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4)화 (24/86)

24.

소현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했었는데 저도 마찬가지라며 순순히 웃던 얼굴이 이제 와 생각해보면 가증스러웠다. 마음에 짐을 덜어내고 성민과 만났던 소현은 그가 무척 좋았었다.

제 회사 일에 일절 참견하지 않고 시간도 소현의 업무가 끝난 뒤에 이뤄졌다. 밤일도 충실히 이뤄져 왔었고, 쾌감에 도달하기엔 미지근했지만 끝까지 소현을 만족시켜주려고 노력은 했었다. 포인트가 달랐을 뿐, 그걸 제외하고서도 피곤하지 않은 남자였다.

그런데 결혼을 얘기했다. 자신이 장남이라는 말도 연이어 나왔다. 동생이 결혼할 여자가 생겼는데, 부모님께서 제가 먼저 하길 원한다는 이상한 말이었다. 소현은 잠시 넋이 나갔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때 성민의 본색이 드러났다.

―우리 지금까지 잘 만나왔으니 자연스러운 얘기 아닌가?

소현에겐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연애 초반에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해 두었던 건 그럴 생각이 아예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소현은 연애만 할 생각이었고, 성민은 아니었다. 소현과 만나면서 재고 따지며 결혼을 측정해 왔다. 그는 애당초 결혼이 급한 장남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지금처럼 네게 맞춰 줄 수 있어. 다 이해해 주고, 받아 줄게. 근데 일은 생각해보자.

소현은 그때부터 표정 관리가 안 되었던 것 같다.

―아이 먼저 갖자. 난 너 닮은 아이 빨리 보고 싶어.

배신감도 아닌, 제게 왜 이런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일이 좋아.

―매일 피곤해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죽으려고 하잖아.

―그만큼 바쁜 일이니까.

―네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

―뭐?

―편하게 쉬고, 취미 생활 가지면서 여유롭게 생활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렇게 해줄게. 집 문제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명의로 된 아파트 작년에 사둔 것도 있으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소현은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 그만 만나자.

단호한 한마디에 성민은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 못 했다는 얼굴이라 소현은 거기에 일침을 박았다.

―난 아직 너보단 내 일이 더 좋아.

그리고 당연하게 그는 붙잡았었다. 고백을 하는 자리에서 차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었나 보다. 소현은 그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니?

―뭘. 앉아서 얘기해.

낮은 음성이 무섭지도 않았다. 소현은 헛숨을 내뱉으며 말을 박았다.

―처음부터 나 보면서 결혼할 생각이었니?

치열이 떨렸다. 아니길 바랐지만 성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생각 안 할 수 있지?

그제야 소현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젠 내 옆에 편히 있어.

즐겁게 연애하고 싶어 만났을 뿐인데, 소현은 냉담히 성민에게 말했다.

―다신 보지 말자.

날 구워삶아 먹을 생각이었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먹히지 않았으니까.

“소현아.”

손으로 눈가를 덮고 있던 소현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거기엔 단정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고개 아프니까 앉아.”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소현은 성민에게 자리를 권했다. 성민은 반대편 의자에 착석했다. 메뉴판을 가져온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뭘 마실 건지 눈짓하기에 소현은 맥주를 시켰다.

“낮부터 술 마시면 속 안 좋아.”

“신경 꺼. 내 몸이야.”

성민은 재킷을 벗으며 잠시 웃었다.

“어떻게 그래. 속이 타는 거 같은데.”

소현의 눈가가 구겨졌다. 벗은 외투를 의자에 걸어두며 성민이 테이블 위로 깍지 꼈다. 쉬는 주말에도 시계는 항상 차고 다니는 남자다. 한눈에 봐도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는 느낌을 주는 외형이었다. 서른다섯 살에 팀장이란 직함은 나쁘지 않았고 집안도 유복했다. 너무 완벽한 터라 소현은 거기에 함부로 끼고 싶지 않았다.

“나랑 할 얘기가 뭐야.”

“얼굴 좋아 보인다.”

“내 얼굴은 항상 좋았어.”

성민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소현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으려 더욱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나 만나러 나올 시간에 차라리 선을 봐서 목적에 맞는 여자와 결혼해. 그게 더 유익하잖아.”

“결혼 안 하기로 했어.”

성민은 핏대가 도드라진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 앞으로 직원이 가져온 커피 잔이 놓였다. 소현의 앞엔 맥주병을 새롭게 놓아주고선 직원이 물러서자 성민이 입을 열었다.

“동생 먼저 식 올리기로 했다고.”

“그래? 장남이 먼저 해야 하는 건데.”

소현은 병 입구를 막은 냅킨을 돌리며 구겨뜨렸다. 일그러진 휴지조각이 성민의 눈에 걸렸다.

“너랑 헤어지고 나서 내 입장만 앞세운 건 아닌가 고민해봤어.”

“그 생각은 연애 초반 때 했어야지.”

“그걸 요즘 느꼈어.”

