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눈앞에서 확 커지는 체구가 소현의 얼굴을 덮었다. 지한은 말없이 소현의 팔 안쪽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소현의 몸이 주춤거렸다.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싼 채 지한은 걸었다. 소현의 신경이 머리 뒤에 달린 것처럼 온통 뒤쪽 자리로 향해 있었다.
지한이 움직이자 그 동선을 따라가던 직원이 다가왔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자리에 남은 술은 킵해 두겠습니다.”
“방 줘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점차 자리와 멀어지자 저를 아는 척할까 긴장하던 소현의 어깨에 힘이 풀렸다. 뒤늦게 주변을 살피니 엘리베이터가 아닌 깊숙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앞서 걷던 직원이 문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열린 문 안쪽으로 드러난 내부가 웅장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소현은 얼떨결에 지한에게 이끌려 긴 소파에 착석했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시기엔 공간이 무척 넓었다. 소재만 봐도 특정 고객을 위한 프라이빗 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
소현의 물음에 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그의 팔이 소현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였다.
상관없나. 김성민이 앉은 곳과 멀어지다 못해 아예 차단된 곳으로 온 이상 소현은 목적을 이룬 거였다. 직원이 들어와 아까 앉은 자리에서 마시던 것들을 그대로 옮겨 놔 주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문이 닫히자 소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 마시고 갈 생각인가. 아까와 달리 소현은 얼마든지 마셔 줄 의향이 생겼다. 일촉즉발이었던 상황을 씻어 내려 소현이 술을 마시려던 찰나였다.
그보다 먼저 병 입구를 잡은 지한이 제 입술로 가져갔다. 손목을 기울이자 제가 마시는 것도 아닌데 소현은 속이 싸해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동자가 알코올에 물들어가듯 점점 축축해졌다. 젖은 입술에서 병 입구를 떼어낸 지한이 제 가슴으로 손목을 기울였다.
허공에서 곡선을 그리던 노란빛 액체가 셔츠에 쏟아졌다. 축축한 소리로 근육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액체가 바지에 도달해 고였다. 색이 변질된 곳으로 아까는 보지 못했던 형체가 선명히 윤곽을 드러냈다. 빈 병을 옆으로 치운 지한이 소현의 어깨를 끌어왔다. 가슴팍에 한쪽 얼굴이 닿자 끈적하게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핥아.”
어깨를 단단히 잡는 손길에 소현은 자신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깨달았다. 지한에게 어떤 말을 하면서 유혹했는지도. 소현은 가슴팍을 밀어내는 대신 손으로 젖은 셔츠를 문질렀다.
“버릇없긴. 내가 너 세탁 해주는 사람이니?”
단추를 하나 열자 지한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잘하는데 왜.”
방을 안 간 게 아니라, 갈 여유조차 없던 거다.
소현은 단추를 차례차례 풀며 내려갔다.
그걸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현은 곁눈질로 닫힌 문을 보았다. 누가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스릴이 되어 소현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한과 있으면 미친 짓을 꽤 여러 번 하게 된다. 현실성 없는 저 눈동자가 괜찮다고 소현을 어우른다. 더 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지한은 제가 어떤 짓을 해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였다. 소현은 셔츠를 열고서 액체가 번들거리는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단단한 가슴으로 옅은 균열이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살결을 입술로 더듬어 내려가다가 혀끝을 세워 핥아 올렸다.
“하아…….”
탁한 신음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소현은 복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혀로 할짝거렸다. 소현의 얼굴 옆을 더듬는 커다란 손이 귓바퀴에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루만지던 지한이 귀를 뭉개며 고개를 젖혔다.
“너무, 좋은데.”
눈을 감은 소현은 막힌 귀로 윙윙거리는 묘한 소리를 들으며 감각에 집중했다. 끈적한 액체를 혀로 거둬 내는 것뿐인데 공기가 뜨거워졌다. 소현이 갈라진 계곡 사이를 지나가니 근육이 나른하게 꿈틀거렸다. 곳곳에서 특유의 페로몬을 내뿜는 것만 같았다.
향이 진한 곳으로 내려가던 소현은 젖은 천 위로 혀를 굴렸다. 위에서 짐승의 울음이 진해졌다. 소현은 턱을 벌려 깨무는 것처럼 이로 긁었다. 귀 뒤를 문지르던 손끝이 세워졌다. 그걸 신호 삼아 소현은 움직임을 조절했다.
입안에 거미줄처럼 엉겨 붙은 알코올이 독하다. 소현은 반쯤 입을 열며 속삭였다.
“잠깐…….”
혀가 얼얼하다 못해 시큰한 향이 뇌까지 물들었다. 소현이 두꺼운 허벅지를 손으로 덮으며 이미를 기댔다.
“그만 할래, 어지러워…….”
