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불시에 치고 들어올 것 같아서 불안했던 거였다. 소현은 지하에 도착할 때까지 답장을 고민했다. 어차피 답은 한정되었지만.
[몇 시.]
그러자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소현은 안전벨트를 매고서 시동을 켰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하고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10분.”
받자마자 소현은 짤막하게 시간을 얘기했다.
“미팅 장소까지 딱 10분이야. 용건만 간단히 말해. 그 이후엔 너랑 통화 못해.”
수화기 너머로 언뜻 웃는 것 같았다.
「제약이 많아서 또 꼴리려고 하네.」
대낮부터 쾌락의 숙주가 되었나. 소현은 음란한 소리를 무시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6시 이후로 시간이나 말해.”
「7시.」
“퇴근 시간이잖아. 여유는 줘야지.”
하……한숨과 목소리가 갈라지듯 나온다.
「능력 없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 같네.」
“뭐?”
「시간 미루는 게 그래 보여서.」
이게 갑자기 왜 날 긁고 난리야. 소현은 기가 차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차 가져와서 어디로 움직이든 한 시간은 걸려. 그건 이해해야지?”
「걸어오든, 뛰어서 오든 서울 프리미엄 호텔까지 7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시간이었다.
「능력껏 나한테 오면 예뻐해 줄게.」
욕설이 절로 나오는 언사였다. 그 뒤로 낮은 목소리가 경고처럼 나왔다.
「늦으면 안 봐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소현은 귀에 꽂힌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뗐다.
“어린 게, 봐주니까 계속.”
이가 갈렸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로를 응시하던 소현의 눈이 침전했다. 찝찝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러시아워를 뚫고 제시간에 갈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는 건 정말 그 시간을 지켜야 할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그동안 날고 긴다는 동종 업계 사람들, 콧대 높은 클라이언트, 까탈스러운 연예계 사람들을 마주해 왔던 소현이지만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사람 숨통을 조이는 건 처음이다. 재미없을 거란 말 한마디가 품은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
처음 만났던 날도, 저를 보면서 키스를 이어나가던 남자였다. 거기다 소현에게 업무의 연장선이던 방문을 개의치 않고 열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담배를 물고 본다. 무서울 게 하나 없는 사람처럼.
“하아…….”
그런 남자와 계약 아닌 계약을 맺은 제 자신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소현은 인파들로 인해 다 구겨진 옷을 털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꽉 막힌 차도에서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과감히 포기했다. 산처럼 놓인 계단을 오르고, 택시 없이 걸어서 호텔까지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선 소현은 화사한 조명을 스포트라이트 삼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40분.”
제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은 것처럼 이유 모를 성취감이 느껴졌다. 숨을 돌리며 핸드폰을 꺼낸 소현은 빼곡히 쌓인 팀 채팅을 확인했다. 대화창은 소현이 벌써 퇴근했다는 것에 난리도 아니었다. 6시 정시 퇴근을 하겠다고 인사했던 저를 얼이 나간 채로 쳐다보던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약이라도 먹었느냐는 식의 표정이었지. 소현은 어쩐지 우스웠다.
“모르겠다, 나 없이 잘들 해보라지.”
예전엔 일찍 퇴근하면 목으로 칼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현의 목은 건재했다. 다만 버리고 온 업무를 아침 회의까지 전부 해야 하는 노고가 남아 있지만.
통화 버튼을 누른 소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면 돼?”
「기다려.」
이번에도 먼저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하며 소현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함에 소현이 물었다.
“왜 안 끊어?”
「숨소리가 독특해서.」
“하아……너도 참.”
「나 뭐.」
싸늘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소현은 머리카락 쓸어 넘겼다.
「입술 좀 가까이 대봐.」
진짜 얜 정상이 아니다. 그 말을 감추며 소현은 빠르게 걷느라 차오른 숨을 차례차례 끊어 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들려오는 소리로만 서로를 느끼는 기묘한 통화였다.
팅, 밝은 소리가 들려오자 소현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귓가에 핸드폰을 댄 지한은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외형이었다. 가볍게 입은 셔츠는 단추가 무성의하게 잠겨 있었지만 값비싼 옷임이 틀림없었다. 이 호텔도 별 다섯 개짜리로 정평 난 곳이다. 그럼에도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걸어오는 태연함을 지켜보며 소현이 핸드폰을 내렸다.
포식자는 치열한 세계에서도 여유롭다. 제 눈엔 모든 것이 약자이기에.
“일찍 왔네.”
“약속한 시각 안 지키는 건 자존심 상해서.”
그제야 핸드폰을 뗀 지한은 허리를 숙여 소현의 입술 가까이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현이 허리를 뒤로 빼자 아쉬워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다 멈췄잖아.”
직접 듣고 싶어서 빨리 온 것처럼 말한다. 소현은 입술을 모아 귓바퀴 안으로 입김을 훅 불었다. 느리게 고개가 돌아가며 색이 차가운 눈동자가 소현을 보았다. 입술 끝이 올라갔다.
“계속 듣고 싶으면 네가 잘 해야지?”
그 말에 느긋했던 맹수가 본색을 드러낸다.
“예뻐해 줄 테니까 따라와.”
소현은 지한을 따라 걸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첫 번째 장난이었다.
*
엘리베이터에 오른 소현은 30층을 누르는 손길이 의아했다. 제가 알기론 거기엔 레스토랑밖에 없었다.
“바로 방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먹여야 힘을 쓰지.”
“하긴, 기운 없으면 못 하지.”
소현은 수긍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먹여야 힘을 쓴다고?
“나?”
지한은 한가롭게 엘리베이터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듯 소현을 보았다.
“그럼 여기 누가 있어.”
