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16)화 (16/86)

16.

소현은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잠에서 깬 건지, 아니면 잠결에 이러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 빨리 나가야 하는데 도무지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 손과 지한을 번갈아 보던 소현의 시선이 멈추었다.

소현도 왜 그런지 모른다. 허리를 숙인 소현이 지한의 뺨으로 조심스레 입술을 부딪쳤다.

“자고 있어.”

속삭이니 일순 손목을 잡은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조용히 손목을 빼낸 소현은 호텔 방에 켜 둔 미조 등을 껐다. 편안한 숨소리를 뒤에 두고서 걸어 나갔다.

복도로 나온 소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이 감각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소현은 피곤한 눈꺼풀을 내려 감았다. 입술이 화끈거리는 착각이 일어 몇 번이고 그 부위를 깨물자 졸음이 달아났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가.

한숨을 내쉰 소현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밝은 조명등이 쏟아지자 한결 심장이 차분해졌다. 급속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소현을 로비로 데려다 놓았다. 소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끈한 바닥을 밟았다.

프런트에 택시를 요청한 소현은 아직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밖을 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택시가 빨리 도착했다. 차에 올라탄 소현은 문득 코끝이 시렸다. 아직 초가을이라 쌀쌀하지도 않은데 몸 안쪽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논현동 사거리로 가 주세요.”

“네.”

목적지를 말한 소현이 호텔 로비를 바라보았다. 차가 출발하자 소현의 시야가 푸른 새벽의 온도와 마찬가지로 차가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차피 한 번만 더 만나면 끝날 관계다.

*

“지한아. 오랜만에 본다.”

“어.”

지한은 소파에 들러붙어 있었다.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침대에서 잠들었던 지한의 얼굴은 피곤함을 전부 벗어 낸 듯 깨끗했다. 깨어났을 때 옆자리에 소현은 없었지만 전보다 기분이 더럽진 않았다. 어렴풋하게나마 저를 깨우며 인사를 한 소현의 얼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뺨에 닿았던 감촉도.

얼굴 옆면을 손등으로 쓸어 올린 지한은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없어.”

단조롭게 말했지만 지한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본 친구들은 떠들썩해졌다. 매일 같이 술판을 벌이던 지한이 이틀간 연락이 없었기에 미국으로 돌아갔나 생각하던 찰나였다.

“못 본 새에 무슨 일 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그때 그 여자 만났어?”

“어.”

만났어? 야, 만났대. 실내가 잠시 들썩거렸다. 그 뒤로 뭐라고 떠드는 말들을 지한은 한 귀로 흘렸다. 입안을 적시는 알코올이 어제 이곳에서 이뤄졌던 행위를 기억하는지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입술 옆에 붙은 점이 요동치는 걸 보면 지한은 뱃속이 근질거렸다.

동그랗고 까만 것이 속삭이듯 움직이고,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는 허스키하게 갈라지고. 또 요염하게 올라간다. 그래서 만지고, 핥고, 소리까지 먹고 싶어 입안으로 들어가면 혀를 으스러뜨릴 만큼 뜨거운 체온이 반겨 준다. 반쯤 뜬 검은 눈동자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까맣고 아찔했다.

지한은 음미하듯 소파 위로 수놓아진 붉은 벨벳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그때 성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한아, 산화 기업이라고 알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애야. 정민수라고.”

“어.”

“반갑다, 성우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나이는 내가 더 많으니까 말 놔도 괜찮지?”

“…….”

마음대로 하라는 듯 지한이 눈짓했다. 곧바로 시선이 떠났지만 잠깐 사이 눈이 마주쳤던 민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저를 소개시켜 준 성우를 잡아다가 속삭였다.

“눈 진짜 신기하네. 듣던 대로 와꾸 장난 아닌데요? 여자들이 환장할 얼굴이네. 쟤 데리고 클럽 가면 자릿값 안 아깝겠다.”

“꿈 깨라, 우리가 자리 만들어도 절대 안 와.”

“왜요? 클럽은 안 다닌대?”

“저렇게 보여도 시끄러운 거 은근히 싫어해. 떠드는 건 괜찮은데 우퍼 진한 음악 소리나 그런 거 질색해.”

뭐 그리 까다롭냐는 듯 민수가 눈을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다시 보게 만드는 신기한 남자였다.

“아버지 엄청 잘 만나서 방탕하게 사네.”

솔직히 남자의 재력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 기를 쓰고 참석하지 않을 거였다. 친분이나 인맥에 주차시키기에 지한은 그야말로 황금 덩어리였다. 장식장에 넣을 수만 있다면 아마 가장 돋보이는 자리에 놓일 거다. 소파에 기대어 있는 지한을 훔쳐보는 민수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제가 이런 남자와 친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들쑤시는 대상이었다.

“곧 한국 뜨니까 그때까지 잘 해봐.”

“네, 네. 형님이 자리만 만들어 주면요.”

성우는 피곤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내 옆에 붙어서 얘기해. 아, 쟤 신경 거슬리게 하는 말하지 말고.”

“알았어요, 내가 눈치도 없을까 봐. 걱정 마세요.”

민수를 데리고서 성우는 지한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눈을 감고 있던 지한은 거기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교차된 다리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위태롭게 들려 있는 잔을 성우가 건드리자 지한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떨어뜨리겠다.”

