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간신히 버텨 오던 머릿속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허탈감에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온지 모르는 남자였다.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 하다못해 나이 역시 모른다. 보나마나 불장난 같은 행위가 될 것이다. 소현은 웃던 입가를 죽였다.
“야.”
소현은 눈썹을 구기며 남자를 불렀다. 알게 뭐야.
“너 분명히 아까 걔 애인 아니라고 했다.”
내가 급한데.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나 그런 거 안 키워.”
소현은 때마침 도착한 택시에 올라탔다. 남자는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근처에 있는 호텔로 목적지가 변경되었다. 남자는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싣고 민망할 정도로 소현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얼굴 옆면에 흘러내리는 시선은 마치 독물 같았다. 소현은 지지 않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거만하게 꼰 다리 사이 감춰진 그곳을.
호텔 체크인을 한 소현이 방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남자가 소현을 벽으로 몰아 붙였다. 등줄기를 짜릿하게 울리는 둔탁함이 지금은 도리어 흥분되었다. 키스할 것처럼 다가오기에 입술을 벌리자 남자가 물었다.
“여기. 뭐 묻은 거 아니지.”
“……뭐?”
소현이 되묻자 내리깐 남자의 시선이 깊어졌다.
“입술에.”
하, 웃음을 흘린 소현은 어이가 없었다. 입술 끝에 절묘하게 위치한 점이 신기한 모양이다.
“점이야.”
“난 뭐 묻은 줄 알고.”
남자가 입술이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계속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숨결이 입술에 닿아 녹아내린다. 견딜 수 없어 소현이 얼굴을 비틀자 남자가 손으로 턱을 잡아 고정했다.
“가만히 있어 봐.”
젖은 목소리가 혀의 점성과 뒤섞였다. 소현은 숨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손가락에 감겼다.
“……그만 보고 핥아 봐. 없어지나.”
이번엔 남자가 웃으며 혀끝을 세웠다. 살결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는 감촉에 소현은 숨이 턱 막혔다. 얘는, 혀를 왜 이렇게 잘 써. 여유롭게 움직이는 혀 놀림에 소현의 발끝이 섰다. 남자가 벌어진 입술 점막으로 들어와 훑었다. 소현의 혀를 가볍게 지나치고선 다시 왼쪽 입술 끝을 빨아 당겼다. 혀끝을 누르며 뭉개뜨린다. 자신의 점을 집요하게 건드리니 소현은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소현이 손을 뻗어 남자의 바지 버클을 움켜잡았다. 끌어당기자 끌려와 주며 남자가 웃었다.
“와. 화끈하네?”
“기다렸다가 주워 온 보람 있지?”
소현이 밀착하자 남자의 숨결이 거세진다. 내리꽂히는 눈동자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소현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바지를 벗겼다. 아래에서 빚어지는 마찰에 남자의 근육이 솟았다. 남자가 다시 키스할 것처럼 다가오자 소현이 허리를 뒤로 뺐다.
“너는, 렌즈니?”
남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소현을 보았다. 답을 추궁하듯 드로어즈 위로 도드라진 형체를 손끝을 세워 쓸어 올리자 남자가 숨을 안쪽으로 삼켰다.
“아니. 내 눈인데.”
아니라고? 소현은 의외의 답에 놀랐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눈을 가지고 있지. 물러선 김에 여유를 가지겠다는 듯 남자가 느릿하게 소현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보는 덴 문제없어.”
브래지어 안으로 풍만하게 담긴 연한 살결을 본 남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단추를 푸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진다. 손이 치마까지 내려가는 동안 소현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이 특이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건 남자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고 그런 점이 눈동자를 장점으로 돋보이게 했다. 애초에 남들과는 다른 존재감이 제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과시하지 않는 그 무심한 행동이 신비감으로 작용했다. 그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뚫어지게 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남자가 소현의 얼굴 앞에서 물었다.
“신기해?”
“아니.”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남자는 바람 새어나가듯 웃으며 말했다.
“만져 보든가.”
“눈을 어떻게 만져?”
남자가 치마와 속옷을 동시에 내렸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소현은 소름이 돋았다.
“난 더한 곳도 만지잖아.”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남자가 소현의 입술 끝 점을 혀로 눌렀다. 손가락과 입술 끝이 동시에 밀접했다. 또 혀로 집요하게 점을 핥기 시작한다. 손가락도 그 움직임을 따라 파헤치고 더듬었다. 드로우즈 밴드에 손가락을 끼운 소현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남자가 이를 세워 입술 옆을 깨물었다.
