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화 (5/86)

5.

“아, 유명해. 우리나라 광고 회사 중에서 가장 큰 데거든.”

“광고 CF 알지? 기업에서 홍보할 때 쓰는, 그거 대신 외주 받아서 제작하는 대행사 같은 거지.”

지한이 묻자 다들 코인을 먹은 자판기처럼 정보를 쏟아 냈다. 지한은 불현듯 핸드폰을 탁자 위로 던졌다.

“거기 대리라네.”

“벌써 그걸 알아냈어?”

하기야 마음만 먹으면 그 여자의 뭘 모를까, 수긍하던 사람들은 쉽게 해결된 문제에 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제 얘네 테이블 계산을 해줬거든.”

다들 잠시 멈칫했다. 보통 지한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편이지, 처음 본 여자에게 돈을 썼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대리면 뭐 어느 정도야?”

돈을 두고 가 저를 한낱 소모품 취급했다는 것에 화난 줄 알았건만 그것보다 더 깊은 문제인 듯했다. 모두 처음 겪어보는 지한의 태도에 면역이 없었다. 어수선한 눈동자들이 배회하는 사이, 가장 연장자인 성우가 말했다.

“낮지도 않고, 그렇다고 높지도 않지. 어떤 부서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핵심 부서 대리면 꽤 괜찮은 직급이야. 나이는 대략 서른 초중반 되겠네.”

“어중간하네.”

“뭐가, 나이가?”

“아니, 토요일인 게.”

성우는 아, 작게 소리 냈던 입을 다물었다.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댄 지한의 눈썹이 서늘하게 구겨졌다.

“월요일에 출근할 거 아니야?”

모두가 속으로 나마 그 여자에게 애도를 표했다.

*

회사를 안 나가는 주말이라고 해서 소현의 일과가 업무와 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김 부장과 만나면서 얻은 소스를 정리하던 소현은 모니터가 뿜어대는 빛에 눈이 퍼석해져 인공 눈물을 조금 넣었다.

대부분 경쟁 PT로 광고를 따낸 데 비해, 재상 그룹과 현진 기획은 모종의 계약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니즈를 표출하는 김 부장의 입이 쉬지 않았다는 건 이번 광고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었다. 이리저리 날뛰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고 목표 지점까지 골인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소현의 손가락이 묵직해진다.

“아, 아직도 술이 올라오는 거 같네.”

커피와 함께 비타민을 밀어 넣은 소현은 다시 노트북 위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이런 사회적 구조를 혐오하면서도 머무는 건 그만큼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소현은 자신의 손을 거친 작업이 영상물로 탄생할 때 자식을 세상 밖에 내놓는 기분이었다. 클라이언트와 제작팀 간의 불협화음을 조율해가며 완성시켜 구매로 이어질 때 느끼는 성취감은 소현을 완성하는 요소였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은 거지 같긴 하지만.

지옥 같은 지하철을 뚫고 온 소현은 회사와 가까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했다. 일주일에 한 번 차 없이 출근하는 회사 방침을 따르는 신실한 사원. 오늘도 몸과 영혼을 갈아서 회사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으로 각성제인 커피까지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광택이 어우러진 '현진 기획'이라 적한 현판을 본 소현은 자부심을 가진 채 보폭을 넓게 벌리며 걸어갔다. 때마침 출근하던 팀 동료들과 마주친 소현이 눈웃음 지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강 대리님 안녕하세요. 금요일에 달리셨다더니, 대리님은 어쩜 피부가 이렇게 좋아요? 비결 있어요?”

“비결 있지. 타고난 거 반, 피부과에 돈 쏟는 거 반. 연주 씨도 괜히 관리실 다니지 마시고 피부과 다녀요. 그게 돈값 해요.”

의료기기 못 이긴다니까. 소현이 먼저 회사 로비로 발을 들일 때였다. 등 뒤에서 거친 굉음이 울렸다. 소현은 끌리듯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저거 봐.”

동료의 말에 스포츠카를 본 소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빛의 광선이 잘빠진 보디 위로 매끈하게 쏟아졌다. 고작 차 한 대로 바쁜 출근 시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점이 소현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블랙과 레드의 조합이 환상적인 시론이라니. 존재감을 각인시킨 듯 차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층 더 깊어졌다.

“……광고가 따로 없네.”

소현의 입에서 작게 감탄이 흘렀다. 발목이 보이는 구두에 캐주얼한 정장 바지, 그 위로 촘촘히 짜인 스웨터지만 팔 부분은 교차된 울 사이가 트여 피부가 드러난 과감한 의상이었다. 어디 명품인지 소현은 그 사이에 빠르게 스캔을 마쳤다.

