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소현이 손에 힘을 주며 의자를 뒤로 뺐다. 좋은 신호로 받아들인 성민이 자리에 일어서려던 찰나, 머리 위로 콸콸 거리며 무언가가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성민의 얼굴에 타고 액체가 무차별하게 흘러내렸다.
소현은 기울였던 맥주병을 세워 제 입가로 가져갔다. 남은 것을 밀어 넣자 차가웠던 속이 다시금 뜨겁게 불타올랐다.
“맛이 구리네.”
올라선 입술 끝으로 조소가 실렸다.
“더는 못 먹어 주겠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을 성민의 얼굴에 털어 낸 소현이 병을 세워 두고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린 성민이 냅킨을 주워 들고서 일어나 소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있는 힘껏 소현은 몸을 돌리며 뺨을 쳤다. 찢어지는 파열음이 주변 일대에 번졌다. 사람들과 직원의 눈이 커지며 테이블로 일제히 이목이 집중됐다. 소현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 놔, 개새끼야.”
소현은 글자를 씹어뱉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역겨우니까.”
한때라도 이런 남자에게 제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 한심하고 치가 떨렸다. 과거를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육체적 관계를 역으로 저를 위협하는 칼날처럼 사용했다. 자신은 그게 전부인 여자처럼.
가게를 벗어난 소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섹스는 사랑과 별개로 소현에게 받아들여졌지만 적어도 성민은 제가 한때 그 두 가지로 아껴 주었던 남자였다.
사랑했으니 섹스했고, 섹스하면서도 사랑을 느꼈다.
그 충만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비수처럼 소현에게 다가와 꽂혔다. 몸을 줄 테니까 제게 오라고. 고작 다시 만난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게 전부였을까.
나는 그 남자와 만나면서 대체 뭘 나눴던 거지.
소현은 길 한가운데 멈춰 서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슴이 욱신거리면서 머리가 흐릿해졌다.
“하……진짜, 못 쓰겠네.”
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재빨리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지만 소용없었다.
자꾸만 흐려져 시야에 어떤 것을 담아도 명확하지 않았다. 소현은 계속 눈을 깜빡거리며 사물을 보려 애썼다.
턱 끝으로 무언가가 매달린 것이 느껴졌다. 무겁고, 한심했다. 손등으로 쓸어내듯 닦아내자 물기가 번졌다.
“오늘 정말, 기분이 별로네.”
소현은 길가로 가 택시를 잡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에 남아 있던 성민의 번호를 수신 차단하고, 깨끗하게 지웠다.
이젠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
“뭘 그렇게 봐?”
민준의 물음에 소파에 머리를 대고 있던 지한은 핸드폰을 두들겼다. 뭔가를 입력하는 것도 아닌 액정을 건드리는, 단편적인 행동이었다. 지한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낮게 물었다.
“전화할까, 말까.”
민준은 예상치 못한 말에 주춤하더니 말했다.
“아. 강소현 씨한테?”
지한이 고개를 까딱였다. 민준은 그 표정을 살피며 내심 안도했다. 산화 기업의 아들이 지한에게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가 된통 당했단 얘긴 무리들 사이에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 사건 이후로 모두가 그녀를 ‘십만 원’이 아닌 ‘강소현 씨’로 부르기로 내정되었다.
“한 번 해봐. 주말이라서 쉴 거 아니야.”
지한은 삐뚜름하게 구겨진 눈썹을 문질렀다. 고작 전화 하나에 고민이 너무 길다. 그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거라 민준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해서 기분 안 좋으면.”
지한이 차갑게 물었다.
“네가 책임질 거야?”
민준은 웃음으로 회피했다. 그 여자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알고 제가 기분까지 맞춘단 말인가. 지한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핸드폰을 내려 두며 눈을 감았다.
“네가 이런 고민하니까 조금 낯설다. 너 원래 하고 싶으면 하잖아.”
그 말에 무섭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한이 핸드폰을 들었다.
이게 뭐라고 겁을 내지. 지한은 과감히 소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귓바퀴를 타고 들어왔다. 지한은 술잔을 기울여 타는듯한 갈증을 해소했다. 막상 걸어보니 안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눈썹이 구겨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입가에 잔을 댄 지한은 멈추며 말했다.
“나야.”
「너인 거 알아.」
픽하고 웃은 지한이 부드럽게 유리잔을 입술에 대었다.
“어딘데?”
「택시.」
잔으로 목소리가 울려 닿았다. 이상함을 느낀 지한이 손목을 아래로 기울였다.
“목소리가 왜 그래.”
소현은 대답이 없었다. 지한은 핸드폰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기다렸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허스키한 음성이 비라도 맞은 것인 양 축축하게 젖었다. 지한은 주변을 살폈다. 창문이 없어 바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한이 일어서자 수화기 너머로 소현이 말했다.
「내가 뭘?」
“목소리.”
