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0)화 (20/86)

20.

김 부장은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다고 소현을 반겼다. 소현은 능숙하게 일 얘기를 했다.

“아깐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부장님과 긴밀한 얘기를 나누지 못 해서요. 기획안은 마음에 드셨나요?”

「그럼, 마음에 들고 말고. 사장님 입에서 바로 결재 떨어진 덕분에 보고할 일도 없는데, 강 대리가 큰 건 하나 해결해 줬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소현의 입에서 옅은 숨결이 번졌다.

“그런데, 아까 그 미팅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 있잖아요.”

부장은 누구? 하더니 이내 아, 하고 말을 늘렸다. 소현은 팔짱을 낀 채 속삭였다.

“워낙 소감이 화끈하셔서 기억에 남는데, 그분이 저에 대해 별다른 언급 없었어요?”

김 부장은 뭔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소현은 초조했다. 저 여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관계라는, 그런 말만 안 했길 바랐다.

「있었지.」

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발표가 인상 깊었다고 하더군.」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 김 부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강 대리야 워낙 뭘 하든 잘 하니까. 좋게 본 모양이야.」

“아……그래요?”

「기획안은 아주 마음에 들었어. 이제 앞으로 더 잘 해야지.」

“그럼요. 촬영 날짜 잡히는 대로 미팅 잡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일 어떤가?」

“내일이요?”

소현은 주말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진행될지, 미리 자세한 내용을 들어야겠네. 우리도 진행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광고에 여자를 앞세우는 건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라서 이만저만 궁금한 게 아니야.」

“……그런가요.”

불안감은 이해한다.

「내일 점심 같이 어떤가?」

“잠시만요…….”

김 부장의 반응도 볼 겸, 소현은 스케줄을 떠올렸다. 어차피 이번 주말은 출근해야 하는 터라 휴식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1시, 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은 식당으로 알아보고 예약한 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봅세.」

“네. 들어가세요.”

소현은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다행히도 지한이 별 얘기 없었나 보다. 그나저나 인상적이었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지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발표가 끝났을 때에도 지한은 좋다는 의견을 과감하게 표출했었다. 소현은 구겨진 눈썹을 손끝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얜 왜 이렇게 조용해.”

핸드폰은 여전히 지한에게 걸려 온 부재중 통화 하나가 전부였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지도 않나.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땐 지한 역시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곧 능숙하게 스며들었고, 뻔뻔하게 미팅을 지켜보았다. 소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나랑 만난 것쯤은 별일 아니라는 거지.”

지금 초조한 것이 소현 혼자인 듯해 오기가 생긴다. 우연히 만난 거로 치자. 세상이 좁아서 마주친 것뿐이다.

소현은 궁금증을 잘라 낸 채 다시 업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내일 만날 김 부장과의 미팅을 위해 한식집을 예약했다.

*

“죄송해요. 다 와갑니다.”

늦는 법이 없던 소현은 통화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계산했는데 바로 전에 있던 미팅이 늦어지는 바람에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하는 전례를 깼다. 하필이면 김 부장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소현은 1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초조해졌다.

58분에 한식집에 도착한 소현은 크게 숨을 내몰아 쉬었다.

“강소현으로, 예약했는데요.”

“네. 8번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소현은 직원의 뒤를 따르며 급히 걷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삐뚤어진 목걸이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미닫이문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직원이 문을 열자 소현이 웃으며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김 부장님…….”

소현의 동공이 멈췄다. 혼자일 거라 생각했던 김 부장 옆으로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좌식 등받이가 반쯤 기울어지도록 허리를 기대고 있던 남자의 고개가 소현이 서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안녕.”

……정지한이다.

“이쪽은 내 친구.”

그 말에 소현이 굳은 눈동자로 김 부장을 쳐다보았다. 김 부장은 어색한 낯으로 웃었다.

“그렇게 됐네. 앉게나.”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소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친구란 괴상한 단어가 고막에서 웅웅 거렸다. 창백한 낯을 한 소현을 이해하며 김 부장은 입맛을 다셨다. 제 생에 한참이나 어린놈과 친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제 회장실에서 지한은 친구를 하자는 말과 함께 악수를 건넸다. 얼떨결에 그 손을 잡은 것이 문제였다. 정 회장은 친구처럼 옆에서 뭐든 알려주라며 김 부장에게 위로 아닌 당부를 했다. 지한이 소파에서 일어섰고 김 부장은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회장실을 나왔다. 아빠뻘 되는 남자와 친구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어 고민하던 사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지한이 말했다.

