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소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들이켰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질 않는다. 지금 시위하는 건가? 소현은 이마에 주름이 새겨지도록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늦었다고 보복하는 거야, 뭐야.”
이대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건 소현이었다. 보통이 아닌 녀석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소현은 근처 카페를 쥐 잡듯이 헤집었다. 다섯 번째 허탕을 치고서 소현은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시간을 허비하는 행위에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오른 상태였다. 이곳에도 없으면 정말…….
그 순간 소현의 발이 멈추었다. 안쪽에 앉은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길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 바깥으로 삐져나온 긴 다리와 도드라진 발목이 탐스러웠다. 늘어져 있단 표현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소현은 다가가며 통행을 방해하는 남자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밀었다. 감고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소현이 앙심을 담아 한 마디 했다.
“개고생 시켜 줘서 고마워.”
반대편 의자에 앉으려던 소현이 멈칫했다. 테이블 위로 커피가 담겼던 거로 추정되는 머그컵이 8잔이나 놓여 있었다. 소현이 놀라 시선을 옮기자 남자의 망막이 열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잠에서 이제 막 깬 것처럼 남자가 목을 기댄 채로 속삭였다.
“널 봐서 그런가?”
소현은 목이 바싹 타는 것만 같았다. 카페인은 뇌를 깨우기도 하지만 과하게 섭취했을 경우 빈사 상태로 만든다. 특히나 잠 못 잔 사람에게는. 결과적으로 남자의 눈은 흐릿했다.
정말 여기 앉아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린 건가? 이 많은 양을 마신 무모한 행동에 넋이 나간 것도 잠시, 소현은 남자의 앞에 놓인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반 정도 남아 있는 커피를 쉼 없이 마시자 이제야 뇌가 조금 깨는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자 남자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긴 말 필요 없고 일단 네 부모님 좀 만나자.”
지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너무 빠른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현은 겸허하게 테이블 위로 두 손을 깍지 꼈다.
“네가 미성년자라면 그것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이럴 게 아니라 어른들과 대화하는 게 더 낫겠어.”
“나랑 해.”
“너 미성년자 아니지?”
소현은 차갑게 물었다. 지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법 좋아하나 봐.”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도 빌려 입고 있을 걸 그랬나.”
소현은 그 말에 열이 끓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따른 해결책을 생각하는 버릇 탓에 남자를 미성년자로 예상했던 거였다. 무면허 운전, 미성년자 음주 및 흡연, 주류 업소 출입. 이 모든 불법적인 행위가 정지한이라는 남자에겐 장벽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망상이 아찔할 만큼 저돌적이지만, 덕분에 네가 나왔으니 보람은 있네.”
그 말에 소현은 부드럽게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최악이 빗나갔으니 우선은 다행이었다. 하룻밤의 일탈로 범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소현은 불량한 태도를 가진 남자를 회유하려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그 말에 침전하던 지한의 눈으로 빛이 드리웠다.
“나랑 자는 거 빼고.”
소현이 냉정하게 말하자 다시 숨이 빠지듯 몸이 늘어진다.
“앞으로 내 회사에 찾아오지 않겠다는 조건만 지켜 준다면 들어 줄 의향 있어. 어디 한 번 말해 봐.”
눈빛만 살아 있지, 다른 것들은 전부 죽어 있는 듯했다. 소파 등받이에 목덜미를 기댄 채 편히 숨만 내쉰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소현은 표정을 구겼다.
“내 말 듣고 있니?”
“…….”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협상가라 자부했는데, 이 남자 앞에선 제 능력치도 무용지물 같았다. 협상 자체를 바라지 않는 거센 눈빛과 늘어진 태도.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조명에 반사된 회색빛 눈동자가 여러 면에서 다채로운 빛을 냈다. 제아무리 빤히 보고 있어도 소현은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소현의 인내심이 바닥나려고 하자 입술 점막이 벌어지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날은. 너도 좋았다고 했잖아.”
소현은 긴 침묵 끝에 나온 지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몸은 거짓말 안 한다며.”
“그랬지.”
“그럼 된 거 아닌가.”
소현은 아직 지한이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지 못 했다.
“그날 내 아래에서 좋아 죽었으면서 왜 나랑 안 자?”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도 아니고 듣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현의 입가에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번졌다.
“내 신조라고 말했잖아.”
“한번 깨.”
“너 남의 인생 마구잡이로 흔드는 거 아니다.”
“흔들리긴 하겠지.”
지한은 머리가 아픈지 검지로 관자놀이를 밀어 올렸다.
“내가 그 정도는 되잖아.”
소현은 눈가를 구기며 지한을 보았다. 소파에 늘어진 남자는 물먹은 이불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야한 느낌을 더 선사했다. 제가 잡으면서 늘어진 스웨터가 쇄골과 어깨를 드러냈고 탄탄한 근육이 숨 쉴 때마다 요동치며 잠재력을 내비쳤다. 천천히 훑으면서 내려가던 소현의 시선이 진해진다.
저 몸이 침대에선 역동적인 움직임을 띤다는 걸 소현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안으로 들어와 샅샅이 헤집는 힘과 율동은 정신까지 무너뜨렸고, 꽉 찬 밀도감으로 끈질기게 안을 자극해 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릴 만큼. 지한이 느리게 밀어 올리던 검지 끝을 까딱였다.
“까다롭긴.”
소현은 서서히 차오르던 열감을 숨으로 뱉었다. 그날이 상상돼 대답하지 않았던 건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점차 눈빛이 깊어진다. 저를 향한 회색빛 눈동자 위로 빛이 질척하게 고인다.
