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버튼을 누르자 붉은빛이 들어온 14층은 라운지 바였다. 어제도 확신했지만 지한은 이 호텔에서 투숙하고 있었다.
민달팽이처럼 축 늘어진 바지를 짜내고 입을 용기는 소현에게 없었기에 마땅한 것이 있나 옷장에 손을 대었는데 거주하는 사람처럼 그 양이 꽤 많았다. 개중엔 가격표를 떼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한쪽에 버려진 캐리어 사이즈를 보아하니 몸만 덜렁 와서 사들인 거 같았다.
그중 하나인 코트를 들고 소현은 라운지에 도착했다. 미소로 응대하는 직원이 소현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현재 1시간 정도 대기 시간이 있습니다.”
“일행 있어요.”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까다롭긴. 소현은 익숙지 않은 그 이름을 처음으로 뱉었다.
“정지한이요.”
명단을 뒤적이는 것도 아니고, 직원이 놀란 얼굴로 재빨리 소현을 안으로 안내했다. 소현은 코웃음 치며 직원을 따라갔다. 이름 하나가 무슨 프리패스권을 쥔 것만 같다.
워낙 콧대 높은 곳이라 예약하는 데만 한 달이 걸리는 곳이라서 더 그랬다. 소현도 이곳에서 접대를 가진 적 있었다. 예약이 꽉 차 있다는 걸 필사적으로 매번 연락해 확인한 결과, 비교적 가까운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정지한 님. 일행분 맞으십니까?”
그런데 이 남자가 대체 뭐기에 직원이 자신의 얼굴까지 확인시킨단 말인가. 일행이라고 말했음에도 믿지 않고 재확인을 거치는 건 고객에게 누를 끼칠까 한껏 움츠린 태도였다. 1인용 소파에 앉은 지한이 소현을 올려다보았다.
“왔어?”
“어.”
지한은 직원에게 가보라며 고갯짓했다. 소현은 주변을 훑어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앞엔 위스키가 한 병 놓여 있었다. 안줏거리도 없이 잔과 병이 대치하듯 서 있었다.
“너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소현이 후하게 점수를 준 상대는 기분이 바닥을 치는 모양이다.
“내 표정이 어떤데.”
저를 쳐다보는 시선과 팀장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현은 그 남자를 뒤로하고 지한에게 왔는데 말이다. 소현은 비교적 넓은 테이블 간격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저들끼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한은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눈빛이 살벌했다.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오늘 기분 별로면 다음에 볼까?”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면 두 팔 벌려 저를 환영할 거다. 이런 태도인 남자와 만나는 게 별로인 것도 있고. 그러자 잔을 입가에 댄 지한이 인상을 구긴 채로 물었다.
“밥 안 먹었지.”
“안 먹어도 돼.”
“시켜. 너 그거 잘하잖아.”
제 장점이 음식 주문이었는지 소현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 술 마셨니?”
소현의 물음에 지한은 생각을 멈춘 사람처럼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소현은 왜 저렇게 저기압인지 이해하는 걸 포기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새벽에 걸려 왔던 전화가 떠올랐다.
“혹시 내가 새벽에 간 것 때문에 그래……?”
생각을 읽기 어려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내려앉는 눈썹을 보니 맞는 거 같았다. 소현은 기분이 찝찝했다. 제가 한 행동 하나 때문에 상대가 불쾌했다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소현이 잘하는 것이 바로 상대의 표정을 살피면서 방향을 선회하는 거였다.
“밀린 일 때문에 그랬다니까.”
“…….”
“너 일찍 만나러 오느라. 너 때문에. 네가 시간 맞춰서 오라고 해서. 이래도 화 안 풀 거니?”
식사 자리에서 ‘너 때문에’란 말을 했을 때 반응이 좋았었다. 그걸 기억하고서 의도적으로 세 번씩이나 말했는데 지한의 표정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현의 얼굴을 끌로 새길 것처럼 거센 눈빛이 떠나질 않았다. 소현은 불편해 시선을 옮겼다.
직원이 다가와 소현의 앞으로도 잔을 세팅해 주었다. 소현은 시선을 내리깔며 동그랗게 세공된 얼음으로 알코올을 부었다.
“……하루라도 술을 안마시고 넘어가는 날이 없는 거 같네.”
짙은 위스키 향이 소현의 후각을 건드렸다. 독한 것도 마시네. 희석한 알코올을 넘기자 속이 화염에 녹아내리듯 화끈거렸다. 실은 그보다 더 뜨거운 건 지한의 시선이었다. 늘 차갑게 보였던 눈동자가 진득하게 닿아 있었다.
