급이 이리도 기분 좋은 거였다니...처음 알았어.
"근데 지금도 꽤 부담스러운 것 같은...데요."
현재 무슨 상황이냐면, 내가 카일 품에 꼬옥 안겨있는 상황이다. 다 큰 남녀가 방에 단둘이 있을 뿐더러, 포옹까지 하고 있다니... 누가보면 큰일 날 장면이였다. 나는 몸을 열심히 비틀고 버둥대며 겨우 카일 품에서 벗어났다. 카일의 스스럼없는 행동 때문에 매우 곤란했던 나는 카일에게 확실히 얘기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카일, 지금부터 스킨쉽 금지!"
"..."
카일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내가 환하게 웃자 카일이 멍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슨 할말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 거렸더니, 그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한번만 하면 안돼?"
"뭘요..?"
"전에 했던거."
카일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그 행동을 본 나는 볼을 붉게 물들인 채, 그의 팔을 찰싹하고 때렸다. 당연히 안되지, 이 양반아!! 부담스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지 5분도 안지났는데, 이 남자는 나를 부담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럼 머리 쓰다듬는건?"
"음, 좋아요. 거기까지는 괜찮을 거 같아요."
조금 이상한 타협같지만, 어쨌든 이걸로 더이상 첫 눈오는날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안심하며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카일이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의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머리, 쓰다듬어 줘요?"
"응."
나는 얼떨떨하게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음, 부드럽네. 그의 머릿결에 대한 감상을 중얼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일이 워낙 좋아하니까 그만둘수도 없고...왜인지 앞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일이 많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카일과 어색함을 풀고 얼마 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안내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 싶어 카일과 함께 식당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뭐야, 둘이 사이 좋아보이네."
식당 입구에서 만난 다이아는 나와 카일을 보더니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훠이, 훠이. 카일론스는 옆으로 비켜."
자연스럽게 우리 두 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 다이아는 다정하게 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카일을 향해 혀를 내밀고는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카일도 발끈 하는게 눈에 보였기에 참 곤란했다. 그만해, 이것들아...
아카데미에서 파괴왕으로 유명한 다이아와 말이 필요없는 검술 천재 카일이 싸우면 아마 마탑이 무사하지 못할거다. 나는 마탑의 안전을 위해 두사람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싸움을 중재하는게 몇번째인지..."
오늘따라 참 피곤하다고 느끼며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피곤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식당에 울려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식당 한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내 옆에 있던 다이아는 재밌겠다고 말하면서 나를 끌고 사람이 모인 중심으로 달려갔다. 사람들 사이를 열심히 헤쳐가 보았더니, 앞에 모르는 남자와 롤빵머리로 기억에 남은 케르티 영애, 그리고 세리아가 있었다. 으, 또 세리아야?
"난 너를 믿었는데!"
"진정해, 케르티."
눈물범벅 콧물범벅인 케르티 영애는 남자친구-또는 약혼자- 로 추정되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고, 남자는 세리아를 지키듯 서있으면서 케르티 영애를 진정시킬려고 하고 있었다.
음, 저 장면을 보고 추측해보자면, 저 남자와 세리아가 썸을 타다가 케르티 영애에게 걸려서 지금 이지경이 된거 같다. 대체 이게 몇번 째인지...아카데미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러한 상황을 많이 봤었다. 항상 이런 치정싸움의 주인공은 세리아였고, 그녀는 항상 '나는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대사를 내 뱉고는 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정말!"
허억...소름. 완전히 생각한것과 똑같은 대사에 소름이 쫙 돋았다. 뻔한 레퍼토리와, 뻔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다이아는 지겨운지 하품을 크게하고 카일을 질질 끌고 주문을 하러 갔다. 카일이 귀찮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케르티, 너가 오해한거야."
"둘이 껴안고 있던게 오해야? 연인처럼 꼬옥 껴안고 있었잖아!"
