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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살아남는 방식-79화 (83/83)

<-- 9. 겨울에서 봄으로 -->

9.

"이제 식사 하러 가시죠."

줄 곧 나와 카일 곁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서 있던 세바스찬이 말을 걸어왔다. 더이상 염장질을 보기 싫은건지, 아니면 정말로 저녁 먹을 시간이 된건지 모르겠지만 세바스찬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난 씻고 갈게. 기다리고 있어."

"네."

카일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이내 빠르게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척 다급해 보이는 것이, 빨리 씻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카일을 한동안 멍하게 쳐다보다가 세바스찬의 헛기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내 남자 뒷태가 너무 완벽해서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네.

"벌써부터 신혼부부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보기 좋아 보이는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요?"

"착각입니다."

음, 미간을 사정 없이 구기는걸 내가 봤는데 착각이라고?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믿어 주기로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세바스찬은 현재 솔로였다. 그러니 아마 부러워서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는 거겠지. 하핫! 솔직해지세요, 길치씨!

"길치씨는 외롭지 않으세요?"

"네, 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군요... 죽도록 외롭습니다."

굳은 얼굴로 대답을 하던 세바스찬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거 같다. 흑, 그마음...이해합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세바스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내요, 언제가는 꼭 생길거에요!

"근데, 식당 가는길이 이쪽이 아닌거 같은데요."

"아."

공작저 식당을 딱 한번 가보았지만, 이쪽이 식당으로 가는길이 아니라는 것 만은 확실했다. 슬쩍 소매로 눈물을 닦던 세바스찬은 잠시 넋이 나간 채로 서있다가, 이내 몸의 방향을 틀었다.

"음, 아마 저쪽일 겁니다."

"저기는 지하창고로 내려가는 곳인데요."

앞에 떡하니 지하창고 라고 써있는 푯말이 있는데, 어떻게 모를수가 있지? 내가 푯말을 가리키며 말하자, 심각한 길치인 세바스찬은 '어라, 언제 저택 구조가 바뀐거죠?' 라며 당황해 했다. 이 집사...너무 허당인데? 나는 반듯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 보고 있는 세바스찬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얼굴도 매너도 다 완벽한데, 그 완벽한 것들이  다 부질 없어 보일 정도로 길치라니...신은 역시나 공평했다.

"그냥 저를 따라오세요. 대충 기억해서 가볼테니."

"역시 듬직하시군요. 평생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아니...평생 모실 필요는 없는데. 내가 공작가로 시집오게 되면 당연히 세바스찬이 나를 담당하게 될 것이고, 나는 길치 집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아, 안돼! 저 길치를 어떻게든 고치지 않으면..!

"세바스찬, 길치에서 어서 벗어나길 바랄게요."

"저는 길치가 아닙니다."

내가 격려를 보내자, 세바스찬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하, 세바스찬...당신 빼고 이 저택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길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답니다. 세바스찬이 믿을 수 없어 하며 현실 부정을 하는 동안 식당을 겨우 찾아 갈 수 있었다.

"어머, 어서와요."

우아한 공작부인이 식당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공작부인 옆에는 언제 온 건지 레이번 공작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고, 카른 또한 맞은편에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내가 오자마자 책을 시녀에게 건넨 뒤,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아주 부드러운 동작이였다.

"죄송합니다. 길을 헤매서..."

내가 아니라 세바스찬이. 나는 뒷말을 삼키고 기다란 식탁으로 다가가 아무곳이나 앉았다. 오, 이 의자 편한걸! 여전히 의자도 완벽한 공작가였다.

"아니네, 이렇게 무사히 와준 것 만으로도 다행이지."

"어차피 또 세바스찬 때문에 늦은거지? 참나...세바스찬에게 길안내 시키면 안된다니까."

공작이 내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고, 카른은 세바스찬의 길안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나는 카른의 의견을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세바스찬은 길안내 하면 안돼.

카른과 함께 세바스찬의 길안내를 반대하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식당 문이 다시 한번 '벌컥'하고 열렸다. 나는 열리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머지않아 가벼운 옷차림을 한 카일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내게 성큼 다가오는 카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와요."

"많이 기다렸지?"

카일이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많고 많은 자리중에 내 옆을 고집하는 건 불만이 없었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서 조금 불편했다. 으음...이 상태로 어떻게 식사를 하라는 거지? 게다가 공작 부부 앞에서 이렇게 애정행각을 하면 혼이 나는게...

"하하, 좋을때군."

