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겨울에서 봄으로 -->
9.
"공작부인,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작부인이 척 보아도 비싸 보이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계셨다. 공작부인께서는 내가 들어가자 마자 반기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머, 이렇게 찾아와 주어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당연히 찾아뵈야죠."
공작부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런, 얼마나 아팠기에 저렇게 식은땀을 흘렸을까. 아픈 공작부인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공작부인의 얼굴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어머나, 역시 라델양은 친절하군요. 꼭 며느리로 삼고 싶네요!"
아파도 농담을 잘 건네는 공작부인이였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건강해보였다. 얼굴은 핼쑥했지만, 목소리는 통신구로 들었던 것 보다 활기찼고, 기침도 하지 않으셨다. 음, 내가 오는 사이에 좀 나아진건가?
"근데 공작부인...도대체 무슨 병에 걸리신 건가요?"
"네, 네에?"
또 다시 화들짝 놀라는 공작부인을 보며 나는 의문을 더욱 증폭 시켰다. 시리우스 제국은 의술이 많이 발전해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병이나 바이러스의 치료제 또한 모두 있을 뿐더러, 희귀병이라 해도 치료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작부인은 마치 절대 병이 낫지 않을 것처럼 말하시니, 나는 그 병이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지경이였다. 대체 어떤 병이길래 치료를 못하고 계신거야?
"세반스찬, 그 병명이 뭐였더라?"
"하아...결국은 저한테 떠넘기는 거군요."
세바스찬은 영문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공작부인께서 걸리신 병은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열이 많이 나게되며, 식은땀과 오한이 느껴지는 병입니다."
세바스찬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머릿속에 한가지 병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내가 자주 걸려서 고생했던, 그 병..!
"그건 감기 잖아요."
"...딩동댕입니다."
감기가 희귀병?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옆을 흘끔 보니 공작부인이 시선을 회피하면서 딴청을 부리고 계셨다. 공작부인, 아무래도 저를 속이신 모양이군요!
"분명 희귀병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어머, 건강한 저에게는 감기도 충분히 희귀한 병이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난 후,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쓸었다. 후...열심히 달려왔는데, 알고보니 속은거라니. 갑자기 드는 허탈감에 한숨을 푹 쉬고 있는데, 옆에서 세바스찬이 말을 건넸다.
"참고로 공작부인은 열감기에 걸리셨습니다."
"그럼 기침은..."
"일부러 연기하신 겁니다."
"세바스찬!"
세바스찬의 폭로로 결국 연기까지 들통 나버린 공작부인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살짝 붉히셨다. 공작부인은 세바스찬을 크게 부르더니, 그냥 나가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꽤나 많이 당황하신 모양이다.
"연기도 하셨군요."
"...어쩔수 없었어요. 라델양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냥 부르면 안올거 같아서..."
공작부인은 눈물을 살짝 글썽이는 '척' 했다. 이제는 공작부인이 뛰어난 연기파라는 걸 알기에 나는 속지 않고 웃음 띤 얼굴로 말하였다.
"그냥 불러도 왔을거에요. 저도 마침 공작부인에게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어머, 뭔데요?"
공작부인은 화색을 띄며 좋아하셨다. 내게 바짝 다가온 공작부인은 어서 말하라면 손짓하였고, 나는 조금 긴장이 되어 침을 한번 삼키고 대답하였다.
"카일이 제게 프로포즈를 했어요."
"어머, 그래도 내 아들이 고자는 아니였군요. 다행이네요."
나는 공작부인의 거침없는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의문을 느꼈다. 원래 예상한 반응은 공작부인이 입을 떡벌리며 놀라는 거였는데...
"놀라지 않으셨어요?"
"후훗, 어차피 라델양을 며느리로 삼을려고 생각했는걸요? 우리 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내가 직접 나섰을 거에요."
