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13)화 (13/86)

13.

웃음이 사라진 입가가 다시 무거워진다. 그 모습도 못 보고 상상으로 만족해야 하는 제 꼴이 다시 불쾌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한 지한은 조식도 건너뛰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으로 떠다니는 글자를 방치해 둔 채 느릿느릿 흘러가는 초침에 파묻혀 있었다. 7시까지 아직 8시간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마스터키로 문을 연 직원이 놀라 말했다.

“실례합니다. 룸 클리닝 하러 왔는데요. 조금 나중에 올까요?”

“하세요.”

지한은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두 명의 여직원이 들어와 구역을 나눠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지한을 훔쳐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 객실 손님은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팁을 과하게 주는 것도 있었지만 잘생긴 외모와 야성적인 몸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침실에 들어간 여자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불은 어젯밤을 추리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커버를 교체하면서도 얼룩진 자국 때문에 낯이 화끈거렸다.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뚜껑을 연 여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붉은 빛의 향연이었다.

침대가 이 모양이 된 것이 납득이 갈 정도로 안에 수북한 흔적들이 적나라했다. 여자는 재빨리 봉지 안으로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요즘 젊은것들이란 막무가내라고 생각하면서도 원래의 모습대로 흐트러진 것들을 꼼꼼히 돌려놓았다. 구겨진 침구류를 벗기고 새로운 시트를 꺼내 펼치며 여자는 혀를 찼다. 함께 있었을 여자의 상태는 멀쩡한지 몰라.

욕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한 여자가 거실로 왔을 때, 남자는 아까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광욕을 하듯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면서. 다리를 꼰 채 누가 움직이든 신경도 안 쓰는 모습에 뺨이 붉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춰본 것 같았기에.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문득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전화가 왔는지 뭔가를 누르더니 스피커폰으로 전환한다. 마른 수건으로 TV를 닦던 여자는 청각이 쏠렸다.

“바빠.”

첫마디가 냉정했다. 바쁘다기엔 남자는 한량처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하다는 듯 음성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 전화를 네 번이나 한 거 아니냐. 네 녀석이 아주 바쁘다는 것을 잘 알고서 말이야.」

“왜 전화했어.”

「오늘도 안 오면 진짜 그 호텔 방구석에 쳐들어가려고, 내 예고라도 할 겸 전화했지.」

“하…….”

남자가 지겹다는 듯이 숨을 흘렸다. 남자보다 더 오랜 시간 세상 풍파를 겪어 온 늙은 노인은 기세가 대단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와.」

“나 머리 아파.”

「그러니까! 아픈 녀석이 왜 그런 곳에 처박혀 있느냔 말이야. 네가 싫다고 해도 오늘은 양보 못…….」

“할아버지.”

「왜 이 녀석아.」

“점심 먹을래?”

「그럼, 비서를 보내마.」

호랑이처럼 달려들던 노기가 한순간에 수그러든다. 여자는 살풋 웃음이 새려는 걸 꾹 눌렀다. 날고 기는 노장을 어떻게 말 한마디로 조련하는지,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 되었다.

“12시까지 와. 할아버지 만나야 시간이라도 가지.”

「알았다, 알았어. 내 지금 회사 나가마.」

“조퇴해?”

「뭔 조퇴야, 할애비가 먹여 살리는 인간이 몇인데.」

남자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은회색빛 눈동자를 햇살에 말려 두며 기다리는 것이 지겨운 것처럼 말했다.

“나도 먹어 줘.”

「알았다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두거라. 생각 안 나면 박 비서가 가자는 대로 가. 서울 바닥에서 맛 좋다는 곳 빠삭하게 다 꿰고 있다.」

“저, 청소 다 했습니다.”

눈동자가 굴러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인사하고 나서려고 하자 손짓한다. 남자는 테이블에 놓인 지갑을 열어 지폐를 있는 대로 꺼내더니 내밀었다. 오만 원 권이 수북한 걸 보고선 직원들이 난처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에 남자가 손을 까딱였다.