뼈대가 큼직한 손이 치밀하게 엮이며 교차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고, 놓치면 안 된다고.”

소현은 그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오늘 만나자는 이유야?”

“결혼 생각 접었어. 설득하기 힘들었지만 부모님께 의사 전달했으니 걸릴 거 이제 없을 거야.”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만 같아 소현의 시선이 올라섰다.

“그래서?”

“다시 연애하자.”

“싫어.”

단호한 소현의 대답에 성민이 입술 끝을 당겼다.

“왜 싫어. 나만 한 남자도 없었잖아.”

소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에 성민의 눈빛이 진해졌다. 양의 탈을 써서라도 소현과 만남을 원했던 것만큼 그는 세심하게 소현을 관찰해 왔었다.

“나만큼 너한테 잘 맞춰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동안 이뤄져 왔던 소현의 연애가 짧았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까다롭고 예민한 직업 때문인지 제 사생활에선 피곤해지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일이 전부인 여자를 반겨주며 이해로 보듬어 주는 남자 역시 극히 드물었다.

“감정이.”

손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진득해졌다.

“정리가 안 되니까 이러는 거잖아. 소현아.”

소현은 여전히 탐스러웠다. 긴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내려와 가슴을 두들겼고 아무런 옷을 주워 입어도 운동으로 단련된 곡선은 감춰지지 않았다. 상대를 삼킬 듯한 까만 눈동자도 매력을 발산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입술 옆에 있는 점이 속삭였던 말들을 생각하면서 소현의 감정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순간순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성민은 속으로 인내했었다. 왜 자꾸 내 주변에 돌아다녀. 왜 내 눈에 걸려.

“그건 성민 씨 감정이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 같네. 얘기 더 해 봤자 답 안 나올 거 같으니 그만하자.”

“너 남자 생겼지.”

소현이 놀란 눈으로 성민을 쳐다보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이렇게 빨리 정리할 순 없지.”

곧 다시 가질 생각이었는데. 소현의 옆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내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인데?”

소현은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너 나한테 그 정도 아니야. 정리는 이미 진작했던 거였어.”

“너도 쌓였을 거 아니야.”

“……뭐?”

“넌 내가 잘 알아.”

소현은 짧게 숨을 토해 냈다.

“보나 마나 외로워서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겠지. 아닌가?”

가슴까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성민은 수컷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던 얼굴을 떠올렸다. 우두머리를 차지하는 이목구비와 근육으로 이뤄진 큰 몸집이 같은 남자가 봐도 자극적이었다.

“그때 라운지 바에서 봤는데, 이젠 그런 남자도 건드리고 다녀?”

견고하던 소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민은 느리게 웃으며 말했다.

“나쁜 짓 하다가 들킨 표정이네.”

호텔 바에서 소현의 뒷모습만 보고 그녀임을 확신했었다. 성민은 그날 소현의 어깨를 감싼 남자를 따라가 붙잡고 싶은 걸 억누르느라 속이 진물 날 정도였다.

“아무나 만나고 다니다가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어제 식당에서도 당장에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소현을 데려가고 싶은 욕구가 안에서 끓어넘쳤었다. 소현은 얼어붙은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무슨 소리야.”

“내 앞에선 거짓말 안 해도 돼. 그날도 호텔 바에서 술 마시고 방에 올라갔겠지.”

“말 조심해.”

“그런 너를 이해해 준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나와 헤어지고 적적했을 테니까.”

성민은 이해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애 만나고 다니다가 괜히 소문만 나빠지지.”

소현은 눈앞이 흐릿해졌다. 누군가가 제 머리를 강한 둔기로 내리친 것만 같았다. 남자를 건드리고 다닌다는 말이 충격을 더했다.

자신이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일까. 왜 다 끝이 난 사이에서 이런 참견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현은 혐오하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지금 막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더는 보기 싫어졌는데 어쩌지.”

“정은 다시 붙이면 되지.”

“말이 쉽지, 지금. 나한테 그런 남자 건드리고 다니냐고 비난했으면서, 어떻게…….”

“넌 몸 정에 약하잖아.”

소현은 저도 모르게 맥주병을 움켜쥐었다.

“그런 네 성향 다 알고서 이해해 주는 남자가 나 말고 누가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에 비해 성민은 소현을 모두 간파한 듯한 태도였다.

소현은 유난히 단둘이 있을 때 스킨십을 좋아했고, 침대에선 거침없이 제 자신을 벗어던지곤 했다. 그랬기에 다른 남자와 호텔 바에서 함께 있는 것이 순수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 때문에 결혼까지 포기했는데 그런 부분쯤이야 얼마든지 네게 맞춰 줄 수 있어.”

여유로운 표정과 태도에서 소현은 이가 갈렸다.

“즐기고 재미있는 거, 나랑 하자고.”

“나 이제 너랑 안 만난다고 말했을 텐데.”

“나랑 다시 자면 생각이 달라질걸.”

소현은 피가 서늘하게 굳었다. 성민은 소매를 들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르지만 지금 호텔로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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