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9)화 (9/86)

9.

지한은 눈을 치켜떴다.

“조건 하나라도 안 지키면 횟수고 뭐고 그날로 끝인 거야. 이 부분 동의해야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그 말에 지한은 아량 넓은 자세로 고쳐 앉았다. 이제야 경청하겠다는 듯이 깍지 낀 손이 소현은 우스웠다.

“첫 번째, 아까도 말했지만 또 하는 거니까 잘 새겨 들어. 두 번 다신 내 회사 앞엔 얼씬도 하지 마.”

지한은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소현은 평일임에도 하루를 통째로 날려 먹는 여유가 의문스러웠다.

“보시다시피 난 직장인이고, 넌?”

“없어.”

“좋아. 그럼 백수.”

지한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백수와 놀기엔 난 바쁜 직장인이니까 시간은 네가 아닌 나에게 맞춰. 내가 퇴근한 뒤에 세 번이야.”

“몇 시쯤.”

“6시긴 한데, 그때 퇴근할 수 있는 날은 드물어. 야근이 잦은 직업이거든. 야근할 땐 11시나, 새벽 2시까지 있을 때도 있고…….”

“안 돼.”

얌전하던 짐승이 활동을 개시하는 것처럼 지한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땐 넌 나랑 있어야지.”

소현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6시 퇴근은 회사 내에서 반역자로 분류된다. 좋게 쳐줘야 배신자였다. 세 번뿐이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걸까. 어차피 서로 즐기기 위한 만남이니 적정선은 필요했다.

“그래. 세 번만.”

가족이든, 친척이든 누군가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소현은 머리가 무거워졌다. 아니면 만나고 난 뒤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다시 돌아와서 소현은 마저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날처럼 여러 번 하는 건 안 돼.”

“그건 차차 생각하고. 또.”

차차는 무슨, 소현은 다시 말했다.

“내 컨디션 생각해서 한다고. 다음 날 회사 일까지 영향을 미치면 곤란하니까. 아니면 주말에만 보든가.”

“알아서 하지. 계속해.”

지한은 소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했다. 소현은 저 뻔뻔함에 백기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기.”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소현은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어막을 쳤다.

“이름은 알지? 어쩌면 넌 내 나이까지 알지도 모르고.”

“나이는 몰라.”

“잘 됐네. 이름 외엔 사생활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궁금해 하지도 말자고. 어차피 만남이 목적이지, 괜히 서로에 대해서 아는 거 찝찝하고 싫어.”

서로 잇속만 챙기잔 소리였다.

“사생활에 참견하거나 포함되면 그날로 깔끔하게 끝인 거야.”

그 어떤 감정적인 것은 배제하고.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지한이 꽉 조인 손가락 틈새를 벌렸다.

“다 했나?”

“그래. 넌 뭐 말할 거 없어?”

“내가 연락하면 나와.”

지한은 축 처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태하게 늘어졌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훌쩍 커진 그림자가 소현의 시야를 장악했다. 차 키를 손가락 사이에 건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소현은 이 끌림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늘처럼 나 기다리게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이 남자는 반격할 줄 아는 남자였다.

*

지한은 그대로 나왔다. 얌전히 선에 박혀 저를 기다리던 차에 오르는데 이상하게 몸이 둔탁했다. 눈가를 좁히자 앞 유리창이 투명할 만큼 깨끗하다. 정신은 보이는 대로 멀쩡한데 말이다. 술을 아무리 퍼마셨을 때보다 혀가 무감각했다. 심장은 계속 뛰었다.

그러다 문득 제가 커피를 이렇게 많이 마신 적 있나 스스로 자문하게 되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거지. 지한은 기어를 옮기며 액셀을 짓밟았다.

최대한 멀리 도망치듯 운전하던 지한은 호텔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 집처럼 전세를 내고 사용하는 스위트룸이었다. 한껏 늘어놔도 돌아오면 새것처럼 바뀐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침대 위에 올려 두었던 팁조차도 깨끗하게 사라져 있다. 들어오자마자 스웨터를 잡아 올렸다. 손자국처럼 한 부분만 유독 늘어진 게 보인다. 지한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으려다가 멈칫했다.

“아, 걔가 그랬지.”

쓰레기통과 스웨터를 번갈아 보던 지한은 그걸 들고서 침대로 가 누웠다.

“강소현.”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름을 발음하니 둔탁했던 혀가 살아 튕기듯이 움직인다. 마치 그날의 뜨거웠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혀가 몹시 부드럽고 연했다. 혀로 휘감으면 한껏 오므라들었다가 제 입안 쪽으로 바짝 붙어 목 끝까지 기어가는 음탕한 놀림을 선보였다.

“……강소현.”

지한은 누운 채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배 근육이 딱딱해진다. 버클을 푸르고도 곧바로 목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애도 태울 줄 안다. 한참 동안 겉만 문지르다가 손이 들어왔을 때 소현은 의도적으로 지한과 눈을 맞췄다.

제 사이즈에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거만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지어 줬던 미소는 아래가 감동할 만큼 저릿했었다. 음탕한 놀림을 가진 혀는 예쁜 짓도 잘 했다. 침대와 옷장, 책상, 욕실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기특한 식성이다.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고.

차에서 한 번 해볼까.

그땐 또 어떤 표정을 보일지, 제법 궁금해진다. 달리는 차 안에서 제게 안긴 채로 하는 것도 색다를 거 같다.

