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1)화 (1/86)

1.

다들 조금씩 취해 가고 있었다.

소현은 잔을 기울였다. 한꺼번에 목으로 넘어간 알코올이 속을 한 뼘 더 뜨겁게 달군다. 테이블에 놓인 세 개의 양주병이 텅 빈 걸 보니 슬슬 열이 나는 기분이라 블라우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손목을 본 김 부장의 눈꺼풀이 게슴츠레 풀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강 대리는 언제쯤 결혼하려고 그러나?”

“제가요? 그런 걸요?”

자동 반사적으로 나온 웃음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김 부장이 산처럼 불룩 튀어나온 배가 흔들릴 만큼 껄껄거렸다.

“할 때가 됐는데, 일하고 결혼하려고 그래? 어디 남자 없어?”

“남자라,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성별은 남잔데요. 남자 있다고 다 그럴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생각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얼큰하게 취했는지 김 부장이 선을 넘는다.

“강 대리 올해 서른둘 아니야?”

이 자리를 빨리 끝낼 폭탄주를 제조하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윽고 웃으며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아쉽게도 서른하나예요. 부장님.”

웃는 입술이 어두컴컴한 내부 안에서도 꽃처럼 빛났다. 굴곡진 가슴을 지나 떨어진 긴 머리카락은 검은 윤기를 뱉어 냈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긴 목을 할퀴며 나오는 농염한 속삭임이었다. 높은 콧대에서 턱 아래까지 이어지는 곡선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장관의 정점은 바로 야화 같은 붉은 입술이었다. 그 입술 끝에 찍힌 점을 보던 부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나든, 둘이든. 서른 넘어가면 시간 빠른 법이야. 특히 여자는 몸에서 부터 티가 난다니까.”

“아, 맞습니다. 스물다섯 이후부터 꺾인다는 그런 속설이 있긴 한데 아닌가요? 부장님?”

“하하, 맞아. 맞아.”

허벅다리를 툭툭 치며 웃는 김 부장을 보며 소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꺾인 건 네 다리 사이에 있는 녀석이겠지.

“그런데도 강 대리는 참, 가만 보면 예쁘장하고, 귀티도 흐르고…….”

소현은 질척한 음성을 한 귀로 흘리며 병을 내려놓았다. 광고 기획팀 AE라면 기본 소양이었다. 30초짜리 영상 하나로 고객들의 구매욕을 일으키는 것이 숙명이다 보니 사람을 만날 때 찰나에 눈길을 사로잡는 외관을 고수했다. 소위 광고계의 모델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행과 꾸밈에 민감한 직업이었다.

“이대로 혼자 썩기엔 아까운데 말이야. 내 좋은 녀석 있으면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누가 좋을까……아무래도 연상이 좋겠지?”

“부장님. 한잔하시죠.”

소현이 잔을 내밀자 얼큰하게 취한 김 부장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아무렴, 내 강 대리가 준 건 마셔야지.”

강 대리 품절녀 등재를 위해 건배, 하며 허공에 뜬 잔이 김 부장의 입으로 향했다. 꼴깍꼴깍 움직이는 두툼한 목울대를 보며 소현은 가만히 술을 들이켰다.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던 김 부장의 얼굴이 입을 떼어냄과 동시에 파아 터졌다.

“크으, 역시 맛깔난다. 맛깔나. 강 대리가 타주는 비율 전수 좀 받아야겠다니까.”

“하하, 부장님. 전수 받을 필요 있습니까. 여기 제조자가 있는데요.”

이런 자리 같은 건 남자들이 만든 썩어빠진 전유물이었다.

“아무렴. 강 대리가 있으면 자리가 평소보다 들떠.”

이딴 접대는 대한민국에서 전부 싹 다 사라져야 한다. 광고 업체는 외주 받은 만큼 충실히 결과물을 완성하면 그만이고, 광고주는 그걸 평가하면 된다. 만족스럽다면 다음이 있는 거고. 그 평범하고 당연한 사이클에 이런 접대라는 불순물이 끼니 여럿 삐걱거리며 피곤해지는 거다.

소현은 유독 피곤함을 극도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광고주들이 여자 AE를 꺼리는 이유가 고작 이딴 접대 때문이라니.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뻔히 다 알기에 한 번은 저도 가겠다고 선언했다. 난처해하던 눈빛들을 무시하고서 합류한 소현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뻔하지 않게 한 번 놀아줬을 뿐이다. 여자를 소비하는 거로 시작하는 구닥다리 클리셰 없이 순수하게 입담과 즐거움으로만.

그게 신박했나. 이후부터 접대 자리가 생길 때마다 강소현을 꼭 데려오라는 광고주의 당부가 있을 정도니, 일이 이렇게 된 데엔 어느 정도 소현의 책임도 있었다.