"그러게요. 어머,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더 붙어있어도 된단다."

그건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였다. 오히려 공작부부는 나와 카일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더 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하셨다. 흠, 카른은 확실히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뭐지? 원래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가 이런건가? 드라마에서는 '감히 네가 내아들을 건들여?!' 라든지, '네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을 홀리다니, 여우같은년!' 이라는 대사만 봐서 그런지, 나는 이러한 반응들이 생소했다. 으음, 솔직히 아까부터 나만 쳐다보고 있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 잠시만요. 연락이 와서..."

부담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통신구가 연락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시간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타이밍이 좋았다. 후, 어색했는데 다행이야.

'...헉.'

하지만 곧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은 접게 되었다. 오리턴 숙모. 오랜만에 보는 그 여자의 이름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 통신구 연락처는 어떻게 안거야?!

그러고보니 지금은 겨울방학이였다. 오리턴 숙모가 내게 생각할 시간을 두달 주었고, 아마 이번 달 내로 내 결정을 들으러 올 것이다. 하, 어차피 내 의견따위 무시하고 약혼을 진행시킬 생각일텐데...나, 어떡하지...

나는 통신구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톡톡 두드렸다. 어차피 피할 수 없기에 그냥 어떻게든 이상황을 헤쳐나가기로 결심했다.

"...안녕하세요. 오리턴 숙모님."

「그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통신구에서는 영상이 아닌 목소리만을 듣도록 설정해 놓았다. 오리턴 숙모의 얼굴을 차마 보기 싫었던 나의 소소한 반항이였다.

「내가 말했었지? 두달 시간을 주겠다고...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대답을 들으러 백작가로 가고 있다. 그러니 준비하고 있어라. 」

여전히 냉담하고 차가운 말투를 가진 오리턴 숙모였다. 아, 근데 나 지금 백작가에 없는데...그것보다 어차피 내 대답은 안들으실 생각 아니셨나? 나는 오리턴 숙모의 방문 소식에 얼굴을 굳히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숙모님, 사실 저 약혼자가 생겼...아니 생길 것 같습니다."

약혼식도 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정식으로 카일이 내 약혼자는 아니였다. 얘기를 들은 카일이 옆에서 시무룩 모드로 축쳐져 있지만, 난 애써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어했다.

"그러니, 저는 숙모님이 정해준 남자와 약혼할 수 없어요."

꽤나 단호하게 말한거 같아서 뿌듯하다. 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앞을 봤더니, 레이번 공작이 엄지를 척하고 들어 올려 주셨다. 어머, 귀여우셔라. 한참동안 통신구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왠지 불안한데...

「라델, 네가 착각하는게 있구나.」

침묵이 끝나고 오리턴 숙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분노를 삭히고 있는 듯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화났다. 지금 이 여자 화난거야.

「너는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내가 정해준 남자와 약혼해서 아이만 잘 낳으면 돼!」

오리턴 숙모님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카일이다. 도깨비같은 얼굴로 통신구를 잡아 부술려는 카일을 세바스찬과 카른이 겨우 말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딴남자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으라는 오리턴 숙모의 말에 깊은 빡침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일단 카일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옳지, 착해라.

"숙모님. 저는 제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 할거에요. 숙모님이 정해주신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은 커녕 약혼도 할 생각 없으니, 괜한 헛수고 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

숙모님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 쉬고는 다시 앙칼지고 거친 목소리로 말하셨다.

「참 어리석구나... 내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는게 가장 행복할 터인데, 제 발로 행복해질 기회를 걷어차 버리다니...쯧쯧.」

선택의 자유를 속박당하고 한 정략결혼이 분명 행복할 거라고? 참 어이없는 말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한심한 오리턴 숙모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래, 헛소리도 일단은 들어 줘야지.

「지금 약혼자가 될 것 같다는 남자가, 내가 골라준 남자보다 신분이 높고, 돈이 많을 줄 아는것이냐?」

네, 공작이라서 황족 다음으로 신분이 높고, 남쪽 섬을 사줄만큼 돈이 많은데요. 하긴, 오리턴 숙모는 상상도 못할것이다. 내가 레이번 가문의 장남과 약혼을 할려는 사실을... 오리턴 숙모는 내가 대답이 없자, 웃음을 터트리며 계속 말을 이어했다.

「바보같은년, 지금의 행복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고 하다니...」

년? 갑자기 나온 욕설에 식당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카일은 낮게 가라 앉은 눈으로 통신구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작 또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른은 놀란 눈으로 나와 통신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지금 저희 며느리에게 무슨 말을 하신거죠?"