“내일 더 줄게요.”

부족한 거로 생각했나 보다. 직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양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이것도 너무 많습니다. 안 주셔도 돼요.”

“힘든 일 했잖아.”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남자인데, 이상하게 배려로 느껴진다. 안 받으면 억지로 쥐여 줄 기세라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고생했어요. 많이 더러웠을 텐데.”

차가운 어조지만 계산은 정확했다. 남자는 민망한 것들을 깨끗하게 청소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준거다. 그보다 더 난잡하게 방을 사용하는 이들도 많은데, 수고비로 70만원이나 되는 금액은 과했다.

「할애비 이렇게 방치해 둘게냐.」

남자의 고개가 옮겨졌다.

“도착하면 전화해.”

「이 녀석, 넌 통화를 왜 10분을 못 넘기냐!」

“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남자는 건조하게 대꾸했다. 오늘따라 많이 화가 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일 거다.

직원들이 방을 나서자 지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가 오래된 축음기처럼 늘어졌다. 지한은 저 혼자 떠드는 음성에 대답하지 않았다. 소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무거웠으므로.

어떻게 해야 붙잡을 수 있을까.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욕심이었다. 늘 술에 취하거나 졸음이 올 때까지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지한의 일상이었다. 지한은 불면증에 가까운 수면 장애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잠드는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다. 누가 있든, 지한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 나가는 것은 그를 만나면서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방해했다가 지한이 깨면 참사는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소현은 달랐다. 어젯밤에도 끈적거리는 느낌이 좋아 붙었는데 숨이 막힌다며 투덜거렸다. 목덜미를 빨아 당기는데 보이는 곳에 남기지 말라며 머리부터 밀어 댔다. 무슨 제 피를 빼앗아 가는 거머리를 멀리하는 것처럼. 섹스가 끝나면 몸에 조금만 혀가 지나가도 질색을 한다.

질식할 만큼 입욕제를 들이 부어서 그런지, 향긋한 냄새가 단잠에 빠져들게 했다.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소현을 안고 잤는데 기가 막히게 탈출했다.

“언제 다시 미국에 들어간댔지?”

조경이 아름다운 한식집에 앉은 지한은 움직이던 턱을 멈추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둔 연못엔 잉어가 펄떡거리며 헤엄쳤다. 지한이 느릿하게 움직임을 재개하자 식감이 미끄러운 묵이 부서지고 뭉개졌다. 잡을 새도 없이 목으로 넘어간다.

“네 눈만 봤다 하면 아주 속에서 열이 끓는다.”

지한은 시선을 들었다가 웃었다.

“흥분 돼?”

“네 이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어!”

“열난다며. 눈에 꼴리는 줄 알았지.”

버릇없다며 노인은 혀를 찼다. 제 손에서 머물지 않고 빠져나가서 그렇다. 노인은 역정을 내다가도 지한을 보며 참회하는 것처럼 말했다.

“다 몸에 좋은 것들이다. 맨 술이나 담배나 피워대지 말고, 어.”

“할아버지 닮았나 보지.”

그 말에 기분 좋은 것처럼 노인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그래, 할애비 닮았으니 담배는 끊거라. 나도 10년 넘게 금연 중이니까.”

그 사건 이후, 노인은 담배를 뚝 끊었다. 연기가 올라오는 것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기가 밀려온다고 했다. 지한은 죄책감이 발현된 현상으로 생각했다.

“정말 다시 미국으로 갈 게냐?”

“가야지.”

“고민하는 척이라도 좀 해 보거라.”

“할 이유 있나.”

1년에 한 번 들어오는 것도 고마워할 때가 있었는데, 늙으면 욕심만 남는지 이젠 아예 지한이 한국에 머물기 원했다. 하지만 지한의 입장에선 그럴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한국에 남게 하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내가 꼴려서 못 견딜 만한 걸 가져와.”

노인의 눈이 번득거렸다.

“그런 게 있느냐?”

지한은 느리고 퉁명하게 대꾸했다.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찾아봐.”

