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1)화 (21/86)

21.

어쩐지 얌전히 있는다 싶었다. 소현은 경련하려는 입가를 억누른 채 말했다.

“왜요?”

“별로니까.”

“장유란 배우는 얼마 전,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커리어 우먼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어요. 시청률은 36%를 넘겼고요. 시청자 반응도 장유란 배우가 연기한 소윤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보인 터라 이번 광고에 적합한 배우라고 생각하는데요.”

“성격은 안 그러던데.”

소현의 눈가가 구겨졌다. 제 말에 딴죽을 건다고 생각했는데 성격 얘기가 나오니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지한은 눈썹을 구기더니 이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현이 웃으며 말했다.

“연예계 쪽 사람들과 친한가 봐요.”

“어떨 거 같아.”

소현은 냉철한 시선으로 지한을 살폈다. 외형만 놓고 보건대 그쪽 부류와 미치도록 잘 어울린다. 흥행성이 보장된 얼굴과 체구. 한때 소현도 지한을 보며 광고 한 편을 자체 상상할 정도였다. 거기다 김 부장과 친구란 단어로 엮일 정도로 지한은 선이라는 게 없었다. 화려한 스타성을 갖춘 부류들과 친하지 않은 것이 더 납득하기 어려웠다. 저런 외형이라면 동족에게 끌릴 테니까.

지한은 물로 입안을 축였다. 차갑게 젖은 목소리가 소현에게 향했다.

“그래서 다른 배우는?”

“더더욱 장유란 배우로 하고 싶어지네요.”

소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광고 덕분에 알고 지내는 분들이 있어서요. 아직 장유란 배우와는 인연이 없는 터라 말씀하신 성격 부분, 믿을 수 있는 건가요? 명예훼손으로 문제 될 수 있는 발언이라 걱정되는데요. 제가 기자분에게 확인해 봤을 땐 괜찮았거든요.”

“광고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지한은 소현을 떠나 김 부장을 응시했다. 김 부장은 얼른 답했다.

“이번 광고는 6개월 동안 전투적으로 방송 매체와 모바일 온라인에 홍보될 걸세.”

“반말은 하지 말고.”

“……될 겁니다.”

김 부장을 집어삼킨 예리한 눈매가 소현에게 닿았다.

“그럼 6개월에서 1년.”

마치 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제 얼굴 위로 지나가는 눈빛을 무시하며 말했다.

“그 사이 배우의 사생활 관련된 이슈가 터지면 모델을 교체하거나, 다른 광고로 대체해 제품 이미지엔 손상이 없도록 할 겁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해서 제외시키기엔 그 정도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위험 요소입니다. 제가 이쪽 분야에선 전문가이고요.”

지한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구겨진 눈썹을 문질렀다.

“전문가에게 다시 묻죠. 그래서 다른 배우 후보가 누굽니까?”

“지금 장유란 배우가 가진 이미지는 제품에 잘 맞습니다. 확신이 있으니 추천해 드리는 건데 정지한 씨는 대체 어떤 안목을 가지고 제게 이런 의견을 제시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

지한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소현은 자격도 없으면서 참견하지 말라는 어투를 박아 넣었다. 그래봤자 광고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그냥 미팅에 찾아온 것처럼 제 할 일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심산이겠지.

“광고도 어차피 마케팅이거든.”

지한이 등을 기대자 옆에 앉아 있던 김 부장이 한마디 했다.

“맞다, 자네 하버드 경영학 출신이 아니던가?”

충격을 받은 듯 소현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거짓말이겠지. 소현이 눈가를 좁혔지만 지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어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말을 들었네만.”

광고에 관심을 보인 지한이 기특했는지 정 회장이 김 부장 앞에서 자랑하듯 떠들어 댔었다. 소현의 표정이 점차 더 굳어져 갔다. 김 부장의 말까지 들으니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강 대리도 하버드 출신인데, 둘이 동문이겠군.”

소현의 눈길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내 사생활까지 얘기하다니. 김 부장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단호하던 지한의 눈동자가 젖은 것처럼 녹진했다.

“가만 보니 꼴리는 부분이 또 있었네.”

김 부장이 앉은 등받이로 한쪽 팔을 기댄 지한이 물었다.

“미국에서 살았어?”

나직한 물음에 소현의 숨이 막혔다.

“……그 얘긴 별로 안 하고 싶은데요.”

지한은 웃었다.

“난 듣고 싶은데 해줘. 나도 해줄게.”

부드러운 혀의 움직임이 소현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서로에 대해서 알지 않기로 했는데, 규칙이 깨진 기분이었다.

“부장님. 얘긴 그만하고, 식사부터 하시죠. 다 식겠어요.”

“그래, 그래야지.”

“정지한 씨도 어서 드세요.”

식사 얘기로 넘어가자 지한이 조소하며 고개를 옮겼다. 알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알게 된 터라 소현은 전처럼 지한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소현은 웃으며 지한을 향해 말했다.

“방금 하신 조언은 제가 참고하겠습니다.”

“안 들을 거면서.”

소현은 움찔한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잘 아시네. 그럼 식사마저 할까요?”

