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화 (2/86)

2.

소현은 심장을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마수의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 했다. 창백한 낯선 얼굴을 봤으면 멈출 법도 한데 남자는 그 말 한마디를 흘리고선 벌어진 입술 간격을 다시 좁혔다. 흐읏, 가느다란 신음이 애처롭고 뜨겁게 새어나왔다. 여자는 뒤돌아 있어 안 보인다지만 남자는 저를 발견했는데도 딱히 행위를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낯 뜨겁고 농밀해져 갔다. 무자비한 움직임에 함락당한 여자의 입에서 질척하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격양된 공기에 소현은 흐트러진 정신을 찾았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던 건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는 소현의 존재를 눈치챈 이후부터 눈을 감지 않고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제게 키스하듯이.

여자의 얼굴에 가로막혀 감상이 쉽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비틀어 두 눈으로 응시해 온다. 혀 놀림이 느껴질 만큼 매끈한 소리가 공기와 엮였다. 소현은 말 대신 타액을 삼켰다. 그러자 남자가 제게 눈으로 웃는 것만 같았다.

오묘한 눈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 입술을 뗀 남자의 양쪽 눈으로 잿빛을 연상케 하는 회색이 연하게 감돌았다. 소현을 주시하던 그가 여자의 귀 끝을 핥아 올리며 아스라이 물었다.

“끌려?”

눅눅히 젖은 목소리가 무례하게 소현을 붙잡았다. 느리게 입을 벌린 소현이 말했다.

“응, 좀 그러네.”

그 말에 무채색으로 점철된 눈동자가 빛을 띤다. 소현은 의아함에 뒤돌아본 여자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실례했어요. 방을 잘 못 들어오는 바람에, 방해해서 미안해요.”

하던 짓 계속 하라는 듯 소현이 손짓을 해보이고선 문을 닫았다. 술에 취해 헛것을 봤나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남자의 눈동자도 그랬고,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 없던 제 행동도 의심스러웠다.

“컨디션이 안 좋나.”

이번에는 확실하게 문을 확인하고서 들어갔다. 바로 옆방이었으니 착각할 만도 했다. 왜 이제야 오냐며 성화를 떠는 김 부장을 보니 소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원래 제가 용의주도한 면이 있잖아요. 정말 말 그대로 화장실만 다녀왔겠어요?”

“또 누구랑 연락하고 왔구만?”

“이 시간에요? 글쎄요, 답은 부장님 상상에 맡겨드리고 싶네요.”

그때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문 쪽에 앉아 있던 소현의 고개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

안에 있던 사람들은 웨이터가 방문한 줄 알고서 문 쪽을 보지 않았다. 아니면 소현이 재빨리 일어나 그들의 앞을 막았기에 못 본 걸 수도 있다. 소현은 문에 선 형체를 밀어내며 다급히 복도로 나섰다.

등 뒤로 문고리를 잡아 꽉 닫은 소현이 고개를 들었다.

“방을, 잘못 찾으셨네.”

취해서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넌 그랬겠지.”

소현이 감추듯이 막아 선 문을 본 그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난 맞게 왔어.”

입가에 담배를 문 남자는 아까와 똑같은 시선의 강도로 소현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 좋아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소현의 눈살이 구겨졌다. 그가 담배를 치아 사이에 끼우고서 비웃듯이 말했다.

“골고루 끼고 노네.”

소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자리에 홍일점으로 낀 거다. 비록 술을 마셔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그렇지, 다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웃긴 건 이 남자가 그런 분들을 옆구리에 끼고 노는 사람들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들이 취향?”

지포 라이터를 딸깍이던 남자는 장난이 아니라는 듯 심오하게 질문했다. 안에 있는 남자들이 내 들러리라도 되는 것인 양. 제 사고를 뒤집어 버리는 화법이 놀랍고 우스웠다. 침묵이 긍정의 뜻으로 비쳤는지 남자가 비싯 웃음을 흘렸다.

“와, 비위 더럽게 좋네.”

……얘 좀 귀엽네. 소현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 딸깍이던 라이터에서 불길이 일었다. 남자가 담배 끝에 대려고 하자 소현이 긴 장대를 빼앗았다.

“여기서 피우면 화재 경보 울리는데.”

“…….”

담배가 사라진 입술이 공백을 메우지 않고 멈춘다. 섬뜩한 시선이 올라와 소현에게 고정됐다. 밝은 곳에서 보니 색이 선명했다.

렌즈인가. 투명한 회색빛이 조명과 부딪치자 강렬하게 다가왔다. 눈매나 턱선은 날카로운데, 긴 목 아래로 놓인 몸은 또 우직했다. 얇은 셔츠 한 장 걸쳤음에도 소현은 제 눈앞에 놓인 체격이 바위로 조각된 형상처럼 느껴졌다. 그건 높게 솟은 키도 한몫했다. 186? 아니, 그보다 더 큰가.

무슨 상관인가. 체격 차이에 겁먹을 소현이 아니었다.

소현은 손에 들린 담배를 꺾으며 바닥으로 던졌다.

“지금 취기에 반말하는 거 같은데, 아까는 내가 미안하다고 했죠? 나도 살짝 취해서 남의 방에 들어간 실례를 저질렀어요. 다시 말할게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으면 알아 들어야지. 소현은 눈빛으로 경고했다.

