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통보에 가까운 답장을 하고서 소현은 회의실에 들어갔다. 긴 테이블엔 커피와 담배에 푹 담가진 제작팀이 모여 있었다. 퀭한 눈들을 보며 소현은 제 자리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다들 피곤해 보이네요.”
“피곤하다 못해 죽기 직전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한성준이 소현을 쳐다보았다. 제작팀 디자이너인 그는 유독 소현과 잡음이 많았다. 소현은 웃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그런데 어쩌죠? 내일까지 콘셉트 시안 정리해서 회의 들어가야 하는 나도 죽을 맛인데.”
달그락, 차가운 금속이 테이블로 놓였다.
“우리 다 같이 살아 봅시다.”
이번 주 내로 콘셉트 기반으로 광고 시안을 뽑아내 재상 그룹에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소현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밀어 올렸다.
광고 콘셉트는 차별화된 고급스러움. 비싼 고가의 제품이지만 구매욕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하나의 작품으로 남는 게 광고주의 의견이었다.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하는 건 8K의 고화질.
“유럽풍의 미술관에 여러 명화 작품이 있고 내부에 불이 꺼지면서 액자 틀에 갇힌 TV가 홀로 어둠 속에서 빛나면서 실제를 만나다, 이게 현재로선 가장 잘 나온 광고 시안 같아요.”
“그렇긴 한데, A 안으로 밀자니 한 달 전에 출시된 일산 전자 TV 광고와 비슷해서 좀 그렇단 말이지. 자연을 보여주면서 여행하는 것처럼 해놓고서 실은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거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방 안에 디스플레이 수십 대 연결해서 우주 영상으로 깔아놓고 현실과 이상 오고 가는 그 시안도 버려야 해요.”
“색다른 시안 하나가 더 필요한 거 같긴 한데, 어차피 TV 광고는 다 거기서 거기고. 우리가 영상미만 더 때깔 나게 뽑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쯤 되면 누군가가 나서서 의견을 종합하거나, 한 가지 의견을 밀어붙여야 한다. 펜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던 성준이 사납게 시선을 들었다.
“이봐, 강 대리. 왜 말이 없어? 의견 안 내고 보고만 있을 거야?”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다리를 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소현이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 하려고요. 다들 해 먹은 거 말고, 색다른 거로 갑시다.”
몸을 돌리자 삐거덕거리며 의자가 회전했다.
“클라이언트는 술자리에서 계속 요즘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네?”
“여자가 25살 이후엔 꺾인다느니, 결혼은 빨리해야 한다느니 입에 고지식한 발언을 달고 다니시지만 계속 언급한다는 건 위기의식과 더불어 여자들의 사회적 위치를 깨달은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가사에 필요한 청소기나 세탁기,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들 외에도 전자제품 구매층의 대다수가 여성 소비자입니다. 여자의 사회적 위치가 상승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변화죠.”
“그래도 큰돈은 남자가 쓰지 않습니까?”
“여자도 이제 큰돈 번다니까요? 그리고 제 공간을 꾸밀 줄 알죠. 왜냐하면 일하고 돌아오면 편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맥주 한잔하면서 쉬고 싶으니까. 주말엔 늘어지게 TV를 보고 싶기도 하고.”
“음…….”
“그리고 이제까지 TV 팔면서 여자만 단독 메인으로 세운 CF 없었잖아요. 여심을 건드리다 못해 안 사고는 못 배길 포인트를 잡아서 내밀자고요.”
팔짱을 낀 채 창문에 붙어진 포스트잇을 훑어보던 소현이 그중 하나를 떼어 냈다.
“스타일의 대미를 장식하다. 난 이게 좋겠는데?”
생각날 때마다 써서 덕지덕지 붙여두었던 카피라이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깐, ‘스타일’이라는 게 TV와 바로 연관돼 구매자들 머리에 꽂힐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겁니다. 여자들은 나갈 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하죠. 그게 모임에 나가 동창들을 이겨 먹으려거든, 남자를 구워삶아 먹으려거든. 집에선 편하게 늘어지고 싶다고 했었죠? 하지만 그런다고 내 위신까지 늘어지면 곤란하지. 이 TV가, 나를 집안에서도 완벽하게 만들어줄 대상이 되는 거죠.”
제작팀이 펜 끝으로 머리를 석석 긁었다. 소현은 그를 놓치지 않고 광고 제품인 TV 앞에 섰다.
“3,300만 개의 화소를 가진 초고해상도 디스플레이, 뭘 보든 선명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데다가 크기는 압도적이고. 집에서도 세상과 소통하고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TV예요. 그리고 능력 빵빵한 TV가 내 집에 있어요. 바로 이 점이 포인트예요.”
모두의 표정이 뚱하자 소현은 화면을 주먹으로 쾅, 쳤다. 그 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화면으로 집중됐다.
“여기서 질문. 여자들이 왜 발톱에 십만 원짜리 페디큐어를 하는 줄 알아요? 남들이 안 봐주는데, 왜 몇 십만 원짜리 속옷을 입는 줄 알아요? 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혼자만 몰래 보는 걸 즐기려고?”
