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18)화 (18/86)

18.

이미 앉아 있던 자들은 그의 등장에 의문을 가졌지만 말로 꺼내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동자가 프리 패스라도 되는 것인 양 다들 눈을 보고서 암묵적으로 상황을 방관했다. 그에 비해 소현은 머릿속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케팅 부서 신입인가? 신입이라기엔 지한은 목에 사원증 같은 건 걸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정자세로 앉아 무게감을 주는 가운데 다리를 꼬고 의자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의자 받침대에 팔을 세운 지한은 검지를 깨물듯이 입술 사이에 묻었다.

저 눈동자에 드리운 흥미는 딱 하나였다.

“…….”

소현은 그 시선에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지금 저기서 날 아는 체한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소현의 앞에 있었다. 소현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기립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인자한 미소를 띤 40대 중반의 남자가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 소현의 시선이 한 박자 늦게 그를 따라갔다. 상석으로 걷던 그가 멈춰 서며 삐뚤게 어긋난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지한은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고 소현을 보고 있었다. 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시작합시다.”

소현은 그 말에 심장이 울렸다. 제게는 장난이었던 남자가 바로 앞에 있고, 그 옆에는 오늘 기획안을 결정 내릴 남자가 있었다. 소현은 굳은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사장을 보았다. 그 옆에서 강렬한 눈빛이 소현에게 다가왔다.

“재상 전자 QD 디스플레이 TV 광고 기획안.”

비장한 소현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시작하겠습니다.”

고작 저 눈동자 하나에 미팅을 망칠 수 없었다.

자리에 착석한 광고주들은 기획안을 가볍게 훑으며 귀로 얘길 들었다. 소현은 바쁘신 분들 모아 놓고 구구절절 떠들 생각 따윈 없었다.

“한 달 전 일산 전자에서 나온 디스플레이 광고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목이 한순간에 소현에게 집중됐다. 일산 그룹은 재상과 가전제품 분야에서 라이벌인 곳이었다.

“놀라울 만큼 웅장한 자연 경관을 보여주고 한 남자가 오지를 헤치며 여행을 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꿈꾸는 힐링에 힘을 실은 광고였어요. 언제든 떠나고 싶은 여행, 리프레시, 그 모든 걸 간접 체험 하게 만들어 주는 고화질의 디스플레이.”

상반기에 먼저 디스플레이를 출시해 그것보다 실적을 내야 한다고 벼르던 터라 모두가 촉각을 세웠다.

“하지만 리서치 결과, 디스플레이 주 고객층이 3, 40대의 TV 시청 시간은 3시간 안팎입니다. 그다음 소비층인 50대 역시 4시간. TV를 시청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현은 단상에서 벗어났다.

“소비자들은 고화질로 느끼는 간접 체험보단, 직접적인 체험을 더 원합니다. 여행을 떠나고 모임에 나가고. 그럼에도 쉬는 시간에 집에서 잠깐 시청하는 거로 값비싼 TV를 소비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심리 때문이죠. 가전제품은 이제 소비자들에게 내 일상의 한 부분으로서 나를 완성해 주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연한 블라우스가 물살을 헤엄치는 것처럼 흔들리지만 검은 재킷은 갑옷처럼 각이 잡혀 있었다. 남자의 슈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재상 전자의 TV 구매자는 2010년,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현재는 중산층 여성이 그 비율을 2배가량 넘어섰습니다.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고 결혼이 늦어지면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가전제품 소비는 바쁜 여성들에게 필수 요소죠.”

가녀린 뼈대를 숨기는 갑옷을 발목 아래까지 중무장했다. 소현을 지켜보던 지한은 입술에 대고 있던 검지를 느리게 문질렀다.

“문제점은 남성이고, 여성이고 값비싼 고가 제품을 살 땐 고민을 한다는 겁니다.”

살결 하나 보이지 않게 감춰 두어 금욕적이다.

“하지만 결정하면 단번에 사는 추진력은 3, 40대 여성으로 데이터가 증명돼 있습니다. 홈쇼핑이 늘 매진 임박인 이유이기도 하죠. 그동안 대기업에서 여성 소비자를 의식하고 있지만 광고에서 전면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건 남자들의 시선 때문입니다.”

저 몸 안에 제가 남겨 둔 흔적이 꽤 여러 개였다. 소현은 시선을 옮겨 지한을 보았다.

“남자들의 시선.”