노인이 좌절감에 혀를 찼다. 제 구애를 빠져나가려고 불가능한 말을 던진 거다. 부족한 것이 없기도 했지만 지한 자체가 욕심이 없었다. 지한은 창턱 너머를 보며 눈썹을 구겼다. 어젯밤 욕조에서 이뤄지던 행위처럼 잉어 두 마리가 열심히 살을 부대끼며 철퍽거렸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

*

소현은 정체된 일들을 차례대로, 1분도 흘리지 않고 순차적으로 시간을 활용했다. 그리고 6시가 되자마자 회의를 빠르게 정리하고 지시를 내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소현은 가방을 챙겨 들고 죽상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는 팀장 앞에 섰다.

“팀장님.”

“어. 왜.”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제야 팀장의 눈이 모니터를 떠났다.

“강 대리. 정신이 가출한 거야, 아니면 애인이 생긴 거야?”

“둘 다 아닙니다.”

소현은 철면피처럼 말했다. 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허리를 의자에 기댔다. 잘난 얼굴 좀 보자는 식이라 소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제도 정시 퇴근한 거 압니다만, 오늘까지만 하겠습니다.”

“뭐야?”

“어쩌면 내일도 할 지 모르고요.”

“아니, 제작팀 다 일하고 있는데.”

“알아요.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냈고 중요한 건 팀 채팅으로 확인받기로 했습니다.”

“나도 내 딸 깨어 있는 거 본지가 언젠데. 이래서 내일모레 재상 그룹 기획안 발표 잘할 수 있겠어?”

“잘할 수 있습니다.”

제 컨디션이 좋아야 하니까. 그리고 지한을 만나면 컨디션 하나는 기가 차게 회복된다. 보장받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팀장의 눈초리는 매서웠다.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인지 잘 알겠지, 매초마다 눈빛으로 찔러 대며 확인시킨다. 소현은 말했다.

“재상 그룹 건 실패하면 저 사표 내겠습니다.”

“아니, 이봐. 잠깐 강 대리.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한 줄로 꽂아 줘야 살아남는 광고계 아닌가요.”

팀장이 가늘게 눈을 치떴다.

“어휴, 저 입만 아니었어도.”

“진짜 쓸게요.”

“됐어.”

“지금 보내 주시면 내일 아침 끝내주게 예쁜 기획안 보여드릴게요.”

“됐으니까, 가라. 가.”

소현을 오래 지켜 봐왔던 팀장이라 고작 노는 일에 이렇게 퇴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에선 양심이 조금 찔렸다.

소현은 오늘도 차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 같은 루트로 향하는 내내 개운한 머릿속에선 생각이 끊임없이 돌아갔다.

광고의 틀을 잡는 계획가, 광고주를 현혹하는 발표자, 각 팀에 할 일을 분배하고 지시하며 이끄는 조율사.

전부 다 소현의 역할이자 해야 할 일이다. 그것 말고도 트렌드를 읽고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구상해야 한다. 잠자는 시간이나 일어나 출근할 때. 운전하면서도 뇌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멈출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지독한 생각들이 신기하게 쾌락 앞에서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래서 섹스는 소현에게 숨통이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쾌락을 맛보고 오면 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롭게 기름칠을 한 것처럼 더 쌩쌩하게 돌아갔다. 업무 속도도 불이 붙는다.

하지만 워낙 까탈스러운 몸은 머리를 새하얗게 지우개질해 줄 쾌락도 예민하게 선별했다. 저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그날은 시간만 빼앗기는 거나 다름없지만, 지한은 완벽에 가깝게 그 과제를 이뤘다. 어제도 만나기 어렵다던 그 분과 몇 번이나 만났는지. 기절하다시피 늘어졌다가도 다시 제 몸의 감각을 깨우는 남자였다.

[14층으로 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약간의 흠집 정도로 봐줄 만큼 넓은 아량이 소현에게 생겼다. 소현은 가볍게 웃으며 호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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