갑자기 통신구를 낚아채더니, 이내 오리턴 숙모에게 따지기를 시전했다. 허억...공작부인? 나는 너무 놀라서 그저 입을 뻐끔 거리며 공작부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흐음, 그 남자의 가족들이랑 같이 있던 모양이군.... 이봐요, 당신이 누구 인지 모르겠지만 제 3자는 빠지는게 좋을 겁니다.」

"제 3자라뇨? 저는 곧 있으면 라델양의 시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보다 아까 지나친 말을 하시던데, 어서 제 며느리에게 사과하세요."

며, 며느리라뇨! 나는 대화내용보다 공작부인이 나를 부르는 호칭때문에 귀까지 빨개져 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통신구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웃기는군요. 당신, 내가 누군지 아는 겁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요. 어차피 당신을 다시 볼일도 없는거 같은데..."

공작부인의 차가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오리턴 숙모 뿐인 것 같다. 그여자는 아직도 자신이 통화하고 있는 상대를 짐작 하지 못한 것인지 점점 더 거친 말을 쏟아 붇고 있었다. 음, 조만간 오리턴 숙모님을 영영 못보게 되겠군.

「당신 누구야! 감히 나한테 그따위로 얘기해?!」

"교양이 없으신 분이군요...흠, 제가 궁금하시면 알려드릴게요."

공작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통신구로 영상을 볼 수 있게 설정하였다. 순간 우락부락한 오리턴 숙모님의 얼굴을 보고 놀랐지만, 천천히 심호흡을 하여 진정하였다. 아, 놀래라.

「어, 당신은..?」

공작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리턴 숙모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드디어 자신이 누구에게 싸움을 걸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오리턴 숙모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영상을 통해 너무나 잘 보였다.

"자,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오리턴 숙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이런 귀한신 분이...」

"어머? 아까랑 태도가 너무 다르시네요. 왜 갑자기 얌전해지셨나요?"

공작부인의 질문에 오리턴 숙모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을 보고 나는  오리턴 숙모가 얼마나 긴장을 많이 했는지 알수 있었다. 음, 지금쯤 죽을 맛이겠지.

「죄, 죄송합니다! 제가 공작부인을 알아뵙지 못하여, 큰 실례를..!」

"아, 거기까지. 너무 지루해서 못듣겠어요. 그리고, 사과를 할려면 우리 며느리한테 먼저 하세요."

웃는 얼굴로 차갑게 말을 내 뱉는 공작부인은 내가봐도 무서웠다. 아이고, 숙모님...상대를 잘못 골랐네요.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화나면 무서워지는 공작부인을 조심하자고, 머릿속에 메모를 해두고 있는데 오리턴 숙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라, 라델아. 내가 미안했다. 그러니, 제발 공작부인에게 말 좀 잘해다오..."

음, 내게 버럭 화를 내던 사람이 말 한마디에 이렇게 비굴해지다니. 역시 권력의 힘이 굉장하긴 하다. 나는 애걸복걸 거리며 사과하는 숙모님을 향해 '으음, 어쩌지?' 라고 말하며 시간을 끌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하였다.

"싫어요!"

자기가 한 일은 책임지고 자기가 끝내야 하는법. 오리턴 숙모의 오만함으로 일이 이 사태까지 오게 되었으니, 알아서 잘 해결해야 한다. 나는 미련없이 숙모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옆에 있던 공작부인은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이름은 잘 기억해 둘게요. 그럼..."

「공, 공작 부인!」

처절한 외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부인은 미련없이 통화를 끝내버렸다. 그녀는 통신구를 내게 건네더니, 이내 공작에게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다 들었죠?"

"흠, 그래."

"그럼 내가 원하는게 뭔지도 알고 있겠죠?"

"허허, 당신은 가끔보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지는 것 같군."

두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흐음, 대충 알거 같지만 깊게 생각하지말자. 어쩐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오리턴 숙모님이 큰일 날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라델양,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제게 알려주세요. 나는 언제나 며느리편이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이 내 손을 꼭 잡고 말하였다. 그녀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역시 공작부인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아까도 오리턴 숙모의 막말을 듣고도 온화한 얼굴을 유지 하시던데...

이제 이 분이 내 시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아, 여담이지만 오리턴 숙모는 얼마 후,  가지고 있던 영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 당하고 쫄딱 망해버렸다고 하며, 그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레이번 공작가의 무서움을 다시 깨달았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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