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
샤워를 하고 나온 소현은 버려두었던 핸드폰을 찾았다.
잠깐 핸드폰을 꺼두었을 뿐인데 쌓인 연락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말도 없이 일한 덕분이었다. 남는 건 저를 찾는 부름과 요청과 확인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가슴이 다쳐도 치유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중에서 소현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김 부장이었다. 내일 또 미팅을 잡은 거로 봐서는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있었다. 내일 가능한 시간에 미팅을 하자는 필사적인 문구가 유독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했다. 그곳에 가면 마주칠 얼굴이. 소현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뒤적거리다가 끌어내렸다.
성민과 만난 이후, 모든 것들에게 회의감이 밀려왔다. 일도, 사랑도, 관계마저 소현의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았다. 즐겁고 행복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와 소현에게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기억이 저를 찔렀을 때 유독 맹렬한 고통을 새긴다는 것도.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김 부장에게 답장했다.
[내일 5시에 본사로 찾아가겠습니다.]
지금 즐거운 행위가 나중엔 저를 울게 할 수도 있었다.
소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쾌한 얼굴로 월요일에 출근했다. 차를 가져오지 않는 날이었다. 월요일의 오전은 살인적인 스케줄로 흘러갔다. 주말 동안 쌓인 업무를 집에서도 나눠 해결했지만 그래도 미팅과 또 미팅, 클라이언트와 연락, 새롭게 전달받은 사안을 토대로 업무 지휘. 쳇바퀴같이 흘러가는 일정이었다. 4시 20분이 되자 소현은 짐을 챙겨 들어갔다.
“팀장님, 저 재상 그룹 미팅 갔다가 퇴근할게요.”
“뭐?”
팀장은 또 무슨 약을 먹었냐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소현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상황 봐서 다시 오든가 할게요.”
“꼭 와야지, 무슨 소리야.”
“갑니다.”
소현은 쾌활하게 웃으며 회사를 나섰다. 택시를 잡고서 가는 길은 수월했다. 미팅 시간에 늦지도 않았고 훨씬 더 빨리 도착했다. 김 부장에게 연락을 하자 오히려 그게 반갑다는 듯 소현을 환영했다. 아마 제가 오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혹사당한 게 분명했다. 소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미팅이 이뤄질 회의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김 부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사를 하려 입을 떼려는데 김 부장 옆에 놓인 의자가 소현을 향해 움직였다.
“말해 봐.”
느긋하게 앉은 몸과 달리 거센 눈빛이 소현에게 맹목적으로 날아와 꽂혔다. 소현은 숨을 삼켰다가 뱉으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현진 기획의 강소현 대리입니다.”
어제와 다르게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마치고서 소현은 자리에 착석했다. 지한의 시선이 끈질기게 소현에게 달라붙었다. 얼굴을 훑고, 목과 어깨를 지나 다시 얼굴로 올라갔다. 세세하게 판별하는 눈빛이 소현의 안까지 헤집어 만지는 것처럼 움직였다.
“김 부장님, 아직 시안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만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소현은 애써 그를 무시하며 김 부장과 영양가 없는 얘길 주고받았다. 어차피 이 자리는 지한 때문에 생겨난 거였다. 전화로 주고받으면 될 내용을 얼굴까지 마주 보며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지면 광고가 CF보다 그림이 잘 나올 거 같지 않단 말이지.”
김 부장은 누가 작당한 일인지 숨기려는 것처럼 말했다.
“말씀 해주신 그 부분은 참고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지면엔 함축적인 장면과 문구가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소현도 그걸 능숙하게 받아 주었다. 시안은 잘 나오고 있다, 제작팀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단 의견을 피력하면서 미팅은 끝이 났다. 더는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김 부장은 은근히 지한의 표정을 살폈다. 소현이 앉기 전까진 불쾌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소현만 보는 것이,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김 부장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소현은 김 부장을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고선 고개를 돌렸다.
“정지한 씨는 계속 회사에 계시나요?”
지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려고.”
“잘 됐네요. 제가 오늘 차를 안 가져와서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가는 방향 도중에 내려 주실 수 있으세요?”
따라오라는 듯 지한이 먼저 걸어갔다. 소현은 정중하게 김 부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선 회의실을 나섰다. 김 부장은 내심 짐을 치워 줘서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소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읽은 것처럼 지한의 시선이 내려왔다. 문이 열리고 소현이 먼저 올라탔다.
“차는 지하에 있나요?”
“어.”
“나 시론 한 번 타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지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줄까?”
“…….”
소현은 예상치 못한 지한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풀어내며 속삭였다.
“운전하는 거 말고 그냥 옆에 타고 싶어서요.”
심장이 붙잡힌 것처럼 꽉 조여 온다. 층마다 멈춰 서며 사원들이 올라타서일 거다. 소현은 한껏 몸을 움츠렸다가 지한과 팔이 맞닿았다. 지한은 닿은 부위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팔을 움직여 위로 들었다.
“…….”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현의 어깨를 감싸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소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가 옆을 보았다. 남자 사원과 붙어 있었던 소현의 한쪽 팔이 지한의 손에 의해 막혀 있었다.
몸의 반 이상이 지한에게 들어온 소현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지우려고 했다. 숨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른 가슴과 배가 소현을 자극했다. 열기를 응집해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순간 허벅지가 소현의 엉덩이를 위험하게 스쳤다.
“내려.”
미끄러지듯 소현의 어깨를 감쌌던 손이 내려와 팔을 건드렸다. 소현은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갔다.
지하 3층에 도착하니 밑바닥 특유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장소에 오니 가벼워진 듯 소현은 발걸음을 경쾌하게 움직였다.
“나 드라이브 시켜 줘.”
스마트 키 버튼을 누른 지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로.”