헉, 그렇다는 말은...설마 전에 내가 방문했을때 했던 말들이 전부 장난이 아니였던거야? 그러고보니 수상한 종이도 건넬려고 했었던거 같은데...
오싹, 나는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만약 그 종이에 싸인을 했을 경우, 난 이미 공작부인의 며느리가 되어있었을 것이다...무섭다, 무서워.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했나요? 설마 거절을 하지 않았겠죠?"
"사실은, 대답을 하기 전에 카일이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마물을 퇴치 하러 가버려서..."
내가 조금 가련하게 푹 고개를 숙이고 말하자, 공작부인은 '그거 참 타이밍이 나빴네요' 라고 말하였다. 중간에 '망할 황제' 라는 말이 들리긴 했지만, 난 애써 무시 하였다.
"그래서 오늘 카일을 만나기 전에 공작부인에게 한가지 허락을 맡으려고요."
공작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번하고, 진지한 얼굴로 공작부인의 두손을 잡았다. 아, 조금 떨리네.
"아들을 제게 주십시오!"
"네, 기꺼이 데리고 가주세요."
엥? 너무 간단한데? 생각보다 공작부인은 유쾌하고 쿨한 사람이였다. 보통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당황하지 않나?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부인은 보통을 모르는 분이였다.
나는 유쾌발랄하게 아들을 넘긴 공작부인을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우리 시어머니는 특이하셔.
"후훗, 드디어 우리 아들이 약혼녀가 생겼네요. 하아, 그동안 죽을 때까지 아들의 결혼식을 못볼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요... "
하긴 여자를 길가에 돌멩이 처럼 대했으니, 공작부인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나는 공작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바스찬이 가져온 케이크와 홍차를 마셨다. 우와, 이거 맛있네.
"어쨌든, 우리 카일론스 잘부탁해요."
"네, 공작부인."
"흠흠, 그럼 이제 식장을 좀 알아볼까요?"
"...예?"
공작부인의 눈빛은 진지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세바스찬을 시켜 식장을 알아오라고 말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잠시만요! 너무 빠른데요!
"공작부인, 카일론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어머, 오늘 돌아오는 날이였던가?"
다행히 공작부인을 진정시킨건 카일의 귀환 소식이였다. 어머, 카일이 돌아왔다고?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최대한 여유로운 척했지만, 이미 심장은 요란스럽게 뛰고 있었다. 야, 나대지마 심장아! 아무리 진정시켜도 그의 귀환은 내게 너무나 기쁜 소식이였다.
"라델양, 어서 가보세요."
"아니에요, 아직 공작부인과 담소를 나누고 싶어요."
공작부인을 두고 먼저 몸을 일으키는건 예의가 아닌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차피 같은 저택 안에 있으니, 언제든지 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다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후훗, 고마워라. 그러면 카일론스를 여기로 부르도록 할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공작부인."
세바스찬이 공작부인에게 단호히 말하였다. 그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더니, 이어 말했다.
"이미 라델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다고 말씀 드렸거든요. 그러니 곧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어머."
세바스찬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나타난 것은 단정한 기사복을 입은 카일이였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성큼 다가왔다.
"데려가겠습니다"
"그래,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렴."
카일은 공작부인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부드럽게 나를 안아올렸다. 꺄아, 이걸 사람들 앞에서 하면 어떡해! 나는 부끄러움에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옆에서 공작부인이 '역시 청춘이 좋구나' 라며 흐믓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게 들렸다.
"그럼 저녁식사 시간때 다시 보도록 해요."
공작부인의 유쾌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와 카일은 방을 나갔다.
*
"카일 안 내려줄거에요?"
방안에서 부터 정원을 지나 산책길까지 줄곧 카일은 나를 공주님 안기로 옮겨주었다. 대체 왜 나를 안아들었는지 의문이였지만, 어쨌든 어서 내려줬으면 좋겠다.
"어머니하고 무슨 얘기했어?"
"음, 허락을 맡았어요."
