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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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작은 부분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서울 프리미엄 호텔 라운지 바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VIP 고객들에게만 허락된 개별적인 룸은 특별히 격차를 느낄 수 있는 구역이었다. 거물들의 비즈니스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라 사생활 보호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주 고객들이었지만 오늘은 이 룸에 새파랗게 젊은 남자들이 포진했다.
“뭐, 여자가 먹고 버려?”
“그런 거 같다니까.”
이제 막 룸 안에 들어온 민준의 안면이 굳었다.
“이거 주어가 바뀐 거 같은데, 걔가 아니라 여자가 그랬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민준은 자리의 주인부터 찾았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그 여자 찾는다고 핸드폰만 보고 있지. 연락처도 안 남기고 갔대.”
하지만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채였다. 그러니 빈틈을 타 민준에게 심각성을 알려주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민준은 의심을 가장한 헛웃음을 흘렸다.
“몰래카메라 하려면 현실 가능한 거로 하든가. 연락처를 왜 남겨? 걔가 여자랑 번호 교환하는 애도 아니고.”
“그러니까 난리 난 거죠. 달라고도 안 했는데 먼저 떴으니까 지랄 같을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민준이 진지하게 재킷을 벗었다.
“하긴, 걔 성격에…….”
이쯤 되면 민준 역시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대화에 가담했다.
“거기다가 돈까지 두고 갔다더라.”
“돈? 미쳤네.”
소파에 앉은 민준은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걸렸다며 혀를 찼다. 이 와중에 궁금증이 솟는 걸 보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날 수도, 봐온 적도 없기 때문일 거다. 민준은 호기심에 바싹 마른 입가를 문질렀다.
“왜, 많이 두고 갔대? 얼만데?”
“십만 원.”
하, 입에 흘러나온 웃음이 실소로 변했다. 적어도 그 남자에게 돈을 주고 소위 말해 먹고 버릴 정도면 급이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패기를 부릴 정도면 배경이라도 두둑해야만 했다. 그런데 놓고 간 금액이 십만 원, 듣기론 오만 원짜리 두 장이라고 했다. 민준은 넌지시 말했다.
“십만 원이면……100달러 아니야?”
“이거 세상 물정 모르는 거 티내네. 요즘 환율 모르냐? 90달러야, 인마.”
“와.”
진짜 그 여자 난리 났네. 걔 성격 보통이 아닌데. 돈다발을 놓고 갔어야지, 십만 원이라니. 그 남자의 하루 몸값을 감히 측정해본 적 없지만 결단코 그 정도 코 묻은 금액은 아닐 거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일어났는데 90달러 밖에 안 되는 돈만 놓고서 여자는 떴다고 생각해봐라. 쟤 성격에 용납이 가겠어?”
이쯤 되니 주인공도 없는 이곳 공기가 왜 이렇게 따갑고 살벌한지 납득이 갔다. 하나같이 죽상을 하고서 앉아 있는 것도. 겉보기엔 다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일어날 불행을 걱정하고 있는 듯했지만 거기엔 저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우세했다.
남자는 뭐가 되었든 제 가치를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는 걸 싫어한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남자가 하는 일은 뻔했다. 그때 외부와 단절돼 있던 문이 열렸다.
“짜잔.”
갑작스레 찬물을 끼얹은 듯 실내가 고요해졌다. 문을 닫고 걸어오는 어여쁜 얼굴을 본 남자들의 표정이 안도로 풀어졌다.
“뭐야……넌 여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듯 풀어졌지만 곧 불청객으로 취급 받았다. 여자는 상관없는지 주변부터 살폈다. 누굴 찾는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후각이 예민한 개처럼 짙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냄새로 자리를 찾았는지 가운데 빈 소파를 빤히 본다.
“친구들이랑 잠깐 놀러 왔다가 민준 오빠 보여서 몰래 따라왔지. 어디 갔어?”
“화장실.”
아, 화장실. 높은 하이힐이 당당히 빈자리에 앉는다. 무슨 자격으로 앉느냐는 식의 추궁 담긴 시선들이 날아오자 여자가 태연하게 제 잔을 챙겼다.
“갑자기 끼어든 거 아니니까 그런 눈들 하지 마. 따지고 보면 어제부터 만나고 있던 건 나였으니까.”
“어제 만났었어?”
“응.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갑자기 그냥 가라고 하긴 했지만.”
남자의 변덕에 내성이 없는 터라 여자가 투덜거렸지만 반질반질한 입술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키스했던 그 장면만 몇 번이고 돌려봤는지 모른다. 탄성에 버무려진 근육들은 제 입술을 덮을 때 포악하게 부풀었다가 혀를 깊숙이 찌르고선 나른하게 빠졌다. 성이 난 허벅지 위에 올라가 앉았던 엉덩이가 아직도 여운에 잠겨 간질거렸다.
“그냥 가지 그래.”
민준은 진지하게 여자를 걱정했다.
