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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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일요일 주말이라 외식을 나온 사람들로 가게 안이 북적였다. 메뉴를 고르던 한 테이블에선 1인분을 제외하고 주문을 마쳤다. 오래전 교복을 입던 여자들은 이제 성숙해져 더는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다. 대신해 고상한 말투로 투덜거릴 뿐이다.
“소현이 얘는 일찍 오면 죽는 병에 걸렸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지각생은 늘 소현이었다. 토요일에 보자고 했던 약속도 출근해야 한다는 소현 때문에 미뤄진 터라 늦게라도 얼굴 비추는 걸 감지덕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할 때 약속 시각을 엄격하게 지키지만 편한 친구들 사이에선 만년 지각생이었다.
그때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주인공은 급하게 실내에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정은 손을 들어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소현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늦잠 잤어.”
“그래 보인다. 머리는 감고 나왔니?”
“주말에 머리를 왜 감아?”
소현은 인상을 쓰며 의자에 앉았다. 평소엔 전투적으로 외향을 가꾸는 소현도 업무가 없는 날엔 평범한 여자였다. 늘어지고 편히 쉬고 싶고, 그 의사가 고스란히 표출된 옷은 가벼운 청바지에 재킷이 전부였다. 친한 친구들과 수다를 떨 입만 장착하고선 소현은 메뉴판을 들었다.
“다들 메뉴 하나씩 시켰어?”
“아니, 메인으로 할 거 하나랑 나머진 각자.”
“거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 나 정말 배고파.”
“아침 안 먹었어?”
“어제 새벽 4시에 들어왔어.”
다들 살인적인 소현의 스케줄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먹으면 살찔 텐데. 그런 충고조차 소현의 앞에선 나오지 않는다. 체력이 곧 실력이라 소현은 바쁜 와중에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독종이라고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소현은 거기에 할 말이 있었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요즘 운동 안 하면 몸이 더 힘들어.”
“네가 체력을 갈고 갈다가 이제 한계가 와서 그래. 맨날 술 마시지, 가끔 담배도 하지. 너 술은 업무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담배는 안 끊어?”
“무슨 소리야. 그거 오래 하려고 운동하는 건데.”
“얘랑은 말이 안 통한다. 그치?”
하정이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혀를 차자 연수가 말했다.
“소현이 쟨 고등학교 때도 그랬잖아.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했던 거 기억해? 자기 1등 못하면 죽는다고 맨날 연습했던 거. 결국 1등 했잖아.”
소현이 하품을 길게 하며 얌전히 앉아 있는 지희를 보았다.
“지희 넌 오랜만에 보니까 전보다 얼굴이 좋아진 거 같아.”
“아, 그래? 남편이랑 요즘 필라테스 다녀서 그런가.”
“같이?”
“응. 회사 끝나면 저녁 타임에. 커플들이 같이 하는 거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어서 그거 하고 있어.”
소현은 신기한 듯 입을 벌렸다.
“신혼 제대로 즐기고 있구나.”
넷 중에 홀로 결혼한 지희는 이제 신혼 4개월 차였다. 지희가 부끄럽다는 듯 웃자 하정이 어떤 포즈로 하냐며 앙큼한 질문을 던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며 소현은 맥주를 주문했다.
“넌 음식도 안 나왔는데 술이야?”
“입가심이야.”
소현이 병맥주를 입가에 대고 기울이자 연수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외국 나가서 순 이상한 것만 배워왔다니까?”
소현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을 가면서 8년가량 부재가 있었다. 그 사이 관계를 유지하던 셋은 소현이 한국에 들어오기 무섭게 모임에 끼워 넣었다. 솔직히 말해 소현은 그녀들이 고맙기도 하고 무엇보다 즐거웠다. 고등학교 때 순수하게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친해진 관계였다.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이렇게 만나 허심탄회하게 제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소현에겐 또 다른 휴식이었다.
“넌 요즘 뭐하고 지내?”
그런 친구들에게도 소현이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일에, 일에, 또 일이지.”
예를 들어 처음 본 남자와 세 번만 만나기로 했다든가, 애인과 사랑도 하지만 육체적 관계로 피로를 풀고 있다는 것들. 제 사생활은 음지에 파묻혀 있을 때 더 아름답고 가치 있었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받고 평가받는 순간부터 더는 즐길 수 없게 되니까.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던 맥주가 칼칼하게 속을 적신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상태지. 저와 사생활을 공유한 남자가 몇 번씩이고 수면 위로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소현이라면 당연히 외부에 노출되기 전에 끝내는 게 맞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기던 소현은 맥주병을 기울였다. 목으로 넘어간 액체가 속을 뜨겁게 달궈 놓았다.
소현은 식사 후 버릇처럼 화장실을 찾았다. 남은 친구들은 소현의 생명과 같은 핸드폰을 발견하고선 의아해했다.