“네 호텔 앞까지.”
은빛 헤드라이트를 쏘아대는 차로 소현은 걸어갔다. 딱 두 자리만 놓인 좌석이 특혜처럼 보였다.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끌어당기자 지한이 운전석에 앉았다. 차체가 낮게 흔들리다가 곧 안정적으로 무게를 잡아 주었다. 엑셀을 밟은 차가 순식간에 지하 주차장을 주파하며 위로 올라갔다.
고압적인 엔진 소리가 소현의 가슴을 관통했다. 두근거리고 즐거웠다.
도로로 나오자 물살이 갈라지듯 사람들의 시선과 몸이 뒤로 물러났다. 소현은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관찰했다. 대화가 없었지만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지한은 그런 남자였다. 굳이 제가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었다.
이 안락함을 잠시나마 즐기는 것처럼 소현은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얼마 가지 않아 웅장한 크기로 높게 솟아 있는 호텔이 보였다. 로비 앞으로 차를 멈춰 세운 지한은 차 문을 열려고 했다.
“지하로 내려가.”
그 말에 지한이 멈췄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던 호텔 직원에게 소현은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다시 핸들을 잡은 지한은 지하로 내려갔다.
“한층 더.”
지하 2층, 소현은 아예 밑바닥까지 내려가 달라고 했다. 빙글빙글 원형을 계속 돌던 차가 지하 끝에 도착했다. 거기엔 차가 드문드문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위쪽보단 훨씬 더 여유롭고 한적했다.
지한이 기어를 잠그자 기다렸다는 듯 소현이 손을 뻗었다. 얼굴 옆면을 대고 저를 보게 했다. 소현이 앉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 지한이 나직이 물었다.
“왜 이래.”
“그냥 좀 보는 거야.”
지한은 움직이지 않고 소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소현은 그 얼굴을 편히 감상할 수 있었다. 쌍꺼풀 없는 진한 눈매, 그 안에 담긴 눈동자는 여전히 신비롭고 오묘한 색으로 소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아래에 놓인 입술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부풀어 있다. 소현이 섬세하게 조각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갔다. 살짝 입술을 벌리자 거친 숨결이 밀려왔다.
“사탕 줄까.”
낮은 목소리가 혀를 대신해 들어와 섞였다. 입술을 달싹거린 소현이 웃었다.
“그게 또 있어?”
지한은 문 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라 정말 있었다. 소현은 김이 샌 것처럼 말했다.
“……이리 줘봐. 저번에 먹어보니까 기분은 나아지더라.”
제 입술이 고작 사탕 한 개에 밀린 것 같았다. 지한은 웃음을 흘리며 껍질을 뜯었다. 낯익은 껍데기가 소현의 눈앞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 한식집에서 몇 개 챙긴 모양이었다.
“그때처럼 작게 해서 줄까.”
“그러던가.”
그 말에 지한은 옷을 벗긴 속살을 혀로 감았다. 소현은 들어가지 못했던 점막을 통과한 사탕이 실컷 지한의 입안에서 돌아다녔다. 한쪽 뺨을 볼록하게 만들 정도로 안쪽 살에 붙었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이동할 땐 단물을 흘리겠지.
달그락, 달그락. 치열에 부딪치는 소리가 신음처럼 소현의 고막을 긁었다. 지한이 저 아닌 다른 무언가와 놀아나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다. 소현은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잘 먹네. 단 거 좋아하니?”
“아니.”
단내에 푹 잠긴 것처럼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였다.
“그럼 왜 먹고 있어?”
“너 먹이려고.”
달그락, 달그락. 신경에 거슬렸던 소리가 반대로 사탕을 유린하며 녹이는 애무로 변한다. 소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안에 고인 단물을 빨아 삼킨 지한이 소현을 쳐다보았다.
“싫어해? 보니까 잘 먹던데.”
“아니…….”
한식집에서도 꿀에 저며진 인삼을 수시로 젓가락질 했던 소현이었다. 그걸 지한이 쳐다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지금도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단 걸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이 저를 위해서라니. 그 생각을 하자 소현의 입이 연하게 저며진다.
“그만하고 나 줘.”
“조금만 더 있어 봐.”
세심하게 조각하는 장인처럼 말한다. 소현은 지한의 어깨에 머물던 손으로 목을 힘껏 끌어당겼다. 일순 흐트러진 지한의 어깨가 소현이 앉은 곳으로 기울었다. 다리를 접어 좌석에 올린 소현이 허리를 길게 뺐다. 순식간에 지한의 입술 앞으로 도달했다. 지한은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 있었다. 지한의 뺨을 감싼 소현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입을 벌렸다.
“사탕 줘. 빨리…….”
재촉하듯 닫힌 입술을 덮었다. 끌어당기자 숨겨진 점막이 소현의 입술과 맞물렸다. 소현은 놓치지 않고 그걸 제 안으로 빨아들였다. 단맛을 느끼자 금세 촉촉하게 입안이 젖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붙었는데 그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 사탕은 아직도 지한의 입에 있었다. 소현은 가늘게 뜬 눈을 내리깔았다. 어서 달라는 듯 혀를 내밀어 지한의 입술 표면을 혀로 문질렀다. 경계심이 많은 아이를 달래듯 할짝거렸다. 숨을 토해 내며 뭉개듯 넓게 핥자 핸들 가죽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현은 청각을 버려둔 채 약한 흡력으로 더듬었다. 항복하듯 지한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짐승이 낮게 속삭였다.
“너 나 그만 만나려고 이러지.”
소현의 입술이 멈칫했다. 닫혀 있어 응집된 숨결과 눈동자가 소현의 얼굴로 밀려왔다.
“여기서 키스하면 사생활이 되니까.”
파르르, 소현은 눈꺼풀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