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상치도 못한 무게감이 소현의 머리를 짓눌러왔다. 이빨만 내보이지 않을 뿐, 맹렬한 짐승처럼 눈빛이 소현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돈으로 살 수 있을 리가. 그의 입에서 나온 십만 원의 출처를 찾던 소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혹시, 세탁비로…….”
떨어져 나간 단추와 메모, 그리고 두 장 올려두고 간 오만 원 권이 소현의 머리를 스쳤다. 탄알이 발사된 것처럼 소현이 잡고 있던 스웨터를 놓아주며 빠르게 말했다.
“그 위에 단추도 있었을 텐데, 못 봤어? 떨어졌기에 올려두고 수선도 하라고 두고 간 거야.”
남자는 손에 잡히느라 불룩 튀어나온 스웨터를 무미건조하게 보며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데 왜 계속 듣고 싶지.”
“말 되는 소리니까. 그것 말곤 내가 돈을 두고 갈 이유가 어디 있겠어. 화대 같은 거 아니었으니까 오해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
소현은 동조를 구하는 것처럼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알았어? 우리 서로 좋아서 한 거라고. 새벽까지 진탕 뒹굴었으니까, 몸은 거짓말하지 않지?”
그러자 투명한 공기처럼 차가운 회색빛 위로 열기가 뒤섞였다. 뭔가 더 원하는 듯 주시하는 눈동자가 소현의 시야를 조여 왔다.
더 달래줘야 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꼬리를 흔들면서 아양 떠는 건 체질이 아니었다. 소현은 침묵했다. 먼저 말을 건네 온다.
“지금 시간 돼?”
“……그건 왜?”
남자가 입술을 벌리자 소현의 얼굴로 끈적한 감도가 느껴졌다.
“너랑 자게.”
목적성이 또렷한 발언에 소현의 얼굴이 굳었다. 돈 때문에 찾아온 듯 보였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우는 눈빛이 피부를 맞대던 그날처럼 지독하리만치 익숙했다. 콧대를 맞대며 회색빛 눈동자가 소현에게 가까이 침투했었다. 젖은 눈을 맞추며 집요하게 하체를 몰아붙였다. 질척한 마찰음이 아래 위로 들려왔다. 마치 아래로는 먹어 치우고 눈으로 키스하며 혀를 비비듯이.
“주말 내내 하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다고.”
내려앉은 눈동자는 그날 밤을 되새기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목적은 분명하고 명확했다.
“너는 어때.”
본심은 이거였다. 소현은 균열하는 입술을 휘어 올리며 말했다.
“미안한데, 어쩌지. 나 이제 두 번 다신 너랑 안 잘 생각인데.”
“왜?”
순진한 물음에 소현은 동요하는 몸과 달리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원래 한 번 잔 남자랑 두 번은 안 하는 게 내 신조거든.”
거짓말까지 동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적은 처음이라는 말을 믿을 거 같지도 않으니까.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청순하네.”
“두 번 자서 좋은 꼴 나는 걸 본 적 없어서 그래.”
“나랑은 안 그럴걸.”
“아니. 그럴 거 같아서 안 할 거야.”
소현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진해진다. 끈기 있게 피부로 들러붙는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여자 같아.”
독물처럼 낮은 목소리가 소현의 가슴을 녹진하게 적셨다. 어젯밤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라 소현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몸이 녹아내릴 만큼 달콤했지만 그와 동시에 위험했다. 저를 찾아온 저돌성이 소현에게 경고를 일깨워 준 거나 다름없다. 가까이하기엔 제어도 안 되고, 피곤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넌 육체가 머리까지 지배한 거 같은데, 나도 맞게 봤지?”
남자가 웃음을 가볍게 흘렸다.
“맞아.”
장막을 맞대고 비비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시선이 흘러내렸다.
“머리와 몸으로 널 안았지.”
소현의 심장이 뭉개지듯 오므라들었다. 그날로 돌아간 듯 그늘진 눈동자가 사고를 휘어잡는다. 숨이 막힌 것처럼 소현은 입을 벌렸다.
“내가 그날은 조금 취해서 참을성이 부족했어. 마침 너도 나한테 마음 있는 것 같았고, 우리 즐거웠던 거 맞아. 그런데 그거 일회성이야. 단발성. 충동적으로 한 일을 어떻게 일상까지 끌고 오니.”
남자의 영역에서 발을 빼듯이 소현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사석과 일은 구분해야지. 네가 아직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모르나 본데, 이런 거 구분 짓고 사는 사람들 꽤 많아. 나한테는 그날 밤이 가벼운 행위였어. 너와 더 이상은 소모하고 싶지 않아.”
“알아들었어.”
서늘한 음성이 느리게 뱉어졌다.
“별로면 안 해야지.”
알아들었다니 이제 된 건가. 할 말도 이제 다 했고, 여기서 더 늦장을 부리다간 출근 시간도 위험했다. 소현이 돌아서려고 하자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든 남자가 입가에 긴 대를 물었다.