늘어진 긴 머리카락이 지한의 다리 아래에서 흔들렸다. 행위를 멈췄지만 몽롱한 기분이 뇌를 잠식한 것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커다란 손이 소현의 머리를 쓰다듬자 머릿속으로 침투해 주무르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씻고 싶어…….”
지한이 고개를 숙여 소현의 입술을 머금었다. 찝찝한 것을 거둬가 주는 것처럼 혀가 꼼꼼히 안쪽까지 움직였다. 소현의 숨이 금세 달라 올랐다. 목뒤로 넘어간 타액이 알코올과 섞여 취기를 올렸다. 소현의 눈꺼풀이 올라가자 입술 끝을 더듬었다. 찍힌 점으로 끈적한 감각이 몰두됐다.
“조금 이따가 같이 씻어.”
갈라진 목소리가 흥분에 도취돼 있었다. 소현의 숨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어지러움이 한층 더 거세진다.
술이 아니라 지한으로 취할 거 같았다.
*
서로의 몸이 끈적거렸다. 옷은 걸치고 있지만 벗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 서로가 서로의 깊숙한 안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후였다. 소현은 소파에 길게 누운 지한의 몸 위에서 숨을 골랐다. 아래로 떨어진 팔로 추가 매달린 것처럼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았다.
“물 줘?”
소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긴 팔을 이용해 테이블에서 물병을 집어 든 지한이 뚜껑을 열었다. 입구를 붙여 주기에 소현은 고개만 돌린 채 그걸 받아 마셨다. 입술을 오므리고 마시는 게 신기한지 지한은 그 모습을 빤히 보았다.
“더?”
대답 대신 긴 속눈썹이 더 깊게 내려간다. 지한이 조금 더 손목을 기울여 주자 소현이 말없이 목을 크게 움직였다. 옅게 인상을 찡그리자 지한은 병을 세웠다. 소현은 그제야 크게 숨을 터트렸다.
“아……이제야 살 것 같아.”
“내숭은.”
물병을 바닥에 내려 둔 지한이 다시 소현의 허리를 문질렀다.
“넌 안 마셔도 돼?”
“어.”
진이 다 빠진 소현과 달리 지한은 식사를 마치고 늘어진 짐승처럼 여유로웠다. 아까 기분 나빠 보였던 것은 소현 혼자만 느낀 기우인 듯했다. 허리와 목 뒤를 문지르는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이것도 기분 탓이려나. 소현은 눈을 감은 채 지한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전부 다 귀찮았으므로.
“오늘은…….”
뭔가를 생각하듯 지한의 목소리가 잠겼다.
“아니. 내일.”
소현은 그 목소리를 자장가처럼 가만히 들었다. 이마 위로 입술이 닿았다.
“내일은 갈 때 깨워. 그냥 가지 말고.”
살결로 전해지는 그 말에 소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숨결이 멀어지고 소중한 것을 보듬는 것처럼 긴 손가락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오래도록 소현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내 차 빌려줄게.”
이상한 느낌이었다.
*
소현의 손끝이 머뭇거렸다. 낯간지럽고 어색함이 물밀듯이 밀려와 몇 번이고 허공에 헛손질이었다. 소현이 갈등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4시 30분.
이대로 그냥 몸을 돌려서 나가는 일이 제게는 더 잘 어울렸다. 손님처럼 왔다가 홀로 떠나는 포지션이 마음이 편했다. 하던 대로 하자. 소현이 몸을 돌리려던 순간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길이 떠올랐다.
어제 말없이 가서 화낸 것도 있었고, 눈 딱 감고 한 번만 하자는 심정으로 소현이 손을 내렸다.
“정지한.”
어깨를 잡고 체온을 조금 깊게 밀었다. 거기에 조용하던 어깨가 느린 움직임을 일으켰다. 해일이 덮친 것처럼 이불이 움직이자 역시나 마음이 불편하다. 소현은 깨기 전에 의무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 갈게.”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 소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최소한의 불만 켜 둔 방안이 적막했다.
“가지 마.”
고요한 공기를 밀어 올리듯 지한이 손가락을 조였다. 소현은 눈동자를 굴렸다.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미 힘이 실린 손가락은 풀리지 않았다. 소현은 작게 속삭였다.
“출근해야 돼.”
“아프다고 해.”
“안 아파.”
사실 몸이 저릿할 만큼 욱신거렸다. 그런다고 출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한은 눈을 감은 채 소현의 손바닥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정말 안 아파?”
입술 점막이 숨결과 함께 뭉개졌다. 간지러운 입맞춤이 손바닥에서 이뤄지자 소현의 손가락이 경직됐다. 지한이 입술을 붙이고 느슨하게 고개를 비틀었다.
“……아프게 해줘?”
공격적인 언사가 미끄러지듯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