소현은 온갖 생각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입술을 비틀며 경고했다.
“아니지, 여자들은 그냥 간지나는 거에 죽고 못 사니까 하는 거야.”
직설적인 화법에 모두가 반응하듯 표정이 변했다. 소현은 똑바로 들으라는 듯 허리를 폈다.
“TV가 내 스타일을 완성시킨다. 대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난 이거 하나면 즐거운 라이프를 즐길 수 있고, 간지도 납니다.”
TV에 손을 올린 소현이 팀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입술을 미끈하게 밀어 올렸다.
“난 이거 출시되면 당장 살 거예요. 비싸긴 하지만 쌔끈하잖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지는 이런 걸 사고, 보는 내내 매 순간 느낄 거예요. 무리해서 사더라도 개같이 더 벌어서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을 거고.”
빠르게 말을 토해 낸 소현이 제 골반을 짚으며 팀장을 보았다.
“팀장님 의견은?”
제작 총괄인 한 팀장이 침묵을 이어나가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대략 시안이 감은 잡히는데, 거기서 살 좀 더 붙여 봅시다.”
“아니, 잠깐만요. 고급화 전략인데, 거기다 TV는 화질로 승부해야죠. 고가 제품 아닙니까.”
그게 더 훨씬 구매욕을 불러일으킨다고 의견을 주장했다. 카피라이터 역시 스타일이 아니라 고화질로 더욱 선명해진 세상을 만나는, 노인과 바다 같은 소리를 해댔다. 진부함에 소현은 혀를 찼다.
“더는 가전제품이 필요에 의해 구매하는 게 아니란 소리는 조사한 통계 수치에서도 나오잖아요? 이젠 내 집과 내 생활을 빛내 줄 아이템으로도 작용하고 있어요.”
“모르나 본데 TV는 남자가 더 많이 본다고. 안 그래도 가격대도 높은데, 구매 고객층을 여성으로 한정 짓기엔 무모하지 않나? 강 대리. 어디 한 번 대답해 봐.”
“현실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소현이 성준을 쳐다보자 그가 흠칫했다.
“이미 고가의 제품에 여자들이 지갑을 연다는 건 통계로 나와 있어요, 우리가 지금 감정 가지고서 장사하는 광고 회사입니까?”
회의실 안으로 찬물을 끼얹듯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의실 안으로 정적이 휩싸였다. 믿을 건 오직 숫자뿐이다. 실패할 수 없으니까. 소현은 움찔하는 팀원의 눈동자를 떠나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래요. 살을 좀 덧붙여 볼게요.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이는 성에 여자가 우아한 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올라가요, 드레스는 다이아를 박은 것처럼 빛이 나고 그 화질은 이 기특한 8K TV가 눈이 멀 정도로 잡아 줄 거야. 그리고 여자가 뒤돌면서 눈동자로 줌인이 되는 거지. 소파에 앉은 여자는 다리를 꼰 채 그 화면을 봐요. 그 화면 속 여자와 똑같은 사람이 말입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걸어와 제 모습이 나오는 TV를 손끝으로 어루만져요. 그러면서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지나가는 거지, TV 화면을 다시 딥 포커스 해서 잡고. 우린 문구 한 줄 거기에 꽂아 박아 주면 됩니다.”
소현은 숨을 집어삼켰다.
“스타일의 대미를 장식하다.”
외출하기 직전, 자신을 완성시킨 것처럼. 소현은 한숨을 내몰아쉬며 팀장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좋아, 기존하고 다르긴 하니까 해보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대 의견을 떠들어대던 성준의 입이 얼어붙었다. 소현은 그를 보며 물었다.
“할 수 있어요?”
그 물음에 조여지듯 목을 굳혔던 성준이 말했다.
“일단, 해보지. 뭐.”
“좋습니다.”
소현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며 제 자리로 걸어갔다.
“좋아요…….”
힘이 풀린 목소리로 소현이 제 자리에 올려 두었던 시계를 손목에 찼다. 찰칵, 금속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내리깔았던 소현의 시선이 올라갔다.
“일 이렇게 끝나니까 얼마나 좋아요. 4시에 다시 봅시다.”
소현은 서류를 들고서 회의실을 나섰다.
회사 내에서 소현이 암암리에 폭군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안 되면 멱살이라도 잡고서 원하는 목적지에 끌고 가니까. 그 무자비한 방식에 혀를 차다가도 언제나 결과물이 좋아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소현은 시원한 물을 마시며 시계를 주시했다. 이제 다음 멱살을 잡아끌고 갈 차례였다.
소현은 8시 정각에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감행했다.
“여보세요.”
「지금이 몇 시야?」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소현의 고막을 옥죄였다. 마치 추궁을 하듯이 나긋나긋하게 숨통을 조여 든다. 소현은 뻔뻔하게 말했다.
“일이 지금 끝났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계속 생각했었다.
“지금 어디니?”
「근처 카페에 있어.」
“여기 주변 카페만 해도 수십 개야. 상호를 말해.”
「상호…….」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처럼 남자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르겠으니까 네가 찾아와.」
통화는 그대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