헉, 둘이 껴안았다고? 그렇다면 케르티 영애가 화낼만도 하다. 남자친구가 다른여자와 껴안고 있는데, 그 누가 그냥 넘어가겠어? 나는 드라마를 보는 심정으로 열심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화가 난 케르티 영애를 진정시키는 남자의 옆에 있던 세리아가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실수였어요."
"하, 실수?"
"그저 넘어질뻔한 저를 도와준거 뿐이에요."
맞죠? 라고 말하면서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세리아의 얼굴이 얄밉게 느껴졌다. 아는사람만 눈치 챌수 있는 세리아가 연기할때 나오는 웃는 얼굴이였다. 오호라, 세리아가 이번에는 저 커플을 깨트리고 자신의 추종자를 늘릴려는 심상이구만.
"허, 어이가 없어서! 그럼 실수로 넘어져서 입도 막 맞추고 그러니?!"
입맞춤까지 했어..? 케르티영애의 충격적인 속보로 인해 주위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세리아도 그렇지만, 꾀임에 넘어가 입맞춤을 한 저 남자도 짜증이 난다. 어후, 답답해. 케르티 영애를 보고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남자는 당황한 것 처럼 보였다. 바람을 핀 사실을 케르티 영애가 전혀 모르는 줄 알았나보다.
"그, 그걸 어떻게...!"
"내가 모를줄 알았어? 정말 너한테 실망이야..!"
싸움이 거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주위 학생들은 남자를 욕하며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세리아에게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만이 아니라 세리아에게도 잘못이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녀의 탓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세리아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봐서는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저 남자에게 다가간거 같은데 말이지.
"너도 그래, 세리아.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감히 내 남자를 뺏어가?"
"오해에요...케르티 영애..."
흥분하여 소리치는 케르티영애를 두고 세리아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 오늘은 눈물연기 안할 줄 알았는데...결국 하는구나.
"실수로 넘어지다가 우연히 입술이 닿았을 뿐이에요...믿어주세요!"
세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했다. 언제보아도 참 명연기란 말이지.
"울릴 필요는 없었잖아? 실수라는데..."
"케르티 영애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긴 했어."
세리아가 울자 그녀의 추종자들이 케르티 영애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은 이제 어느정도 세리아의 행동에 익숙해져서 케르티 영애를 동정했지만, 세리아의 추종자들은 세리아가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케르티 영애에게 비난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든 실수를 할수 있는 거잖아요...그러니, 케르티 영애가 너그럽게 이해해줘요."
세리아의 연기와, 추종자들의 비난으로 인해 케르티 영애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케르티 영애의 몸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분하고 억울하겠지. 피해자는 자신인데, 세리아가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듯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주동하고 있으니 말이야...아, 짜증이난다.
"이거 좀 빌릴게요."
"어..."
나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들고 있는 물통을 뺏어들었다. 물이 가득 들어있어서 꽤나 묵직했기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흐음,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세리아."
물통을 들고 빠르게 세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나는 망설임 없이 물을 뿌렸다.
'촤아악'
듣기만해도 시원하고 상쾌한 소리가 났다. 나는 물에 흠뻑 젖은 세리아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세리아는 이게 무슨짓이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놀란듯이 땡그래진 눈이 참 마음에 드는구나.
"이게 무슨..."
"어머, 어떡해! 실수로 물을 엎질러버렸네!"
세리아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호들갑을 떨며 세리아를 걱정하는 척 손수건을 꺼내 옷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당연하게도 작은 손수건으로 흠뻑 젖은 세리아를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대충 몇번 닦는 척 하다가 얼굴을 굳히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리아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였다.
"아이참,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덤벙대다가 물을 엎질러 버렸어...그래도 세리아는 이해해 줄거지?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잖아?"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똑같이 해주었다. 세리아는 내말을 듣고는 항상 완벽했던 얼굴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만큼 화가났다는 거겠지. 나는 세리아의 꽉 쥐어진 주먹을 보고는 통쾌함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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