물을 머금은 지한이 그걸 느리게 목으로 삼켰다. 소현은 음식을 먹고 맛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김 부장에게 장유란이 안 좋은 이미지로 박히기 전에 뭐라도 떠들어야만 했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상큼한 자몽 차가 나왔다. 입안을 개운하게 환기하던 소현이 미소 지으며 핸드백을 챙겼다.

“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선 소현은 복도를 걸었다. 입구 쪽에 놓인 화장실에 들어가 핸드백을 세면대 옆으로 올려 두고선 거울 속 제 모습을 점검했다. 가방 안에서 가그린을 꺼내 입에 머금은 소현이 눈을 감았다.

청량한 감각이 입안 구석구석을 세척했지만 머릿속은 청소되지 않았다. 세면대에 거품을 뱉은 소현은 크게 심호흡했다. 립스틱을 꺼내 입술 선에 맞춰 차분히 바른 소현은 사납게 뚜껑을 닫았다.

“하아……저걸 진짜.”

기분이 나아지질 않는다.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특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해서 소현의 기가 죽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떠나고 없어질 남자였으니. 문제는 지한이 지금 제 중요한 프로젝트를 두고 분탕질하고 있다는 거다.

소현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으며 호흡했다. 지금 이게 재미있나. 즐거움의 방향을 바꾼 거라면 소현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저를 건드려서 하나도 좋을 것 없다는 걸 어떻게 일깨워 줘야 할까. 고민하던 소현은 김 부장을 떠올렸다. 혼자서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핸드백을 들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문을 나섰다.

복도 끝으로 전봇대를 세워 둔 것인 양 커다란 형체가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슈트 위로 무례함이 점철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 옆을 웅크린 채 지나갔다. 길목을 방해받은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불쾌감이 아닌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소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어갔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넓은 등을 비스듬히 지나칠 때였다. 고개를 돌린 지한이 인상을 구겼다.

“기다렸는데 어딜 내빼.”

소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한의 팔을 잡고 인적이 드문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벽으로 밀어붙이자 쾅 하고 둔탁한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소현이 말을 씹어 내며 뱉었다.

“어제 회사에 만난 건 우연이라고 쳐, 하지만 두 번은 악연이지.”

“…….”

“대체 내 일상에 왜 멋대로 껴들어? 사생활 참견은 안 하기로 했잖아.”

“아니지.”

지한은 벽면에 붙어 끈적한 시선으로 소현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키스하거나 섹스를 해야지 사생활이지.”

여과 없이 나온 말이 소현의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점막을 문지르는 듯 시선의 깊이가 농밀했다.

“해줘?”

학습된 행동처럼 지한의 시선이 입술에 닿자 가슴이 화끈거린다. 소현은 자존심이 상해 말했다.

“그래, 네 말마따나 지금 이 상황이 사생활은 아니지.”

어떻게 보면 공적인 상황이었다. 지한은 외국에서 교류 차원에서 나온 직원이란 이상한 직함을 가지고 김 부장과 함께 미팅 장소에 나온 거였으니. 횟수를 사용해 소현을 부른 것도 아니었다. 따지고 본다면 업무 중에 만난 거다.

“공적인 가운데 계속 사적인 얘길 하는, 몹시 이상한 상황이지.”

하지만 지한이 작정하고 저를 만나려고 이런 일을 꾸몄다는 건 사실일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일개 직원으로 화장실 앞을 기웃거린 게 아니다. 지한은 말없이 웃었다. 소현은 뭐든 상관없었다. 한 가지만 확실하면 된다.

“어차피 넌 곧 떠날 사람이라서 무서울 게 없나 본데, 가기 전에 내 프로젝트 망쳐 놔서 일정에 차질 생기면 가만 안 둬.”

“너 기억 안 나?”

“대체 뭘?”

지한의 눈가가 놀란 것처럼 풀어졌다. 소현은 화를 견뎌 내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똑똑히 들어. 마지막 경고야. 한 번만 더 내 일에 꼬투리 잡고 분탕질 치지 마. 괜히 의견 세워서 내가 깨끗이 닦아 놓은 김 부장님 머릿속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란 소리야. 알겠어?”

말은 그렇게 해도 소현은 귀까지 발개져 있었다. 지한이 손을 들어 올렸다.

“흥분했네, 강 대리.”

소현의 시선이 사납게 들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귓가를 만지작거리는데, 이상하게 그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소현은 노곤하게 풀어지는 지한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끈적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혀로 애무하며 핥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행위가 사적인 관계라고 말해 주지만 반듯한 슈트 차림은 또 다른 괴리감으로 소현에게 다가왔다. 이곳은 침대 위가 아니다.

지한의 시선이 점차 깊어졌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친구 먼저 보낼까.”

“아니.”

“…….”

소현이 숨을 삼키며 연이어 경고했다.

“나에 대해서 김 부장한테 헛소리 흘리기만 해봐.”

“김 부장 좋아해?”

“적어도 지금은.”

클라이언트니까. 싫어도 좋아해야 할 사람이다. 귓가를 주무르던 손이 거세게 빨아 당기는 것처럼 떨어졌다.

“절교해야겠네.”

몸을 돌리는 지한을 향해 소현이 말했다.

“너 마지막 횟수 언제 쓸 거야.”

그 말에 멈춘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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