그럼 소현은 빼지 않고, 욕망에 충실 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다. 가만 보면 그만큼이나 자기 그릇을 챙기는 여자도 없었다. 보통은 자고 일어나서 식사까지 바라는 게 당연한데 메모지 한 장에 돈까지 곁들어 두고 나갔다. 십만 원이 단추 값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면으로 봐도, 몇 번을 곱씹어도 잠깐 데리고 놀기엔 괜찮은 여자였다. 옆에 없는데도 이토록 생각하게 만드는 여자는 드물었다. 주말에도 그랬었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언가가 미끄러진다.

“아.”

뒤늦게 제 입에 물린 담배가 방치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 지한은 다시 주머니를 뒤적이며 불을 찾았다.

그때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항상 무음으로 두는데 뭔가를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지한은 무시한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한곳을 주시하니 눈앞으로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그곳에서 지한은 입술 옆에 찍힌 점을 떠올렸다. 웃을 땐 올라가고 핥아 주면 축 아래로 늘어진다. 온종일 그 움직임만 가만히 보고 있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표정과 말투, 상황에 따라 위치가 달리지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소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액정을 보았다. 역시나 그녀는 아니었다.

받지 않자 또 끈질기게 울리는 것이 신경에 거슬린다. 지한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선 스피커로 돌렸다.

「너 이 녀석, 몇 번을 전화해야 받는 게야?」

지한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왜.”

「왜냐니.」

“나 바빠.”

「할아버지 속 꺼멓게 태울 작정인 거냐?」

정신은 선명한데, 몸이 축축 늘어졌다.

“정말 바빠.”

그래서 여자를 생각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이뤄지는 거다.

「박 비서한테 들으니 맨 너 닮은 친구 놈들 불러다가 논다더니, 여기 온 이상 네가 뭘 하고 다니는지 할애비 귀에 다 들어온다는 거 알고 있지 않느냐?」

아까 그 자리에서 기회를 사용하지 않고 혼자서 호텔로 돌아와 처박힌 건 잘한 일이었다. 이런 상태로 썼다간 만남만 하나 날렸을 거다.

「행실을 똑바로 하란 소리야, 보는 눈들도 많은데 꼭 그렇게 다녀야겠어.」

……횟수를 너무 적게 말했나. 후회라는 것을 해본 적 없던 지한의 머릿속에 그 의문은 쉽게 지워졌다. 아니다, 세 번이면 그 여자가 먼저 나서서 더 만나자고 바지를 잡고 늘어질 거다. 그보다 먼저 제가 질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박 비서 보낼 테니까 잔말 말고 집으로 들어와. 어째 한국 들어오고 나서 주말에 밥 한 끼 먹은 게 다야?」

“안 가.”

「너, 이, 지한이 이 녀석. 네 이름 누가 지어 준 건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할아버지.”

「왜.」

지한은 손끝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머리 아프니까 목소리 좀 낮춰.”

목을 긁으며 소리가 나왔다. 상상을 방해하는 터라 던진 말인데 수화기 너머 노인은 호들갑이었다.

「왜, 어디가 아파?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인 게야. 아니, 내 이럴 줄 알았다. 바깥에서 지내니 몸이 성할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그냥 끊자. 자야겠다.”

「너 할애비가 호텔 방문 쳐들어가야 정신 차릴 게야?!」

지한은 종료 버튼을 누르고선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이제야 모든 일을 해결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세 번의 만남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지 고민했다.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고 느꼈는데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니 그것도 빠르게만 느껴졌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산란했다. 벌써 저녁 9시였다.

*

재미없을 줄 알라더니, 재미를 느낄 기미라도 보이든가.

그날 이후, 지한은 회사 앞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아예 모습을 감춘 것처럼 무척 조용했다. 카페에서 곧바로 기회를 한 번 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또 빗나갔다. 그냥 얌전히 돌아서다니 의외였다.

「여자를 겨냥한다고?」

……연락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나 아니어도 걔 주변에 여자 많을 텐데. 소현은 생각을 지운 채 김 부장과 통화했다.

“네. 조금 전에 간략하게 설명드렸지만, 약속한 날짜까지 완벽히 정리해서 보여드릴 겁니다.”

「기대해도 되겠어?」

여자라는 단어에 탐탁지 않아 하더니, 목소리가 엄중해진다.

「상반기에 일산 전자에서 나온 디스플레이는 이겨야 한다고 회사 전체가 벼르고 있네.」

“그럼요. 잘 압니다. 광고로 최대의 이점을 느끼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고요. 지금 저도 잠 안 자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여자는 서른 넘으면 훅 간다고 했지? 강 대리 그러다가 오래 못 가.」

“훅 갈 땐 가더라도 제가 재상 그룹 QD 디스플레이 TV는 살리고 가겠습니다.”

「나 참, 말은 잘해.」

“기대해 주세요. 부장님. 실망 안 시켜 드릴게요.”

내부 회의 결과, 소현이 의견을 내었던 것이 A 안으로 결정됐다. 그다음 미술관 디스플레이가 B 안.

“저 강소현에게 맡기신 거 후회 안 들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A 안으로 승부를 볼 거다.

「알았네. 내 믿고 있겠네.」

“네. 들어가세요, 부장님. 아, 그리고 오늘 저녁은 되도록 저지방으로 드시고요. 요즘 두부를 사용한 식사 요법이 괜찮다고 합니다. 김 부장님 큰 수술하셨는데 건강 챙기셔야 해요.”

「벌써 2년 전인데, 그런 거 기억해 주는 것도 재주야.」

“들어가세요.”

웃으며 통화를 마친 소현의 입술이 내려갔다. 정지한이 왜 이틀째 연락이 없는지 생각하기엔 소현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제작물이나 기획 방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머릿속이다. 소현이 클라이언트와 미팅에 참석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책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확인해 본 문자에 소현의 눈이 구겨졌다.

[오늘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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