소현은 이유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 저 눈으로 날 보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나랑 세 번만 만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소현의 인상이 구겨졌다.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너랑 잔 게 안 잊힐 만큼 좋았어.”
“뭐?”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내뱉는 발언이 소현은 당혹스러웠다. 감상을 앞세워 지한은 제안을 능숙하게 밀어 넣었다. 무성의한 태도로 상대방을 긴장 시키고, 솔직함으로 몰아붙인다.
깔끔하게 끊어 내려고 온 건데, 오히려 그 화법에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소현은 핵심을 꿰뚫는 것처럼 물었다.
“너 지금 하고 싶은 게 세 번 만나는 거야, 아니면 세 번 자고 싶은 거야?”
지한이 느리게 혀를 움직였다.
“당연히 뒤에 거.”
끝까지 저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소현은 이마를 짚고 싶은 걸 참아 내며 팔짱을 꼈다. 머리로 어쩐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건 화가 나는 것과는 다른 형식의 발현이었다. 아까부터 몸을 데워 놓았던 열감이 지한을 보는 소현의 눈동자에 고였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여자라고 말했었지.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 괴리감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두 번 다신 손도 안 댈 거라고 다짐했는데 몸은 그를 배반했다. 자극적인 맛을 본 미각이 계속 그 맛을 원하고 또 갈구하듯이. 지한을 보는 지금 이 순간도 그날이 생각나고 있으니 말은 다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로 생각했던 것 역시 맞아떨어졌다. 남자를 만나면 피곤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았고, 그건 어김없이 적중했다.
지한이 정말 카페에서 지금까지 기다릴 줄은 몰랐으니까. 계속 언제 나오냐며 재촉할 줄 알았는데 문자 한 번이 전부였다. 그래서 소현은 더 피곤해졌다. 눈으로 밑 색만 남겨 두고 텅 빈 머그컵을 훑어보았다. 의외의 부분에서 죄책감을 만들어 내는 남자였다.
“그 이후부턴 나도 안 질척거릴 테니까.”
소현은 그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지한을 보았다.
“어때. 너도 손해 보는 거 아닐 텐데.”
그래, 인정한다. 이 남자와의 하룻밤은 다시 생각날 정도로 강렬한 영양제였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는 먼저 사정하고 나가떨어지거나 수줍은 척을 강요했었다. 늘 언제나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가 남곤 했지만 그날은 미련이 남을 만큼 좋았다. 불만스러운지 지한의 눈썹이 조용히 구겨졌다.
“생각이 지겨울 만큼 기네.”
제가 이만큼 숙였는데 미동도 안 하냐는 식이다. 소현은 짤막하게 답했다.
“신중한 거야.”
색다른 맛에 눈을 뜬 것을 숨기며 소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동안 연애는 진절머리 나도록 해왔었다. 하지만 감정으로 충분했던 20대와 달리 30대는 사정이 달랐다. 결혼 생각이 없는 소현은 그런 관계가 견디기 힘들었다. 감정을 공유하길 원했지만 상대는 그것보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았다. 지한은 복잡한 생각이 지겨운 것처럼 말했다.
“자고 싶으면 자고, 하고 싶으면 하고. 심플하잖아.”
“그 심플한 생각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잖아?”
“나 여기 오래 안 있을 거야.”
소현은 그 말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1년에 한 번 오는데 시간이 지겹게 안 가.”
“……그래서?”
“너랑 있으면 즐거울 거 같아.”
사납게 소현을 긁는 것처럼 시선이 올라섰다.
“특히 사람 애간장 태우는 게 일품이야.”
그러고 보니 지한은 소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고작 회사와 연락처 정도. 어쩌면 나이까지. 그래 봤자 현대 사회에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신상 정보다. 그가 집중하는 건 부가적인 정보가 아닌 소현의 몸이었다.
“가기 전까지 너랑 재미 좀 보려고.”
재미. 그 매혹적인 단어가 소현의 머릿속에서 팽팽히 접전하던 한쪽 줄을 끌어당긴다. 지한은 제 핸드폰을 꺼내더니 보라는 듯 핸드폰을 테이블로 밀었다. 정확히 14일 뒤에 출국하는 미국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기간은 정해져 있다.
“어차피 내가 가면 끝날 관계 아닌가.”
확실한 증거를 보자 소현의 가슴을 간질이던 끌림이 고조된다. 14일 뒤면 소현은 남자가 회사에 또 찾아올까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고, 남자도 올 수가 없었다.
“확실해?”
“확실하지.”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되는 거 맞겠지.”
“정리하다 못해 네 기억에서 잊히게 사라져 주지.”
3번. 그 숫자만 채우면 된다. 소현이 시선을 옮기며 한 번 건드려 보았다.
“2주 동안 애인 못 만들잖아. 별론데?”
지한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섰다.
“원하면 하나 만들어. 난 상관없어.”
불법 좋아하잖아. 말을 느긋하게 흘리는 지한은 정조 관념조차 없었다. 저 머릿속엔 소현에게 다른 마음을 품거나 조잡한 감정이 자리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건 오직 단발적인 관계가 전부였다. 저를 재미로 소비하는 그 단순 명료함이 소현과 일치했다. 즐길 땐 즐기고, 끝낼 땐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소현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데였으면서 버릇 못 고치고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소현은 천천히 다리를 꼬며 지한을 보았다.
“좋아. 세 번.”
불장난에 손을 대는 것처럼 말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