문을 열고 나선 지한은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룸을 나오자 호텔 라운지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영업시간이 아니었지만 지한을 위해 오픈한 내부는 한적한 대낮의 여유로 빛이 만개해 있었다. 지한은 빌딩 사이로 반사된 날카로운 빛을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다시 말해 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런데 소현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뭔가를 뒤척거리는지 소음이 뒤섞였다. 소현이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나 지금 전화받기 조금 그러니까 나중에 해. 끊는다.」
“강소현.”
「여기서 세워 주시면 돼요.」
마지막 소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거였다. 그대로 통화는 끝이 났다. 지한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대자 고객의 전화가 꺼져 있단 기계적인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한은 느리게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었다.
“뭐라는 거야.”
다시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안에 있던 민준과 성우가 반쯤 풀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
지한은 턱을 맞물리며 소파에 앉았다. 계속 전화해도 사정은 똑같았다. 꽉 핸드폰을 움켜쥔 지한은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뭔가가 있는데……생각을 되짚던 지한은 온몸이 젖은 듯한 찝찝한 감각을 느꼈다. 소현의 목소리가 제 귀로 들어와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지한은 전화 목록을 뒤적이고선 다리를 교차했다.
영문을 알지 못한 민준이 성우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김 부장님.”
낮게 말하자 김 부장이 인사를 건네 왔다. 지한은 눈가를 쓸어내리며 다리 위로 손을 올려두 었다.
“지금 당장 미팅 좀 잡아 봐요.”
「지금? 누구 말인가?」
“누구겠습니까?”
살벌하게 목소리가 갈라지며 나갔다. 평온한 주말을 보내던 김 부장은 때아닌 불호령에 잠시 자리를 이동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선 특유의 미소로 상황을 대처했다.
「지금 낚시를 나와서 말일세.」
“반말은 하지 말고.”
「낚시를, 나와서 말입니다. 주말이라 강 대리도 쉴 텐데 미팅을 어떻게 잡나.」
“왜 못 잡습니까.”
지한은 담배를 하나 빼 입가에 대었다.
“낚시로 물고기는 잘만 잡으면서.”
필터를 물자 옆에 있던 민준이 라이터 불꽃을 세웠다. 그곳으로 고개를 기울인 지한이 옮겨진 불길을 태우며 연기를 뱉었다. 김 부장은 진땀을 흘리며 지한을 회유했다.
「내일, 내일은 한 번 해보겠네. 아니,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불러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겁니다.」
“내일?”
「월요일이니까, 내일 봅시다.」
지한은 길게 연기를 뱉으며 필터 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나는 지금 강소현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개 같은 기분이 든단 말입니다.”
차가운 어조에 김 부장은 말을 하지 못했다. 눈동자를 옮기며 뇌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내가 이 기분, 내일까지 안고 가야 합니까?”
지한이 짜증스럽게 묻자 김 부장이 얼른 답했다.
「강 대리에게 전화해보겠습니다.」
“안 받는데 어쩌지.”
「내 전화는 받을 걸세.」
“전화를 아예 꺼놨다고.”
「그럼, 방법이 없네……만.」
지한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진짜 친구랑 절교해야겠네.”
그 한마디가 가진 힘이 무시무시했다. 지한이 치열에 일그러진 필터를 입술에 문질렀다.
“무능력해서 별로야.”
실망감이 달라붙은 목소리가 까슬했다. 김 부장은 최선이자 최후의 방법인 것처럼 내일을 반복해댔다. 열성적인 태도가 지한의 불쾌감을 손이 발이 되도록 닦았다. 지한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좋아, 내일. 시간은 되도록 빨리.”
「알겠네.」
전화를 종료한 지한은 핸드폰을 테이블로 버려두었다. 퀴퀴한 연기가 금세 내부를 채워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소파에 기대어 있던 지한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회색빛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뭘 봐.”
그 말에 민준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냥. 심각한 일인 거 같아서.”
지한은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이유 없는 분노가 안에서 치솟았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뻐근하게 들썩였다. 아무리 독한 연기를 밀어 넣어도 거슬리는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제 자신이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현이 어디 사는지 몰라서 이러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손을 벌리고, 그마저도 안 되니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서로의 사생활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선을 넘으면 관계도 깨진다. 기분이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필터 끝까지 다다랐을 때 지한은 잔뜩 휘어진 잿더미를 재떨이로 박아 넣었다. 짧은 몸뚱어리가 힘에 우그러졌다.
“술 그만 마시자.”
일어선 지한은 입안에 남은 연기를 마저 뱉으며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성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한의 입에서 나온 그만이라는 단어가 내부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한참 뒤에야 성우가 물었다.
“간 거야?”
“간 거 같은데.”
아직 널려 있는 술병이 한가득이었다. 민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문 쪽을 보고선 어깨를 늘어뜨렸다.
“형, 정지한 왜 저런지 알아?”
“쟤 머릿속을 어느 누가 알겠냐.”
민준은 입안의 혀를 굴리다 찝찝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변한 거 같지.”
가진 분위기나 위압감은 여전한데, 그 방향이 한 곳에 몰두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