“근데 너 내가 몇 살인지나 알아?”
그 말에 소현은 뇌가 굳었다. 지포 라이터를 찾아 꺼내는 동안에도 시선은 소현에게 고정돼 있었다. 소현의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유난히도 직사광선을 받은 남자의 피부가 결점 없이 반질반질했다. 높은 콧대가 음영을 나눠가진 채 유리알처럼 쏟아진다. 앳된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다.
“……몇, 살인데?”
작게 묻자 남자가 불길을 당겼다. 차각, 서늘한 쇳소리가 남자의 손목 스냅에 의해 닫혔다.
“내가 몇 살이어야지.”
남자가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며 뱉었다.
“네 일상이 더 피곤해질까.”
마치 제 인생처럼 흡력에 고꾸라진 잿더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남자가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며 뱉었다. 높은 빌딩들이 빼곡히 선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나직이 물었다.
“점심 먹는 시간 언제야.”
“…….”
소현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미성년자인가? 아니. 미성년자가 어떻게 차를 타고 다녀. 담배를 어떻게 태워. 어떻게 거기서 술을 마셔. 소현이 혼이 나간 사이 트렌치코트 주머니로 손이 들어왔다. 남자는 소현의 핸드폰을 가져가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시 주머니로 무게감이 실리자 소현의 고개가 위로 움직였다.
“근처에 있을 테니까 연락해.”
그 모든 의문은 남자의 얼굴을 보니 해소되었다.
“아니면 지금 같이 움직이던가.”
남자는 눈매를 비스듬히 틀었다.
“회사 정도야 하루 빠져도 되잖아.”
저 녀석은 정상이 아니었다. 소현은 넋이 나간 머릿속을 다시 굴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귀소본능처럼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우선은 걸었다.
*
소현은 한 번도 쾌락을 좇는 저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한 적 없었다. 욕구 앞에서 솔직한 것은 손가락질받을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저보다 더 쾌락에 몰두하는 녀석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은 거다.
제가 했던 건 질 나쁜 짓이었다. 미쳐서, 그렇게 어린놈이랑, 나이조차 모른 채, 침대에 하룻밤 뒹군 것이 이런 식으로 제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강 대리님.”
무슨 정신으로 회사에 온 걸까. 소현은 저를 불러세운 직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까 회사 앞에 찾아온 남자 누구예요?”
소현의 눈꺼풀이 잘게 경련했다. 자세히 보니 아침에 저와 인사를 나누었던 팀원이었다. 소현은 애써 웃었다.
“아는, 동생이야.”
“아……그래요?”
벌어진 미연의 입에서 ‘근데 고등학생 아닌가요?’라는 말이 나오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소현의 심장이 역동적으로 뛰었다. 미연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너무 잘생겼던데, 저는 무슨 배우 지망생인 줄 알았잖아요.”
“……그래?”
“네, 외국인이에요? 눈이 특이해서 주의 깊게 봤었는데, 궁금해서요.”
팀원은 화사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뭔가 더 알고 싶어 하는 듯 소현을 추궁했다. 순간 그 녀석의 입에서 나온 꼴린다는 단어가 떠올랐다. 분명히 그걸 들었을 거였다.
“혹시 같이 사세요?”
소현은 경직된 근육을 잡아 올리며 웃었다.
“어, 맞아. 외국에 사는 녀석인데, 잠깐 서울에 와서 갈 곳 없다고 우리 집에 왔거든. 워낙 방탕하게 놀아서 거의 집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지. 부모님도 두 손 두 발 다 든 애야, 걔가. 안 해본 짓도 없을걸?”
“네?”
“미연 씨 근데 걔한테 관심 있어?”
소현은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때아닌 홍조가 미연의 뺨을 연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한사코 그런 게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아니요, 제가 무슨…….”
“맞아. 관심 꺼. 걘 내가 봐도 사람 인생 망칠 녀석이거든.”
이를 갈며 소현은 구두 굽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이 심각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손으로는 일을 처리하면서도 머리로는 그 문제를 완벽히 내려놓지 못했다. 점심시간을 틈타 회사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연신 태웠다.
핸드폰을 꺼내자 통화 목록에 정지한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정지한이라, 정지한. 제멋대로 저장하고 번호까지 강탈해갔다. 소현은 눈을 감으며 삐뚜름하게 입가에 걸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하아……감히 누구 인생을 건드려.”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안에 담긴 진심은 살벌했다. 제 실수니 책임지고 수습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이 묘하게 코털을 건드린다. 그간 말도 안 되는 요구로 제 목을 졸라댔던 광고주과 팀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소현에게 남자는 불을 지핀 거였다.
별수 있나, 부딪쳐서 해결할 수밖에. 평소대로 하는 것이 해결법이다. 남자에게 끌려다니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소현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손목을 세워 1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하고선 등을 돌렸다.
[어디야.]
글자마저 주인을 닮았다. 소현은 글자를 질겅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