―현진 기획 강소현 대리, 앞으로 재상하고 미팅 잡히면 나한테 알려요.

그가 말한 친구란 도구였다.

―얼굴 보고 끝나는 자리라도, 빼먹지 말고.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강소현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란 눈빛이 지금도 김 부장을 소리 없이 찔러 대고 있었다. 김 부장은 어이없어 하는 소현을 이해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단 듯이 말했다.

“강 대리, 이렇게 서서 시간 보낼 생각인가?”

“……아닙니다.”

소현은 구두를 벗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맞은편 자리로 간 소현은 지한과 마주 보는 것이 아닌 김 부장과 시선이 맞닿는 자리를 택했다. 어색함과 긴장감이 뒤엉켜 맴돌았다. 김 부장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깼다.

“외국에서 재상 그룹과 교류차 지원 나온 직원인데, 나와 통하는 것이 많아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네.”

“그러세요.”

소현의 말끝이 냉담하게 내려갔다. 회사 부하 직원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도 했다. 거기다 어제 소현과 통화에서 지한의 당부를 되새기느라 함께 나올 거란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었다. 김 부장은 어색함을 지우려 애썼다.

“서로 인사나 하게나.”

“안녕하세요, 현진 기획의 강소현 대리입니다.”

기계적으로 말한 소현이 말끝에 힘을 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실수라는 듯 웃었다.

“아니, 어제도 만났으니 두 번째인 가요?”

“…….”

지한은 말없이 소현을 응시했다. 소현은 지금이라도 저 태연한 남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친구는 또 뭐고. 김 부장한테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며 추궁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한은 느슨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정지한. 악수할까?”

악수는 무슨, 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냐는 원망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미소뿐이었다. 소현은 그 손을 맞잡은 채 말했다.

“이쪽 일에 관심이 많나 봐요. 어제 미팅도 그렇고, 오늘 미팅에도 나오시고.”

내 업무에 관심 좀 끄라는 당부를 담아 손을 꽉 짓눌렀다. 지한은 소현의 손등으로 저를 새기듯이 문지르며 김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건 친구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같은데.”

“어, 음. 그래, 광고에 관심이 많긴 하지. 재상 그룹엔 홍보팀은 있어도 광고 기획이나 제작팀은 없으니 말이야. 직접 제작 과정을 보고 싶다며 이 자리에 나오고 싶어 했네.”

김 부장은 기똥차게 포장해 주었다.

“그러시구나. 그럴 거면 나와 친구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왜 김 부장님과 친구를 하셨어요?”

손을 뗀 지한이 눈으로 웃었다.

“넌 여자로 생각 중이야.”

그 말에 소현의 입가가 살짝 경직됐다. 애써 미소로 화답했다.

“그거, 이상하게 들릴 소지가 있는 말 같은데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라서 그런지 말하면서도 소현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저 입에서 관계의 일부분이 나올까 봐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팅은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소현은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른 채 쉼 없이 얘기했다. 지한에게 일말의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김 부장의 관심을 제게로 끌어오고, 동시에 지한을 격리시키는 방법이었다.

“세트장은 자체 제작으로 8k의 화소를 살릴 수 있는, 장점을 극대화한 연출이 나올 겁니다.”

다행히 지한은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이어 나갔다. 김 부장도 어느 정도 지한을 배제하고 소현의 말에 집중했다. 광고 시안은 기획안을 논할 당시부터 나온 터라 소현은 김 부장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현장을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나쁘진 않구먼. 무엇보다 배우가 중요할 테고.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에이전시 측에서 섭외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우 몸값이 그렇게나 뛰었어?”

“원래 배우가 흥행에 성공하면 그때부터 이미지 파워를 무시할 수 없어서요. 대중에게 친밀도와 접근성, 신뢰감까지 줄 수 있으니 광고계에서도 배우 몸값은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하긴, 장유란 정도면 꽤 괜찮긴 하지. 안 사람도 그 드라마를 봤다더구먼.”

젓가락을 움직이던 지한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장유란?”

그 말에 김 부장이 바늘에 찔린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왜, 왜 그런가? 장유란 배우 마음에 안 드나?”

지한은 젓가락을 내려 두며 부드러운 턱짓 끝에 손을 닦았다.

“걔 말고 다른 애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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