교차된 지한의 다리로 느긋하게 힘이 실렸다. 소현의 눈동자가 옆으로 옮겨졌다.

“청소기와 세탁기 광고는 여자 혹은 주부가, TV와 오디오 광고는 세련된 외형을 뽐내는 남자가. 제품엔 성별이 없는데 고정 관념이 오랜 기간 업계에서 통용돼 왔습니다. 그걸 깨야지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소비자에게 인식 되죠.”

차례대로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던 소현이 음절을 박아 넣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룹으로서, 저는 일산보다 재상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한은 올라선 입술을 손가락 안쪽으로 끌어내렸다. 침대에선 앙칼지게 허리를 움직이며 몰아세우던 야생적인 모습이 지금은 반전돼 남자들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려 본 남자들이 사냥감이었다.

“QD 디스플레이 TV는 일산 기업보다 디자인과 화소 면에서 우수한 성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얇은 디스플레이 보디는 제가 보기에도 정말 매력적이에요.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공략하는 겁니다. 충동구매를 해서라도 꼭 사고 싶은 디스플레이, 집 안에서 나를 만족시켜 주는 일상적인 아이템으로.”

입술 옆에 찍힌 점에서 무슨 마력이라도 발산되는 것처럼.

“소비자에게 인식된다면 가격 정도야 큰 장벽이 되지 않을 겁니다.”

힘차게 율동하고 단호하게 입술 끝을 내릴 때마다 지한은 가슴이 지끈거렸다. 맹수가 발톱을 세워 할퀴듯이 소현은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자신의 속삭임을 새겨 넣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얼굴들이 점차 소현에게 몰입했고 빠져들었다. 적당히 조절되는 숨은 먹잇감이 얼마나 제게 들어왔는지 견주어 보고 있었다.

목표 대상을 정했으니, 여성을 메인으로 한 광고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전략으로 삼아 소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넓은 공간도 소현에게는 좁아 보였다. 목소리와 성량, 그리고 눈빛까지 압도적인 기량으로 남자들을 제게로 끌어갔다. 지한은 문득 숨이 막혔다. 소현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 밀려왔으므로.

저 여자는 벗겨 놔도 좋지만, 중무장하고 덤벼들 때 더욱더 사람을 애태웠다. 맹렬한 저 혀끝의 감촉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상상하게 된다. 지한은 지그시 검지를 깨물었다.

“이상입니다. 질문 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얘기로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한은 정적에 휩싸인 주변을 훑어보았다. 소현을 빤히 보고 있는 남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흐리멍덩했다. 지한은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구긴 채 소현을 보았다.

아저씨 정말 좋아한다니까.

침묵하던 과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전략, 참신하고 좋습니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커리어 우먼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세운 배우로 모델을 기용한다는 것도요. 다만 남성이 전략에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남성 모델로 한 광고까지 추가로 제작하되 여성 광고와는 기간을 두고 투입할 예정입니다. 스타일의 대미를 장식하다, 카피에 맞게 남성과 여성 두 가지 버전으로 비슷하지만 다른 시안으로 진행될 겁니다. 그 이후 이벤트 성으로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분들께 제품을 제공해 체험하는 방식 역시, 시도할 예정입니다.”

“B 안도 마음에 들긴 합니다. 미술관이라는 고풍스러운 장소도 좋고, 그런 방식이 고객들한테 안정적이기도 하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점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공감을 얻고 고객의 기억에 남을 만한 광고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저 역시 의문이 듭니다.”

소현은 아직 숨통이 붙어 제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가뿐히 눌러 주었다. 의문인 부분을 해소해 주고, 피드백으로 받을 건 기록해 두었다. 잘 이어지던 대화가 문득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소현은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었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난 좋은데?”

목소리의 주인은 지한이었다. 입가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며 의자에 깊숙이 기댄다. 뭔가에 빠져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눈이 노곤노곤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사장이 몸을 돌렸다.

“둘 중에 어떤 시안이?”

“여자가 돈 많아서 찔러주는 거.”

지한은 의견을 듣고 싶은 듯 물었다.

“다들 안 꼴립니까?”

엄중한 얼굴들 위로 어수선한 기색이 만연했다. 소현 역시 귀까지 발개질 만큼 적나라한 언사였다. 아들 뻘 되는 남자가 한 말에 다들 웃기도, 울지도 못 하고 있었다. 사장 혼자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을 뿐이다.

“그걸로 한 번 해봅시다.”

움켜쥐고 있던 소현의 손등에서 힘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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