카일은 나를 가볍게 내려주더니,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퍽 다정한 손길이였기에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앗, 전방에 세바스찬이 카일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저러다 턱 빠지겠네.
"무슨 허락?"
"카일하고 결혼하는 거요."
근데 공작부인이 흔쾌히 허락해 주셨으니, 이제 카일은 제거에요! 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더니, 카일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머나, 저 눈빛...굉장히 많이 본거 같아!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일이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방으로 가자."
"에엑, 왜요?"
카일이 내 목덜미의 입을 맞추며 말하였기에, 굉장히 간지러웠다. 나는 카일의 어깨를 꼭 붙잡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예뻐서, 더 예뻐해 줄려고."
카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진심이라는 듯이 빛나고 있는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갑자기 내 눈앞에 야수가 있는 것 같아.
'으음, 왠지 위험해.'
방에 들어가면 한동안 못 나올거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다음에 예뻐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카일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휴, 방심할 수가 없네.
"그것보다 카일, 나 할말있어요."
나를 꼭 끌어 안고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카일을 잠시 떨어트려 놓고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으음, 이 주변에 있을 거 같은데...
"아, 찾았다."
나는 산책로 곳곳에 보이는 꽃을 열심히 모았다. 색색이 피어있는 꽃들이 내 품에 차곡히 모아졌다. 흠, 이정도면 되겠지!
"아, 세바스찬씨! 꽃 좀 꺾을게요!"
"이미 다 꺾어 놓고 무슨..."
"괜찮다는 말로 알아들을게요!"
나는 꽃을 아련하게 보고 있는 세바스찬에게 시선을 돌리고 카일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나를 어리둥절 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 이 꽃 받아요."
카일은 꽃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꽃에 파묻힌 카일이 너무나 예쁘고 좋아서 활짝 웃어보였다. 아, 나 어떡하면 좋죠? 당신이 너무 좋아요.
"지금 뭐하는 거야?"
"프로포즈요. 이번에는 내가 카일에게 프로포즈 할거에요. 카일, 나와 결혼해 줄래요?"
저번에는 카일이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프로포즈를 해보았다. 비록 갑작스럽고, 확실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내 청혼을 받아줄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죠?
"응, 할래. 나중에 싫다고 해도 도망못가니까, 각오해."
프로포즈를 한건 난데, 왜 카일이 한거 같은 기분일까? 당당한 카일의 모습을 보고 왜인지 코가 꿰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망치면 제국에 모든 기사들이 총출동 되는건 아니겠지..? 나는 잠시 수백명의 기사들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상상해 보았다. 어후, 상상만 했는데도 소름이...
"그럼 식장은 어디로 할까. 아, 먼저 날부터 잡아야 하나."
"허허..."
역시 카일은 공작부인의 아들이 확실했다. 벌써부터 식장을 예약할려는 카일의 모습에서 공작부인의 모습이 겹쳐보았다. 허허, 이제 레이번 가문 사람들이 익숙해 질려고해.
"결혼식은 따뜻한 남쪽섬에서 하도록하죠."
"라델이 원한다면 그렇게해."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졌기에 나도 농담을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핫! 이제 그정도 농담은 아주 가뿐하게 받아 넘길 수 있다구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곧 카일이 건넨 말 한마디에 다시 겸손해졌다.
"흠, 아니다. 그냥 그 섬을 사버릴까?"
"아니요, 절대 사주지 마세요."
여전히 레이번 가문 사람들의 농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섬을 사다니...레이번 가문이라면 분명 사고도 남겠지만, 내 상식선에서는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카일은 내가 당황해하며 거절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래? 난 사주고 싶었는데...' 라고 아쉬움을 담아 말하였다. 농담이라도 그런말을 하다니...조금, 아니 많이 놀랍다.
'무서운 점은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는 거겠지.'
역시 레이번 공작가문은 방심할 수가 없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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