“그럼 다시 각자의 일을 하러 가볼까? 애인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야.”

“애인 아니야.”

그럼 방에서 키스하던 여자는 누군데? 물을 뻔 했지만 키스 정도야 사귀지 않는 사이에서도 충분히 이뤄지는 거니까. 그럴 수 있다며 소현이 수긍하던 사이, 남자가 떨어진 담배를 응시했다. 어처구니없는지 웃음을 흘리더니 손에 든 지포 라이터를 뒷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됐고 안에 정리하고 나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소현은 팔짱을 꼈다.

“나 업무 중이라서 바쁘거든? 그쪽도 신경 끄고 가서 할 일 해.”

“업무?”

이딴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식으로 눈썹을 치켜 든다. 소현은 더는 말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다.

“나 지금 일하는 중이라고.”

“언제 끝나는데?”

뭐하자는 거야. 소현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너와 이러는 사이에도 내 귀중한 시간이 지금 헛되게 소비되고 있는데,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먹을래? 사과받았으면 끝내고, 취했으면 곱게 집에나 가라.”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결점 없이 매끈한 피부 결만 봐도 몇 살인지 대략 가늠이 됐다. 군대도 안 다녀왔겠지. 서로 술 좀 들어갔으니 반말까지는 이해해 준다지만 이 이상은 봐줄 수 없었다.

“문 한 번만 더 열면 손가락 부러뜨린다.”

소현은 정말 분지르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의 손가락을 노려보고선 문을 열었다. 닫힌 문을 본 남자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다 긴 손가락이 부러뜨려지는 느낌은 한 번도 당해 보지도, 느껴 본 적도 없던 터라 잠시 고민한다. 허리가 꺾인 채 버려져 있는 담배를 본 남자가 손을 뗐다.

“웃기는 여자네.”

허공에 놓인 제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던 남자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

“이미 계산되셨습니다.”

“예? 누가?”

로비에서 작은 실랑이가 들려왔다. 어지러운 머리를 쓸어 넘긴 소현도 한계치에 다다랐다. 얼큰하게 취해서 뒤뚱거리는 김 부장을 본 소현은 팀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팀장님. 일단 김 부장님 먼저 보내드리세요.”

“아, 그래. 강 대리가 좀 처리해.”

“네.”

팀장을 대신해 로비 카운터에 선 소현은 쨍한 조명 빛을 받아 눈이 따가웠다.

“뭐라고, 계산을 했다고요?”

“네. 이미 다 되었습니다.”

오늘 먹은 게 얼만데, 고급 가라오케인데다가 청담동이란 자릿값도 얹은 터라 괴물 같은 금액을 기록했을 게 뻔했다. 경비 처리를 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소현은 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그거 취소하고 이걸로 다시 긁어 줘요.”

“계산하신 분 카드가 저희한테 없어서요.”

“누가 긁었는데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 나 참. 돈 안 받겠다는 가게는 또 처음이네. 소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으니까, 택시 기사님 한 분만 불러 줘요. 삼성동이요.”

회사엔 내가 사비로 처리 했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취하긴 한 건지 모든 것들이 다 귀찮아졌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질 뿐. 귀소 본능이 아우성치는 가운데 소현은 밖으로 나갔다.

“가셨어요?”

“어, 강 대리는 어떻게, 불러 줘?”

“아뇨. 불렀어요.”

내일이 주말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죽었을 지도 모른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을 달렸을 터였다. 접대해야 할 고객이 사라지자 다들 표정 위로 피곤함이 드리웠다.

“그럼 강 대리 월요일 날에 보자고.”

“네. 가세요.”

임무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향했다. 소현은 회사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 뒤에야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가을임에도 여름처럼 공기가 무더웠다. 알코올에 찌든 몸이 뜨거운 데다가 나른해진다. 밤일 때 열기를 띠는 붉은빛 네온사인을 보며 소현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하……미치겠네.”

아까 본 남자의 키스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진짜 한계가 오긴 왔구나. 소현은 손에 잡힌 핸드폰을 꺼내 가장 위에 있는 대화창을 눌렀다. 그때 등 뒤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왔다.

“기다렸는데 어딜 내빼.”

커다란 손이 정확히 소현의 핸드폰을 낚아채 가져갔다. 등골이 오싹해진 소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아까 본 그 남자가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너 아직도 안 갔니?”

남자는 말없이 눈가를 구겨 뜨렸다. 더운 건지, 아니면 방 안에서 여자와 마저 진도를 뺀 건지 셔츠 단추가 여럿 풀려 있었다. 소현을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동자가 음영 져 탁해진다.

“끌린다며.”

휘청이듯 앞으로 기운 목소리가 일순 소현의 청각을 흩트렸다. 소현이 물러설 새도 없이 남자가 고개를 비틀었다.

“나도.”

흐트러진 남자의 숨이 공기와 함께 피부로 달라붙었다.

“그 말에 관심 생겼는데.”

독 같은 언어가 소현의 가슴에서 발화했다. 녹아내린 끈적한 타액을 삼킨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얌전히 있었으니 뭐라도 줘야지?”

노골적인 유혹 앞에 소현은 무방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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