“아!”
아찔함에 소현이 소리를 내질렀다. 한껏 예민하게 도드라진 곳을 쓸어 올린 손가락 탓에 고통과 흥분이 함께 뒤섞였다. 통감이 더 우세한지 입술 끝이 화끈거린다.
“진짜 점인가 보네.”
아픈 것은 고사하고 갑작스럽게 깨문 태도가 버릇없어 소현이 눈을 치떴다. 펜으로 그린 건줄 알았나. 남자가 소현의 입술을 혀로 덧그리며 눅눅한 소리를 냈다.
“억울하면 너도 해. 내 눈에.”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굳힌 저 눈을 깨무는 대신 소현이 남자에게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혀가 뒤엉키자 허벅지 아래를 파고든 손길이 빨라진다. 소현은 움찔하며 잡아먹힌 숨을 뱉어 냈다.
“문질러.”
가까이에서 마주친 눈빛이 번들거렸다. 소현은 헐떡이며 속삭였다.
“뭘……하아.”
타액으로 번진 입술만큼이나 습지가 된 부위로 남자가 제 다리를 세워 고정시켰다. 골반이 앞뒤로 움직였다. 소현은 꼼짝없이 거기에 갇혀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진액처럼 흘렀다.
“미끄러워서 좋은데.”
잘게 다리를 떨자 소현은 아찔해져 고개를 젖혔다. 남자의 검지로 빛이 닿자 얇은 막이 젖은 채로 반사됐다. 남자가 제 입술에 손가락을 물었다.
“너 정말 미끄러워.”
소현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곧 한쪽 다리가 허공으로 뜨더니 남자의 손에 잡혀 골반까지 올라갔다. 덩치는 큰 게, 제멋대로 하고 싶어 죽으려는 모양이다. 소현은 알았다는 듯 발끝을 더 세워 남자의 목을 감싸고 키스했다.
*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소현은 손끝을 더듬었다. 탁자에 놓인 시스템 버튼을 누르자 창가를 덮은 암막 커튼이 우아한 드레스 자락처럼 열렸다. 맹렬하게 찔러 오는 눈부신 햇살에 눈꺼풀을 구긴 소현은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을 제일 먼저 마주했다.
“아……맞다.”
나 어제 얘랑 잤지. 이마를 짚은 소현은 알딸딸한 술기운이 날아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진탕 마셨어도 잊힐 얼굴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정교하게 세공된 얼굴 위로 햇살이 속살을 드러내며 앉았다.
잠든 남자의 얼굴은 어제와 달리 무척 앳돼 보였다. 어제 저를 몰아붙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내려앉은 긴 속눈썹이 얌전하다. 나체로 누워 있는 짐승 같은 몸 위로 이불을 덮어 가린 소현은 뻐근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침대를 벗어난 소현은 욕실로 향했다.
이토록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남자와 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낯설고 어색할 법도 할 텐데, 소현은 개운해진 감각을 먼저 상기하는 저 자신이 놀라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쾌락에 머릿속이 여러 번 백지가 되었으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와도 남자는 취침 중이었다.
소현은 말끔해진 시야로 어젯밤 행위가 벌어진 과정을 차례대로 훑었다. 침대까지 이어진 옷들은 20살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감당하기엔 비싼 브랜드 제품이었다. 어제 성급한 손길로 제 셔츠를 풀던 거친 모습이 떠오른다. 힘은 세서는, 이제 보니 디자이너의 걸작인 셔츠 단추 하나가 애석하게도 뜯겨 나가 있었다. 소현은 꼬리를 무는 것처럼 검은 드로어즈를 지나 종착지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어린애가 걸렸네.”
어제 참았으면 좋았는데, 무서울 것 없는 어린애답게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든 탓에 꼼짝없이 걸려 들었다. 그 유혹에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섹시한 것도 맞았고, 테크닉이 훌륭한 것도 맞았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뱉는 말은 거셌는데 부딪치는 입술은 또 끝내주게 야릇했다. 밑을 파고드는 혀끝은 더 노골적이었고. 소현은 얼얼한 허리춤을 잡고서 제 옷을 챙겨 입었다.
소란스러우면 깰 법도 한데, 남자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 탁자로 다가간 소현은 펜을 찾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글자를 써내려갔다.
깨우기는 뭐하고, 쪽지라도 하나 남겨 둘 생각이었다. 어젯밤 꽤 만족스럽기도 했으니 성의 표시로.