“너도 있지. 힘이라면 네가 나보다 더 써야 할 텐데 아직 식사도 안 하고 있었어?”
그날도 소현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몰아붙이던 것이 누구였던가. 젊은 혈기가 무기나 다름없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한 남자였다.
“오늘은 가만히 있을 테니 네가 힘 좀 써 보든가.”
“나 시키면 잘 하는데 너 어떡하니. 큰일 났다.”
지한은 뭐가 웃긴지 입술을 턱 선 만큼이나 날렵하게 흩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30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미쉐린 가이드 최고점인 별 3개를 받은 곳이라는 걸 인지하지 않아도 입구에 놓인 패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정석대로 턱시도에 보타이까지 맨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정지한 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작년에 뵈었는데 인물이 더 훤해지셨습니다.”
소현은 문득 지한이 1년에 한 번만 한국에 온다고 말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매니저가 얼굴을 기억할 정도면 오랫동안 온 건가. 아니면 기억해 둘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가.
“아부는 언제 들어도 좋네요.”
지한은 무미건조하게 답하고선 매니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내부에 있는 레스토랑이 그러하듯 이곳도 인테리어 하나는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신경 쓴 노력이 엿보였다.
창가 자리를 안내받은 소현은 눈부신 야경이 수놓아진 장관을 곁눈질했다. 자리 좋고. 분위기 깔끔하고. 드레스 코드가 있는 곳이지만 소현이 입은 세미 정장은 어딜 가도 통과였다.
“시켜.”
온통 영어로 적힌 메뉴판이었지만 소현은 능숙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걸 골라냈다. 그걸 감상하는 것처럼 지한은 의자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에 약하게 익혀 주시고요.”
중간중간, 뭔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소현의 시선이 지한에게 닿았다가 멀어졌다.
“하나는 트러플은 과하지 않게 조금만 얹어 주세요.”
“네. 와인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너 어떤 거 마실래? 난 카베르네 소비뇽 좋아하는데 너는?”
“좋을 대로.”
“그럼……가격대도 내가 좋을 대로.”
제 확고한 취향을 고수하며 와인을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이 지한이 보기엔 독특했다. 보통 메뉴판을 함께 펼치더라도 언제나 선택권은 제게 넘어왔었다. 먹고 싶은 걸 권해도 그냥 같은 거로 하겠다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소현은 달랐다. 식사 이후에 치를 거사를 위해서 만반의 준비라도 하듯 음식을 다채롭게 두 개씩 주문했고 그건 제게 의사를 묻지 않고 이뤄졌다.
지한이 메뉴판도 열지 않고 있으니 제가 알아서 주문해도 된다는 것을 캐치한 것처럼.
매끄럽게 말하다가도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라는 듯 저를 쳐다보던 시선.
지한은 테이블 아래에서 제 손을 맞잡듯 깍지 꼈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더라면 까마득히 몰랐을 만큼 자연스러운 배려였다. 문득 메뉴판을 보던 붉은 입술이 웃었다.
“잠깐, 이런 거 마실 나이는 되려나.”
지한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구겨졌다. 그 표정에 직접 주문을 받던 매니저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정지한 님은 이미 나이가…….”
“성인이라고 말 좀 해줘요.”
지한은 섬뜩하게 혀를 움직였다.
“망상이 저돌적인 여자라, 날 너무 안 믿거든.”
그러자 매니저가 진지하게 소현을 향해 말했다.
“정지한 님은 성인이 맞습니다.”
“아, 그래요? 너무 어려 보여서요. 칭찬이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메뉴판으로 눈길을 옮긴다. 소현은 와인을 고르고서 제 귀를 만졌다.
조금 전, 살짝 건드려 본 건데 과민하게 반응해서 조금 놀랐다. 그러기에 누가 회사까지 찾아와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라 했나. 소현은 손을 내리며 맞은편에 앉은 지한을 응시했다.
침묵이 나쁘지 않은 남자다. 불편하지도 않고, 회사에서 늘 목이 터져라 말하는데 잠깐이라도 쉬는 기분이었다. 소현은 목을 축이며 가운데 놓인 초의 불빛을 보았다. 빛의 그림자가 반대편까지 뻗어 나갔다. 그 길을 따라가던 소현은 어쩔 수 없이 저를 보고 있는 지한과 다시 또 눈이 마주쳤다.
안 보려고 해도 시선을 사로잡는 남자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지한에게 끌려갔다.
어룽거리는 불빛에게 마음껏 놀라며 무대를 내어 준 가슴과 어깨가 인상적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도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거나 긴장하지 않는다. 어딜 가든 상황이 자신의 발밑에 있다는 듯한 방자한 태도는 소현이 배우고 싶은 덕목 중 하나였다. 저런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알아서 극찬하며 달라붙는다. 분명히 자신감도 넘치겠지. 닫혀 있던 지한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넌 뭘 많이 하고 다니네.”
“아, 액세서리?”
의식적으로 소현이 손목을 만지자 불빛에 반사된 팔찌가 반짝거렸다. 반지에 귀걸이, 목걸이까지 휘황찬란했다. 그게 이상한지 지한은 소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고객을 만날지 몰라 나 자신을 이렇게 무장했다고 말하면 이해 못 하겠지. 광고 회사의 수준을 대변하는 모델이나 다름없어서 스타일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말 또한. 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소현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목을 더듬고, 그리고 귀밑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저를 보며 사치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소현은 맘껏 오해하라는 듯 웃었다.
“나한테 투자하고 꾸미는 걸 즐겨. 눈에 걸리적거리니?”
“아니.”
하긴, 저 남자가 뭘 신경 쓰겠는가.
“몇 개를 해줘야 하나 생각 중이야.”
소현의 입가가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