연예인 아니면 소화해낼 수도 없는 의상인데, 남자는 그마저도 제 것처럼 먹어 치웠다. 옷이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골격에 안착할 수 있는 승은을 입은 듯했다. 높은 콧대에 걸쳐 올려둔 선글라스는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화려한 외형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걸어가는 길목마다 시선을 전부 제 것으로 낚아챌 수 없을 거다.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화려한 영상에 끌리는 법이니까.

넓은 어깨에 걸린 스웨터의 라운드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안에 숨겨진 근육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매끈한 살결을 훑으며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단단하지만 나른하게 빠진 몸이 얇고 광활한 넓이의 디스플레이 바디와 겹쳐졌다. 저렇게 걸어온 남자가 TV 리모컨을 들고서 전원을 딱 누르면 제격이겠는데.

“…….”

남자가 잠시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소현의 시뮬레이션도 끝이 났다. 실현 가능성 없는 영상을 뒤로하고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소현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머리가 따가울 정도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소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출처를 찾았다. 제 앞에는 회사로 향하려던 남자 하나뿐이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선글라스 테를 잡았다. 검은색에 감춰진 베일이 내려갔다.

“오자마자 만나네.”

은회색이 감도는 눈동자가 소현을 똑바로 직시해왔다. 소현은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너도 내 생각에 잠 못 들었지?”

정신을 놓았더라면 들고 있던 커피를 쏟았을 거다.

“잊었으면 가만 안 둬.”

회색 눈동자, 그때 그 하룻밤.

그 어린 녀석.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소현의 앞에 걸어와 멈춰 섰다. 남자가 소현의 입술 점을 주시하며 선글라스 다리를 반으로 접었다. 회색빛 눈동자가 햇살에 푹 담근 듯 눅눅했다.

“밝은 데서 보니까 더 꼴려.”

그 부위를 만지듯이 끈적한 목소리가 나왔다. 혀로 몇 번이고 핥고 빨았던 곳이었다. 남자는 지금도 그러고 싶은지 근지러운 눈빛과 야멸찬 발언을 선사했다. 눈부신 햇살에 비추어 본 얼굴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현은 지금 회사 앞이라는 걸 떠올렸다.

“너, 미, 쳤니?”

충격의 여파 탓에 말이 스타카토처럼 끊겨 나왔다. 주변을 살피자 회사 동료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소현의 폐가 확 오므라들었다. 오해 소지가 다분한 말과 상황이었다. 소현은 저를 향한 동료들의 넋 나간 얼굴을 뒤로하고 남자의 손부터 잡았다.

“빨리, 빨리 따라와.”

“어딜?”

어디든, 이대로 지구 바깥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남자는 나태한 걸음을 느릿느릿하게 옮겼다. 소현을 본 이상 급한 건 하나도 없다는 태도였다. 소현은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목이 타며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가 방한복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회사원들이 담배를 태우는 후미진 곳으로 가고 나서야 소현은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꿈이다, 꿈. 현실로 나오길 바랐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망했네.”

소현의 눈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제 개인적인 사생활은 회사 사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다못해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모른다. 그런데 저를 보면서 꼴린다고 말하다니, 미친놈에다가 변태로 취급하기엔 너무 놀라서 남자의 손을 잡고 온 게 화근이었다.

아직도 머리 뒤로 동료들의 놀라운 시선이 달라붙은 것 같아 소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안 그래도 곧 승진을 앞두고 있는데 만약 회사 앞이 아니라, 로비까지 들어와서 제 이름 석자를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이 아찔해져 소현은 손을 뻗었다.

“야, 너.”

남자의 멱살을 잡아채 끌었다. 허리를 낮춘 남자는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눈동자를 굴리다가 잠자코 소현을 응시했다. 소현의 손가락이 치밀하게 짜인 올 사이를 뚫었다.

“발정 났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그딴 소릴 해?”

“좋아할 줄 알았더니.”

“내가 뭘 좋아해?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네가 귀여운 짓을 해서. 십만 원짜리 서비스 받은 소감 좀 들어보려고.”

“뭐?”

회색빛 눈동자가 내려오자 소현은 손끝이 차게 식었다.

“침대 옆에 둔 그 돈.”

남자는 웃음을 삼키며 조소했다.

“말해 봐. 나를 산 거야?”

가볍게 보이지만 정말 궁금해 잠 못 이룬 사람처럼 남자의 눈 밑이 어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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