“왜? 같이 껴서 놀자. 나 있으면 좋아할걸? 장우도 있네, 안녕.”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자의 등장에 떨떠름해 하던 장우가 인사했다.
“너 요즘 잘 나가더라.”
“제가 아무리 바빠도 선배님만 하겠어요.”
생긋 웃는 여자는 국내를 섭렵하고 해외에서까지 인지도가 높은 배우였다. 얼마 전 드라마 촬영이 끝나 휴식기에 접어들면서 우연치 않게 민준과 함께 있던 남자와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소개 좀 시켜달라고 하도 귀찮게 구는 걸 민준이 넌지시 말했을 뿐이다.
장유란이라고, 배우인데 한 번 만나볼래? 그때 남자는 시큰둥하게 눈매 끝을 좁혔다. 민준은 핸드폰에서 유란을 찾아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가늘어지던 눈매가 그걸 보고선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그 첫 만남이 어제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어, 왔다.”
유란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급스러운 원목 소재의 문을 구두 끝으로 밀며 나온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액정에서 반사된 빛이 남자의 얼굴을 서늘하게 덮었다. 눈썹을 삐딱하게 구긴 남자가 제 자리까지 물 흐르듯이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민준이 왔어.”
“어. 마셔.”
건성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흔들던 손을 내린 유란의 입술이 얄궂게 움직였다.
“나도 왔는데?”
“너도 마시든가.”
남자는 누가 이 방에 왔는지 청각으로 흡수할 뿐, 시각을 쓰지 않았다. 딱 그 정도 인간관계였다. 제가 부르면 이유 불문하고 달려오는 사람들인데 그의 포지션은 늘 방관자였다. 먹고 놀 판을 만들어주고 주변 분위기를 알아서 맡긴다. 광대 같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남자 앞에서 나이와 배경은 무의미했다. 지금 모여 있는 유명한 인물들의 교집합 역시 남자였으니.
“정지한,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 말에 무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의 다리가 교차됐다. 한쪽 무릎 위에 발목을 걸치고서 발끝만 까딱거렸다. 민준은 껄끄럽게 웃으며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았다.
정지한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일은 몹시 드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남자가 대상을 집요하게 바라볼 땐 제 손에 넣고 끝장을 낼 거란 무서운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열받았다는 소리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깨달은 민준은 웃던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성우 형한테 대충 들었어. 뭐, 여자 찾고 있다며. 도와줄 테니까 자세히 말해 봐.”
그 말에 유란의 눈매가 뾰족하게 변했다.
“여자? 누구?”
유란은 전혀 몰랐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저와 어제 키스까지 했는데 다른 여자 얘기가 나오니 눈에 불이 들어오는 게 당연했다.
“누군데? 연예인이야?”
“모르니까 이러고 있지.”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가 살벌했다. 유란은 눈을 크게 뜨며 지한을 보았다.
“너처럼 얼굴 팔린 애였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회색빛 눈동자가 액정에 반사된 빛을 머금어 날을 세웠다.
목소리만으로 움츠러든 유란은 더는 추궁하지 못 했다. 바삐 눈동자만 굴려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옆에 앉은 민준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서 지한의 심기 불편한 상태를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러라고 부른 걸 테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 민준이 다시 물었다.
“어디서 만났는데?”
“어디서, 청담동 가라오케.”
지한은 그 말을 하며 셔츠 윗단추를 아무렇게나 풀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핏대가 선연했다. 빈 양주병의 개수를 세보던 민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쾌지수가 최고조를 찍었을 거다. 대충 예상했다지만 술까지 들어간 정지한을 달래는 건 조금 벅찼다. 그때 유란이 아, 소리를 내며 물었다.
“혹시 그 여자야?”
어제 지한과 키스하던 중에 들이닥친 여자를 떠올린 유란은 놀라며 말했다.
“난 네가 그런 소문까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할지 몰랐어.”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지한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모두의 시선이 유란에게 집중됐다.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게 된 유란은 조금 안심한 듯한 태도로 웃었다.
“어제 거기서 지한이랑 키스하는 도중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거든. 내 얼굴 봐서, 그래서 찾는 거였구나. 입막음 하려는…….”
“그 여자 너 안 봤어.”
액정 위로 느슨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나 보고 있었지.”
자극에 한껏 버무려져 탁해진 눈동자가 부딪쳐왔다. 그의 눈에 비친 유란은 흡사 헐벗긴 기분이었다. 낱낱이 벗겨졌음에도 지금 저 남자에게 감흥조차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유란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유란의 안면이 굳자 지한이 소파 뒤로 긴 팔을 올리며 웃었다.
“나한테 얼굴로 졌으면 물러나야지.”
유란은 치욕감에 손끝을 구겼다. 핸드백 끈이 뜯기도록 힘을 준 유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녀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환기된 분위기에 다들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속으로 독종이라고 생각할 거였다. 장유란이 아니라, 정지한이.
뚫어지게 노려보는 눈빛에 백기를 들었는지 핸드폰에 뭔가가 도착했나 보다. 지한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현진 기획이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