소현은 늘어진 손목을 부드러이 꺾어 올려 시계를 보았다.

“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이, 어디가. 강 대리. 이제 막 시작인데.”

붉은 입술이 웃으며 재킷을 들었다.

“비워야 또 마시죠.”

“아, 화장실 간다는 거였어? 하하하.”

방이 떠나가라 웃던 김 부장이 빨리 오라며 신신당부했다. 방문을 닫은 소현은 적막한 복도에서 눈을 감았다. 사회적 지위가 있든, 없든 술 취하면 개와 똑같은 걸 알면서도 스트레스가 축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양면적인 모습을 하도 봐왔기에 드는 모멸감일 수도 있다. 문에 기대어 있던 소현이 나른하게 등을 떼었다.

“더럽게 말귀 못 알아먹네.”

소현은 확 트인 바깥으로 나섰다. 어둑했던 밤하늘이 제법 차가웠다. 건물 외벽에 붙어 재킷을 뒤적거린 소현이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입에 긴 장대를 하나 물고서 불을 붙였다.

“저 꼰대 새끼는 오늘따라 슬슬 긁고 난리야…….”

결혼이니 뭐니 성희롱으로 고발하고 싶은 눈동자를 지우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재상 그룹이 광고주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입으로 압살했을 거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 없는 대기업인데 이번에 재상 전자의 기대작인 QD 디스플레이 TV 광고를 회사에서 맡았기 때문에 함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낸 소현은 확인하지 않아 숫자가 떠 있는 톡 대화 목록을 빠르게 내렸다.

[오늘 뭐 해?]

[보고 싶다. 저녁에 시간 있어?]

[소현아. 바빠? 연락이 없네.]

불타는 금요일에 걸맞게 저를 찾는 남자들이 많았다. 벌써 새벽 12시였다. 이 시간에 부르면 올 수 있는 애가……대화창을 내려가던 소현이 액정을 불현듯 꺼 버렸다.

“됐다, 언제 끝날 줄 알고.”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지우려는 듯 필터를 잘근 깨물었다. 연기를 뱉자 앞에 놓인 건물에서 휘황찬란한 간판이 깜빡거렸다.

스트레스 받으면 성욕으로 풀어야 하는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소현은 흐트러지는 불빛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무슨 수로 이걸 고쳐. 그 졸업하기 힘들다는 하버드를 4년 만에 주파하고, 뉴욕 광고사에 AP로 취직해 업무에 찌들었을 때에도 이 해소법만은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쾌락에 빠진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안 날 뿐더러, 피곤에 찌든 몸도 훨씬 더 가벼워지곤 했다.

배출이 답이다. 쌓아 두면 병이 된다는 철칙 아래, 성행위는 소현에게 비타민이나 다름없었다. 시원하게 땀 한 번 흘리고 나면 개운할 정도였으니 좋게 표현해서 제게 즐거운 운동 같은 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연애는 소현의 편이 아니었다. 절대 한 남자에게 정착하는 감옥 같은 생활은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소현 스스로도 하고 있었다. 빨리 질렸고, 그건 적당선을 모르고 제 사생활에 참견하는 남자들의 영향이 컸다.

매일이 야근인 살인적인 업무량을 보며 결혼 후엔 집안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데다가 아이 얘기를 꺼내는 통에 이젠 연애가 부담스러웠다. 전 애인과 그런 이유로 헤어진 지 한 달 째인 지금, 소위 말해 썸만 타는 중인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애정을 언어로 말해 주길 갈구하고 확인 받고 싶어 했다. 손바닥으로 미간을 쓸어 올린 소현이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안 한지도 벌써 한 달이고.

필터를 빨아 당기는 입술이 짜증스럽게 벌어졌다.

“어서 끝내자, 진상들아.”

길게 연기를 뱉은 소현이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작은 향수를 온몸에 뿌렸다. 거울을 보며 전투적으로 립스틱까지 다시 말끔하게 바른 소현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술이 들어가면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는 체질이라 이 정도면 곧 한계가 올 듯싶었다.

복도를 지나 문을 연 소현은 잠시 주춤거렸다.

방을 착각했나.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부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긴 소파에 앉은 남자의 다리 위에 여자가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에서 찰랑였고 그곳을 감싼 손가락은 길고 곧았다.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잡자 가녀린 어깨가 바르작거리며 떨렸다. 질척이는 소리만 들어도 두 사람이 키스 중이라는 것은 알았다. 한데 너무 놀라선지 발이 차마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나가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할 무렵, 남자의 감긴 눈꺼풀이 올라와 소현과 마주쳤다.

“뭐야.”

타액으로 젖은 목울대에서 나온 목소리가 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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