“쟤 웬일로 핸드폰 두고 갔어?”
“깜빡했나 보지. 쟤도 정신없을 만도 해.”
“소현이 보면 광고 회사들이 하나같이 사람 쥐어짜내서 운영되는 곳 같다니까. 맨날 전화 오고, 주말도 없이 일하잖아.”
“그러는 사이에 또 전화 왔네.”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동하는 소현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뭔 부장, 뭔 과장, 뭔 팀장.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이는 것과 달리 이번 발신자는 이름이 전부였다.
“어. 이 사람.”
하정이 액정을 들여다보며 아는 체했다. 낯익은 이름을 본 그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장난기가 가득했다.
“우리 장난 좀 칠까?”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정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선 귓가에 가져다 댔다.
「소현아.」
“…….”
진지한 목소리에 하정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냈다. 두 달 전에 처음 만나 식사를 가진 적 있던 남자는 다정하면서 정중했던 모습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나중에 소현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미안한데 잠깐 얘기 좀 하자.」
“…….”
「잠깐이면 돼.」
중후한 음성이 한숨과 뒤섞여 애절하게 변했다. 하정은 의아해하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말 안 할 거니.」
숨이 짙어지자 결국 하정이 조용히 얘길 꺼내 들었다.
“저……죄송해요. 소현이가 잠깐 어딜 가서 제가 대신 전화받았어요.”
「아.」
나직하게 말한 상대방이 금세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소현이 친구분이죠?」
“네, 김하정이라고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요.”
「합니다. 하정 씨.」
하정은 입을 동그랗게 말며 친구들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오라고 해, 오라고. 연수가 입 모양으로 열심히 의사를 표출했다.
“소현이랑 저희 지금 같이 있는데 오실래요?”
「그럼요.」
상대의 목소리가 진해졌다.
「거기가 어딘가요?」
잘 되었다는 듯 하정은 가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끊자 지희가 물었다.
“뭐라고 해?”
“당연히 온다고 하지. 목소리가 아주 애정이 뚝뚝 떨어지더라.”
“근데 소현이 얘도 참, 애인한테 정 없이 김성민이 뭐냐. 이름만 저장해 놓은 것 좀 봐.”
“나 뭐?”
소현이 물기에 차가워진 손으로 의자를 빼며 앉았다. 하정은 못 쓰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애인한테 자기, 여보, 이런 귀여운 애칭 많은데 왜 이렇게 애가 무미건조해?”
“내가 애인이 어디 있어?”
그 말에 테이블이 싸해졌다. 소현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선 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목록을 들어가자 성민의 이름이 보였다. 소현이 말을 삼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연수가 물었다.
“뭐야……너 헤어졌어?”
“……아니, 아.”
짧은 연애만 한다며 친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 헤어진 이후에 말을 안 했었다. 수신차단으로 돌려놓지 않았던 건 실수였다. 매달리던 것도 한마디 따끔하게 한 거로 끝이었기에 안일했다. 소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헤어졌어.”
“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여기 오라고 했는데.”
만나는 사이인 줄 알고 전화를 받은 거라며 친구들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소현은 쓰게 입안을 굴렸다. 오래 남자 못 만나는 저를 탓해야지. 괜히 이런 일로 오랜만에 이뤄진 모임이 망치길 원치 않았다. 소현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지 마.”
「왜. 가는 중이야.」
소현은 차분히 말했다.
“친구들이 실수했어. 올 자리가 아니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잖아.”
「할 얘기가 있어.」
“할 거면 지금 해.”
「만나서 하자.」
“안 만난다고.”
「소현아.」
“왜. 혹시 어제 나 본 것 때문에 그래? 그래서 또 흔들리고 붙잡고 싶어?”
소현은 아무렇게나 떠들어댔다.
「그래. 그러니까 15분이만 기다려.」
“…….”
자존심도 없는지 순순히 인정한다. 소현의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운전하는 중이라며 전화가 끊겼다. 소현은 허무하게 핸드폰을 내렸다.
“얘들아. 미안한데 카페 가서 수다는 못 떨겠다.”
“만나려고?”
던지다시피 핸드폰을 테이블로 내려놓은 소현은 팔짱 꼈다. 친구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딱히 도움을 줄 만한 일을 찾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우리가 하고 갈게.”
“……근처에 있을 테니까 열받으면 와.”
소현은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만나서 할 얘기가 뭐가 있을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손을 펼쳐 뻐근해진 관자놀이와 눈가를 덮었다.
연애를 한 게 6개월. 소현치고는 꽤 긴 연애 상대였다. 그건 성민의 배려 덕분이었다. 배려가 아니라, 얌전한 척이었다.
그는 순한 양의 탈을 쓰고서 덤벼든 한 마리의 늑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