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친한 사이처럼 민수는 강소현, 강소현을 반복해댔다. 지한은 그 난잡하게 떠들어대는 입술을 주시했다. 나이도 모르지 않나. 그건 지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름과 회사, 직급 정도만 가볍게 알아봐 달라고 했었다.
연락처는 제가 직접 만나서 얻어낼 생각이었고. 얻었는데……생각에 잠긴 것처럼 지한의 눈동자가 연기와 뒤섞여 흐트러졌다. 그때 민수가 신나게 떠들었다.
“강소현 여기 부르면 안 돼? 얼굴 궁금하다.”
“…….”
“네가 부르면 좋다고 뛰어나올 거 아니야? 술 좀 들어가면 너도 재미 볼 수 있고. 그때 되면 알아서 다들 자리 피해 줄 테니까 일단 불러.”
“…….”
“아이, 얌전히 있는다니까. 그냥 슬쩍 몸매만 구경 할게. 그 정도는 해도 되지?”
민수는 분위기를 띄우려 멋대로 떠들어대던 입을 멈추었다.
“왜 말이 없어?”
잠에서 깬 것처럼 지한의 고개가 느리게 움직였다.
“다 떠들었나?”
순간 민수는 등줄기가 오싹하게 굳었다. 회색빛 눈동자가 짐승의 아귀처럼 벌리고 저를 삼켜 버리는 것만 같았다. 입가에 물린 담배 연기가 스산한 냄새를 피우며 올라갔다. 지한은 느릿하게 물었다.
“너 강소현이 몇 살인지 알아?”
“글……쎄?”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돌변한 것처럼 시선의 깊이가 저를 갈기갈기 찢는 것만 같았다. 민수는 쪼그라든 제 모습을 지우려 일부러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여기 없는데.”
필터가 으깨지도록 입술에 파묻었다가 떼어낸 지한이 연기를 길게 뱉었다.
“중요하지.”
침전하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시끄러운 주변에 파묻혔다. 기대어 있던 몸이 빠르게 일어섰다.
“나조차도 모르는데.”
“잠, 깐……!!!”
힘에 밀려 소파 등받이로 구겨진 민수는 숨을 컥컥댔다. 목 아래로 들어온 팔이 칼처럼 살을 파고들었다.
“윽, 아.”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압박감이었다. 한껏 경직된 몸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무릎을 세운 지한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인 양 새빨개지는 민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민수의 눈살이 구겨졌다. 역광으로 가려진 표정을 살필 수 없어 공포가 밀려왔다. 보이는 건 입가에 물린 담배가 전부였다. 저를 주시하는 섬뜩한 짐승을 어둠 속에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큭, 이거, 놓고.”
그 순간 한 곳에 점처럼 박혀 있던 빨간 불이 위험하게 움직였다. 민수는 동공이 커졌다.
“윽!!”
담뱃불이 민수의 뺨 옆을 위험하게 스쳤다. 숨을 멈춘 민수는 온몸의 구멍이 다 확장된 기분이었다. 겁먹게 하려는 거라면 성공했다. 민수는 눈을 옆으로 고정한 채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스친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지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치열 사이에 물린 필터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 빗나갔네.”
진짜로 확인하니 눈앞이 팽팽 돌 거 같았다.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민수가 겁에 질린 눈동자로 지한을 보았다. 느릿하게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담배를 손가락으로 옮긴 지한이 뺨을 두들겼다. 경직된 민수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별안간 지한이 엄지로 민수의 한쪽 입꼬리를 누르며 밀어 올렸다. 피에로처럼 웃는 얼굴이 되었다.
“입 벌려.”
독한 연기와 공포감에 민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입을 벌리면 손가락에 위태롭게 들린 담배가 안으로 처박힐 거 같았다. 필사적으로 턱에 힘을 주자 지한이 실없이 웃었다.
“안 해?”
“잠깐, 지한아. 기다려 봐.”
짐승의 눈동자가 번득이던 순간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성우가 지한의 어깨를 잡았다.
“……그쯤 해라. 애들도 많은데 기분 좋게 놀아야지.”
지한은 비스듬히 고개를 옮겨 성우를 보았다.
“내가 노는 걸로 보여?”
성우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지한의 아래에 깔린 민수가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애가 아직 뭘 몰라.”
“…….”
지한은 제 손에 들린 담배와 밀어 올린 입꼬리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둘에게 시선이 집중돼 조용했다. 즐겁게 분위기를 밝히던 것들이 전부 깨졌다. 지한은 담배 끝을 세워 기괴하게 올라간 민수의 입술을 덧그리듯 몇 번이고 허공에서 움직였다. 마치 화가가 펜을 들고 종이 위로 스케치하듯이. 그리고 아쉽다는 듯이 입가에 물며 말을 흐리게 뱉었다.