늘어진 손목으로 힘이 풀리며 성우에게 잔을 넘겨준다.

“한잔해.”

“같이 마셔야지. 너 그 여자 만났다며, 얘기나 풀어 봐.”

“풀 것도 없어.”

시큰둥하게 말하지만 지한의 입가에 스친 웃음을 보아하니 뭔가 있던 게 분명하다.

“회사까지 찾아갔는데 안 놀라든?”

“놀라.”

“갑자기 예고 없이 들어가니까 그렇지.”

“그럴 만했잖아.”

성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서 십만 원을 두고 간 여자는 이미 모임에서 유명했다. 정지한의 값어치가 십만 원이라니,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분명히 가서 여자의 눈물을 뽑아냈을 거다. 그걸 알기에 그때도 이름 모를 여자에게 애도를 표했던 거였다.

“형, 누구 얘기하는 건데요?”

“아, 있어. 되게 겁 없는 여자.”

민수가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한이 너 여자 좋아해?”

“넌 싫어?”

지한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민수에게 되물었다. 민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 좋아하지. 근데 여자라고 다 만나고 다니진 않아.”

지한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비웃음이 짙은 미소였다.

“그런 거로.”

민수는 그 눈길이 지나간 제 행색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비싼 명품을 휘감았지만 두툼한 살 때문에 태가 안 났다. 체격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한과 가까이 앉아 있으니 왠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웃음을 띠며 민수가 말했다.

“돈 많은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여자들도 마찬가지지, 노력 안 해도 알아서 몰려들어. 난 고르면 그만이지.”

“재주 좋네.”

한마디씩 던지는 게 묘하게 사람을 긁어내린다. 민수가 손을 움켜쥐자 성우가 눈여겨보더니 술을 따랐다.

“여자 얘긴 그만하고 한 잔씩 하자. 자, 민수 넌 적당히 마셔라.”

“저 술 세졌다니까요. 아, 지한이 넌 술 잘 마시냐?”

“말도 마라. 얜 술을 물처럼 마시는 녀석이야.”

“그럼 걱정 없겠는데요? 나 취하면 지한이 네가 챙겨 주는 거다?”

성우가 건네준 잔을 든 지한이 손가락을 세웠다.

“여자같이 굴면.”

민수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상관없이 불투명한 회색빛 눈동자가 내려가며 술을 단 번에 비웠다. 앙상하게 남은 얼음이 덜그럭거렸다. 얼음 좀 치워, 지한이 낮게 말하자 성우가 천천히 마시라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정신 차린 민수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나도 이런데, 넌 여자 물고기처럼 몰려들겠다. 그치?”

“어떨 거 같은데.”

“아예 일렬로 줄을 쫙 서겠지. 만나 달라고 집까지 찾아와서 막 시끄럽게 굴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지한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물기 젖은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벨벳이 우그러진다. 사납게 눈을 치떴다.

“그럴 거 같아?”

“어.”

소현에 대해 좋은 것들만 생각하고 있는데 끝까지 싫다고 단호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세 번 만나는 거로 합의를 봤지만 조건을 내세우는 모습에 지한은 목이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횟수가 몇 번 남았지. 성급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를 찾았지만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내 걸로 해.”

성우가 재빨리 제 것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민수는 그런 성우의 행동이 눈에 걸렸다. 비서도 아니고, 제아무리 남자들 사이에서 서열이 재력으로 측정된다지만 성우 역시 규모 큰 제일 물산의 둘째 아들이었다. 민수는 지포 라이터를 당기는 지한을 보며 말했다.

“요즘 만나는 여자는 있어?”

“있어.”

“누군데?”

“강소현.”

강소현? 누군지 알아요? 유명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민수가 성우에게 물었다. 연예계라면 빠삭한 성우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지한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뱉으며 성우와 눈을 맞추었다.

“나 걔 만나기로 했어.”

“누구?”

“회사 찾아가서.”

단어를 조합하던 성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십만 원?”

“어.”

역대급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성우가 넋이 나가 있자 민수가 추궁했다.

“십만 원이 대체 뭔데요? 강소현이라는 여자가 뭐 십만 원 빚졌어요?”

“아니, 잠깐…….”

성우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술을 마셨다. 왜 결과가 그렇게 됐는지 머리 회로가 잘 이어지지 않나 보다. 누군가와 만난다는 소리 같은 건 안 하는 지한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었기에 더욱 믿기질 않았다. 민수는 성우에게 듣는 걸 포기하고 지한에게 물었다.

“강소현이 누군데 성우 형까지 저래? 뭐, 엄청 예뻐?”

“나쁜 편은 아니지.”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 하면 외모 평가는 당연한 순서였다.

“그럼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데?”

“…….”

미세하게 눈매를 꿈틀대는 지한을 본 민수는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어색하게 웃은 민수가 서둘러 말했다.

“아, 장난이야. 뭘 사귀자고 말하고 만나냐.”

제가 생각해도 초등학생처럼 유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저를 비린내 나는 녀석쯤으로 생각할 것만 같아 민수가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다음은 집안, 몸매, 그밖에 구질구질한 사안들이 잇달아 터졌다. 바삐 움직이는 민수의 입을 응시하던 지한이 낮게 물었다.

“다시 말해 봐.”

“뭘? 강소현?”

“그래.”

담배를 입에 문 지한의 눈가가 좁아졌다.

“그거.”

이상하게 다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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