취하면 알아서 올라가겠지. 소현은 묵묵히 술잔을 채우고 또 비웠다.
어색함을 무너뜨리는데 알코올은 최고의 효과를 불러왔다. 빈속에 마신 것이 무리였는지 위가 신호를 보내왔지만 더는 저 눈빛이 불순하거나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소현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계속 술을 비웠다. 문득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시만.”
“어딜 가.”
낮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소현은 흠칫했다. 얌전히 먹잇감을 노리던 맹수가 사냥감이 움직이자 불쑥 발톱을 세운 것만 같았다.
“화장실 간다는 얘길 꼭 해야겠니?”
그제야 지한의 시선이 옮겨진다. 가라는 신호인가. 어차피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였다. 소현은 화장실로 가는 내내 제 뒤통수를 뚫어 버릴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복도로 들어오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좋게 봐줄 수가 없다니까.”
흠집 정도로 생각했던 성격을 재조명하게 만든다. 소현은 겨우 한 시간이 지난 것을 되새기며 손을 닦았다. 문을 나와 다시 저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지한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사실이 피곤해질 무렵이었다. 순간 소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벽으로 몸을 숨기는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등을 바짝 붙인 벽으로 심장의 울림이 쿵쿵 거렸다.
……설마, 잘 못 본 거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현은 고개를 반만 빼고서 주변을 탐색했다. 테이블로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은 착각일 수 없을 만큼 수려한 편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김성민이 맞았다. 소현은 입술을 씹으며 벽에 기대었다.
“아, 재수가 없으려니 이렇게 만나네.”
한 달 전에 헤어진 전 애인이었다. 이별을 고한 소현을 두 번이나 붙잡았던 성민은 헤어짐을 납득하지 못 했다. 일이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단 핑계도 통하지 않아 결국 너와는 결혼할 마음도, 아이 가질 생각도 없단 폭격으로 물리쳤다.
그런 남자가 지한과 앉은 저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비싼 라운지 바에 아는 남동생과 오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누가 봐도 지한은 젊었고 상대를 성적으로 긴장시킬 줄 아는 녀석이었다.
일순간 소현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김성민에게 저와 헤어지고 고작 연하랑 만나냐는 소리는 끔찍하게도 듣기 싫었다. 저를 발견한다면 아는 척을 할 게 분명했고, 정지한은 오늘 기분이 꽤나 안 좋은 상태였다.
사면초가라 소현의 머리가 암전됐다. 성민이 지한에게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면 그 입이 원나잇 상대라고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소현은 핸드폰을 꺼내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체 핸드폰을 어디다가 팽개친 건지 받지 않는다.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소현은 최대한 의연하고 조용한 물살처럼 복도를 나와 걸어갔다.
테이블을 지나가면서 성민이 어디 앉았는지 스캔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명도 낮은 조명 때문인지 어느 누가 성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전부 양복 차림에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다. 소현은 성과 없이 자리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납게 눈매가 올라왔다.
“왜 이제 와.”
어딜 숨겨놔도 지한은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소현은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왜.”
“술 들어갔더니 하고 싶어. 방으로 올라가, 가서 마셔.”
지한은 소파에 몸이 붙은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소현을 주시하며 한가롭게 잔을 입가에 가져간다. 아주 내 말을 말아 드시는구만. 소현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지한에게 다가갔다. 억지로 팔이라도 잡고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
지한의 바로 뒷 테이블에 성민이 있었다. 그것도 고개만 들면 소현을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소현이 놀라 얼른 지한의 어깨를 잡는 순간, 대화 중이던 성민의 시선이 올라섰다. 재빠르게 소현의 무릎이 바닥으로 안착했다.
“읏.”
주저앉으면서 소현의 엉덩이가 테이블에 부딪쳤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 낀 소현의 눈동자가 바삐 굴렀다. 안 봤겠지? 봤으려나. 소현은 폭주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나, 안아 줘.”
“……뭐?”
지한의 눈썹이 구겨졌다.
“안고, 어디든 가 줘.”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벌어진 지한의 허벅지가 조여 왔다. 부딪친 곳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구두가 소현의 엉덩이 밑을 느리게 문질렀다. 노골적인 행동에 소현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이유인지 지한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너무 적극적이라 아랫도리가 아픈데.”
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자리만 아니면 되었다. 그리고 지한의 덩치는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거다. 소현은 지한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한아.”
저를 사냥감처럼 보았던 눈빛이 풀어진다. 군침을 삼키고 있는 거다. 소현은 얌전히 제 목을 내어 주었다.
“안 갈 거야?”
한마디 했을 뿐인데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