“다신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팔을 풀자 민수가 뒤늦게 막혔던 숨을 콜록대며 토해 댔다. 목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렸다. 한순간에 살벌함을 내뿜어 압도하는 것은 본 적 없던 터라 간담까지 서늘했다.
“형…….”
민수가 애처롭게 성우를 불렀지만 여기서 도와줬다간 괜히 미운 털만 박힐 거다. 성우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리자 다들 마저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다. 지한의 기분이 처박히는 포인트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다가 불현듯 기분이 나빠지거나 단어 하나에 불쾌감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처박히는 구간이 찾아오면 빠르게 그 분위기를 끌어올리곤 했다. 지한도 다시 그런 분위기 속에 스며드는 게 일상이었다.
“나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슨 소리인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지한을 보는 얼굴들이 의아했다. 지한은 구부렸던 무릎을 펴며 속삭였다.
“눈 돌아가는 거 보고 싶으면 여기 있고.”
왜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하나둘씩 제 짐을 챙기더니 포식자에게 추격당하는 동물처럼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다. 물살이 빠져나간 것처럼 내부가 고요했다. 과하게 주문한 술은 아직 반도 다 거덜 내지 못 했고 먹다 남은 과일들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지한은 그중에서 초록빛 포도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과즙이 시큼하게 터졌다.
소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게 뭐 그리 이상할까. 원래 그런 식으로 만날 여자였다.
지한은 잔여물을 넘기듯 술잔을 들어 쉼 없이 들이마셨다. 폐가 뻐근하게 울렸다. 잔 입구를 움켜잡은 검지가 두들기며 움직였다.
“한 번 남았네.”
멈춘 손가락이 잔을 움켜잡은 채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상상이 침몰한다.
*
결전의 날이었다. 소현은 기획안을 옆구리에 끼고 노트북을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솟구친다. 오늘 재상 그룹 미팅에서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콘티 시안 설명을 해줄 CD의 차 부장과 팀장은 소현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주차를 마친 소현은 제 회사인 양 친숙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재상 그룹은 유독 미팅이 잦은 편이었다. 밥 먹듯이 드나들었더니 이제는 그리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비에 도착한 소현은 출입증을 건네받았다. 기다리던 홍보 전략실 마케팅 팀장과 만나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 미팅에 홍보 전략실 전무와 임원들이 참석한다더니, 그는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재상 전자의 사장도 올 거란 얘기를 귀띔했다. 그제야 소현의 목으로 긴장감이 서렸다. 미팅 장소는 15층이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숫자를 지켜보던 소현은 작게 심호흡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양옆으로 벌어진 아귀 너머로 윤기 나는 잿빛 슈트가 소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색이었다. 시선이 올라서자 동시에 소현의 숨이 턱 막혔다.
“…….”
남자도 놀란 건지 소현에게 박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현은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꿈이라면 깨길 원했지만 현실이었다. 이내 남자가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였다. 소현의 바로 옆에 선다. 문이 닫혔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소현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놓인 남자와의 팔 간격조차 숨이 막혀 왔다.
그때 소현의 손등으로 무언가가 스쳤다. 손가락 끝이었다. 눈을 크게 뜬 소현이 올려다보자 회색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회사에서 보니까 더 꼴려.”
속삭이듯 말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한정됐다. 소현은 그의 입모양과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은 반면, 다른 이들은 헛것을 들었나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출처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소현은 닿은 손을 재빨리 앞으로 모으며 숫자 계기판을 보았다. 붉은빛이 눈앞에서 아찔하게 찔러 왔다.
“…….”
정지한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강 대리. 내리지.”
“……네.”
소현은 작게 말하고선 앞만 보며 걸었다. 그러려고 애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연하게 대처하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의 만남이 소현을 궁지로 떠밀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그 말에 마케팅 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안에 와 계신데요.”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가죽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본 이상 소현은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화장실을 갔다간 자신감이 없는 거로 비칠 수 있었다. 소현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발을 내디뎠다.
“안녕하세요, 현진 기획의 강소현 대리입니다.”
매끄럽게 인사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지한을 애써 치워 내려고 소현은 앞으로 걸어가 노트북을 켰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동안 팀장은 맡은 바를 다해 광고주들에게 기획안을 나눠주며 인사를 나눴다. 거기엔 배가 불룩한 김 부장도 있었다.
“……괜찮아.”
소현은 혼잣말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깐 마주친 것뿐이다. 우연이야. 우연히 마주치고 이제 헤어졌으니 된 거다. 기기를 연결한 소현은 앞에 드리운 빔이 제대로 출력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무선 리모컨을 손바닥 안으로 움켜쥐며 현재 상황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때 자동문이 열렸다. 여유로운 자태로 걸어와 남아 있는 의자에 착석하자 소현의 머리가 암전 됐다.
거기엔 정지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