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2)화 (22/86)

22.

소현은 그 얼굴을 끈질기게 바라보며 추궁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하게 심장이 뛰는 건 아직 남은 숫자 때문일 거다. 소현은 완벽한 정리를 위해 관계의 마지막을 물었다. 그리고 지한은 쉽게 답을 해주었다.

“마지막 날 쓸 거야.”

일주일도 안 남았다. 소현은 비행기 티켓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지금처럼 미팅 자리에 매번 나올 생각이니?”

지한은 더는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걸어갔다. 소현은 그 이유까지 묻고 싶었지만 로비로 이미 나와 있는 김 부장을 보고선 말문이 막혔다. 재빨리 지한을 앞질러 김 부장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안에 계시지 왜 벌써 나오셨어요?”

“그만 가 봐야지.”

“그런가요. 식사 시간이 꽤 길었죠?”

그 모습을 본 지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현은 핸드백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 계산했네.”

“부장님께서요?”

“내가 했어요.”

지한은 소현의 옆에 서며 카운터에 놓인 바구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껍질을 뜯은 지한의 입으로 사과 맛 알맹이가 들어갔다. 소현이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미팅은 저희 회사에서 계산하는 건데요. 잘 모르시나 봐요.”

“한 번 해본 적 있어서 버릇이 됐나. 미안해.”

그 말에 소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한 번 해봤다니……설마. 그때 청담동 가라오케에서 계산했던 것도 지한이었나. 지한은 입안으로 둥그런 사탕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과즙을 삼켰다.

“가죠. 데려다줄게요.”

소현은 냉정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차 가져왔습니다. 김 부장님은 어떻게 가시나요?”

“난 저 친구와 같이 타고 왔네.”

뒤돌아서 있는 지한이 소현의 눈에 박혀 왔다. 복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뒷모습과 겹쳐진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지한은 소현을 기다렸었다. 소현의 시선이 흔들리다 옆으로 옮겨졌다. 원치 않는 사실과 마주한 것처럼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잔상을 지우듯이 화사하게 웃은 소현이 김 부장을 입구로 안내했다.

“식사는 어떠셨어요?”

“괜찮았네.”

“다행이에요.”

김 부장을 보며 걷던 소현이 따라오는 지한을 의식하지 않으려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다음에는 더 괜찮은 곳으로 모실…….”

그보다 먼저 바깥쪽에서 사람이 들어왔다. 놀란 소현이 뒷걸음질 쳤지만 들이닥치는 몸이 더 빨랐다.

“읏.”

부딪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센 힘이 소현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다리가 휘청이다 단단한 가슴팍에 기대고서야 중심을 잡았다.

“눈 똑바로 달고 다닙시다.”

살벌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소현이 고개를 들자 험악하게 구겨진 지한의 눈썹이 보였다. 제게 한 말이 아니었다. 지한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들자 소현과 부딪칠 뻔한 남자가 서둘러 사과했다.

“아, 죄송합…….”

그는 소현을 보고선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소현 역시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나요?”

이곳이 김성민과 자주 왔던 음식점이라는 것을.

고맙게도 연인 사이였던 성민은 소현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한 감정을 수려한 안면 가득히 띄워 놓았다. 깊은 눈동자가 일렁이며 소현을 보고선 시선을 들어 지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사이를 엮는 이상한 눈빛이었다. 소현은 뒤늦게 지한이 제 어깨를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손으로 그걸 빼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잘 못 본 것도 있는데요.”

“……그런가요.”

그렇게 피했는데, 마주치고야 말았다. 소현은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잡으며 웃었다.

“먼저 지나가세요.”

“그럼……실례하겠습니다.”

성민은 셔츠 소매에 감춰진 시계를 들춰 보며 걸음을 떼었다. 그건 성민이 어색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아직도 저런 걸 기억할 정도로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소현은 등 뒤로 질척한 시선이 닿는 것만 같았다. 괜히 의식하는 거겠지. 소현이 발을 떼려고 하자 낮은 목소리가 흘러왔다.

“뭘 저렇게 쳐다봐.”

소현은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사냥감을 주시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의 끝에 놓인 성민과 소현의 눈이 또 마주쳤다. 소현을 바라보며 복도로 사라지자 긴장감이 한층 더 거세졌다. 소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성민에게 고정된 지한의 관심을 끌어내렸다.

“그만 가요.”

살벌함이 가득한 시선이 내려왔다.

“안 부딪쳤어?”

“네.”

근데 왜 자꾸 반말이야. 소현은 인상을 살짝 구기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김 부장과 인사를 나눈 소현은 그가 타고 갈 차까지 배웅을 나섰다. 수십 대의 차가 나열된 지하 주차장에서 독보적인 자태를 뽐내는 건 주인을 닮았다. 소현은 지한의 손짓에 부름을 받아 시동이 걸리는 차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새빨간 매력적인 보디가 시선을 압도하고 뒤쪽으론 짙은 블랙이 이미지를 반전시킨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바퀴 휠은 제련된 짐승의 이빨 같았다.