펜을 내려놓은 소현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탁자에 올려 두고 그 옆에 바닥에서 주운 셔츠 단추를 함께 두었다. 이정도면 수선비로도 모자라 세탁까지 충분히 할 거다.
[어젯밤엔 즐거웠어.]
네 덕분에 쌓인 스트레스 해소를 말끔히 했다는 말은 숨겨 두고서.
소현은 그대로 호텔 방을 나섰다.
남자가 깨어난 건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꺼림칙한 벨 소리가 남자의 평온한 고막을 두들겼다. 이불에 파묻힌 육체가 느릿하게 침대를 헤집었다. 팔을 뻗어 소리가 나는 물체를 건드린 남자는 눈뜨지 못하고 숨만 고르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체크아웃 시간을 알려드리려고…….」
“미뤄.”
말을 꺼내자 머릿속이 묵직하게 울렸다. 친절한 여자의 음성이 몇 차례 이어졌다. 남자는 그를 무시하고 수화기를 도로 엎어 두고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한 알코올 내음이 아스라이 번졌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버릇 탓이다. 어제도 뇌를 녹여 버리려고 진탕 마셨었다.
몸을 세워 나른하게 목을 젖힌 남자는 눈을 떴다. 각막을 찢을 것처럼 들어오는 햇살이 불쾌감을 부추겼다. 남자는 인상을 구기며 갈증부터 해소하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득 이곳이 낯선 공간임을 인지했다. 지나치게 작은방 사이즈와 비즈니스호텔처럼 보이는 간소함이 눈에 차례대로 담겼다. 제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협소한 구조였다.
제가 이딴 곳을 예약했을 린 없을 테고, 어제 그 여자가 계산을…….
남자는 물 한 통을 전부 비우고서 축축한 입가를 핥았다.
“어디 갔지.”
탁한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다. 곳곳을 헤집듯이 돌아다녔지만 여자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시트 한쪽에 움푹 팬 빈자리를 주시하며 남자가 그 위로 앉았다.
“…….”
침대 옆 탁자에 웬 노릿한 지폐 두 장이 놓여 있었다. 여자의 필체로 추정되는 메모지를 손에 들었다. 남자가 다리를 꼬며 그녀가 놓고 간 단추를 입에 넣고 사탕처럼 굴렸다. 입안에서 혀와 만난 단추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술에 취했어도 과정이 전부 세세히 기억났다. 그것은 날카로운 끌로 뇌에 새긴 듯 외설적인 장면이었다.
매끄러운 허벅지 안쪽의 피부는 얇고 부드러워 금세 자국이 남았다. 야릇한 흔적이 남겨질 때마다 피부의 떨림이 남자를 젖은 안쪽으로 인도했었다. 코끝과 혀를 마비시키는 체향이 아직도 남자의 뇌 속에 잔향이 되어 흩날렸다. 탁하게 내려앉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흥분감에 휩싸였을 땐 매혹적인 교성이 되었다. 입술 옆에 찍힌 점이 하얀 액체와 뒤섞였을 땐…….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메모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뒤에 놓인 지폐 역시.
즐거웠다는 말 그대로, 남자도 어젠 꽤 즐겼었다. 짐승의 교미처럼 쾌락에만 몰두해 달려든 것도 얼마 만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처음인가. 술에 곯아떨어지든 여자 쪽에서 먼저 덤벼들든 둘 중 하나였었다.
제가 욕구에 못 이겨 접근한 것도 처음인데 푹 잠든 터라 기분이 상쾌하기까지 했다. 선명한 뇌로 헐벗은 여자의 실루엣이 그려지고 있었다. 꽤 자극적이었는지 금세 남자를 다시 그때의 궤도로 달궈 놓았다. 남자는 뜨거워진 제 하반신을 외면하며 글자를 씹어 먹듯이 보았다.
턱에 힘을 주자 아드득, 소리를 내며 단추가 짓이겼다.
그녀가 놓고 간 지폐 두 장을 빤히 보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어딘가에 버려진 핸드폰을 주워 든 남자는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졌다. 기다리는 동안 여자의 몸을 애무하듯 단추가 혀 위에서 끈적하게 굴렀다. 골반을 짚은 손가락이 기다림을 쫓듯 움직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어제 결제한 그 테이블.”
남자는 생채기가 난 단추를 휘감으며 발음했다.
“거기서 남자들 끼고 놀았던 여자 이름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