회사 앞에서 보았을 땐 지한 때문에 너무 놀라 감상문조차 날렸었는데, 부가티 시론을 실제로 두 번이나 목격할 줄이야. 소현은 조수석 문을 여는 김 부장을 향해 미소 지었다.

“김 부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 대리도 수고 하게나.”

문이 닫히자 운전석으로 걸어간 지한이 소현을 쳐다보았다. 소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한이 팔을 들어 루프 패널에 기대었다.

“나한테도 인사해야지. 강 대리.”

불만족스럽다는 듯 손가락에 걸린 차 키를 만지작거린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게 끝?”

지한이 눈가를 좁히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소현은 앞 창문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차체가 워낙 낮아 김 부장의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거다. 방음까지 완벽한지는 모르겠지만. 소현은 지한의 앞에 걸어가 웃어 주었다.

“안전 운전하세요.”

“줄 게 있어.”

“뭔데?”

소현도 반말이 나와 버렸다. 지한은 웃으며 소현의 입술을 주시했다. 거기에 소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화장실에서 봤을 땐 아무것도 안 묻어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끝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도드라진 점이 만져졌다. 지한의 시선이 진해졌다.

“거기 말고.”

대체 뭐야. 소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지한의 허리가 앞으로 기울였다. 놀란 소현이 몸이 주춤했다. 비스듬히 틀어진 고개가 소현의 얼굴과 가까워진다.

“잠…….”

소현이 말을 달싹이자 뜨거운 숨결이 입술 앞에 멈췄다. 설마, 여기서 키스를 할까. 순간 한 뼘 더 다가온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점막에 닿았다. 소현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벌어진 입술 안으로 숨결과 함께 무언가가 입안으로 넘어왔다. 움찔하던 소현이 눈을 치떴다. 지한은 침대에서 몸을 맞댄 것처럼 탁해진 눈동자로 소현을 보았다.

“네 입 크기에 맞춰서 빨았지.”

소현은 입술을 다물고 제 입에 들어온 형체를 확인했다. 달큼한 사과 맛이 혀에 감겼다.

“마저 먹어.”

지한은 할 일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 운전석 문을 열었다. 소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차 선을 빠져나간 차가 빠르게 붉은빛을 발산하며 사라졌다. 소현은 외마디 말을 토해 냈다.

“……어이없어.”

말할 때마다 혀에서 사탕이 눌어붙었다. 말을 많이 하는 터라 입안을 가득 채우는 걸 먹지 않는 소현에게 그리 거슬리지 않을 크기였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금, 달콤한 맛이 한결 두통을 중화해 주었다. 사라지고 난 뒤엔 진한 여운을 남길 거다.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제 차에 올라탔다.

“하아…….”

운전석 시트에 머리를 댄 소현은 눈을 감았다.

“왜 하필 거기서 김성민을 만나고 난리야.”

성민은 W 자동차 영업부 팀장이었다. 지금 소현이 제 몸처럼 끌고 다니는 차도 그의 흔적 중 하나였다.

기존에 끌던 차를 처분하고 새로운 차를 물색하려고 영업장에 방문했다가 친절한 미소와 고객 접대성에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게 시작이었다. 소현의 직업이 이러다 보니 제 마음에 드는 남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성민은 신기하게 까다로운 소현의 평가 목록을 우수한 점수로 기록해 나갔다.

차를 픽업하던 날, 직접 제 집 앞을 방문한 성민에게 소현이 차 키를 달라며 손을 내밀 때였다.

―죄송하지만 저희 차량엔 드라이브 서비스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네?

소현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서비스에 인상을 구겼다. 성민이 웃으며 말했다.

―고객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 어때요?

차 키를 가지고서 작업을 걸던 게 화근이었다. 소현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유혹이었다. 때마침 전 애인과도 끔찍하게 이별해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다.

―저녁도 사면 서비스 받아들일게요.

―안 그래도 살 예정이었습니다. 타시죠.

남자는 남자로 치유해야지. 소현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저녁 식사를 했고, 한강까지 가게 되었다. 일렁이는 수면을 보면서 키스를 하고 몇 번의 만남 끝에 연인 사이가 되었다.

―본사 직원이라고요?

―네.

뒤늦게 알게 된 거지만 업무차 영업장을 방문했다가 소현을 보고 첫눈에 반해 제가 직접 나섰던 거였다. 소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성민이 미소로 화답했다.

―너무 티 났나?

아니, 전혀 몰랐었다. 알게 된 후엔 깜찍하다고 생각했었다.

―소현아. 우리 결혼할래?

적어도 결혼 얘길 꺼내기 전까진.

소현은 회상에 잠긴 머리를 털어 내며 회사로 돌아가 시안을 검토했다. 눈 밑이 퀭한 팀원들에게 김 부장을 만나면서 얻어 온 결과를 알려주었다.

“디스플레이 모델, 무조건 장유란으로 가요.”

감상에 젖기엔 삶은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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