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28)화 (28/86)

28.

지금도 전화해서 쓰겠다고 말하고 싶은 걸 억누르느라 속이 지끈거렸다. 무슨 변덕 때문인지 갑자기 달려드는 게, 무슨 고삐 풀린 여자 같았다. 거기에 넘어가지 않으려 참아 내느라 턱이 뻐근할 지경이다. 아찔했던 순간을 되새기던 지한의 눈동자가 불꽃이 튀는 것처럼 옆으로 향했다.

“뭡니까.”

“아니, 얼굴에 그, 뭐가 묻으셔서……죄송합니다.”

벨보이는 얼른 사과를 건넸다.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본 게 실례라는 걸 알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시선을 끌어당긴 얼굴이었다. 뺨에 선명하게 찍힌 입술 자국. 그 과정을 연상케 하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온몸에 휘두르고 있으니, 아마 눈이 아니더라도 다른 감각으로 존재를 느꼈을 거다.

지한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벨보이는 쩔쩔맸다. 가만 보니 고객의 눈동자 색이 특이했다. 그걸 구경하듯 본 거로 착각해 불쾌감을 느꼈다면 할 말이 없었다. 지한은 손등으로 위험하게 제 턱을 문질렀다.

“나보고 꼴리면 안 됩니다.”

걸음을 옮겨 로비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뺨에 찍힌 입술 자국에 닿았다가, 골반으로 내려오고선 기겁하듯 달아났다. 누가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는 나태한 얼굴로 지한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카드 키를 스쳤다.

버튼을 누르자 사방이 막힌 사각 틀 안에서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소현이 쓰는 향수의 이름은 모른다. 그저 코끝에 달콤하게 감겼다가 깊이 들이마시면 안에서 진해지는 향이라는 것밖엔.

지한은 아플 정도로 뻐근한 감각을 참아 내며 도착한 층에 내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허물을 벗기는 거처럼 바지 지퍼를 열었다. 성이 난 아래가 어서 빨리 해결해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지한은 그걸 내려다보며 일부러 느긋하게 상의를 벗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노트북엔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천문학적으로 나열된 숫자가 그의 눈동자 안에서 먹잇감처럼 삼켜졌다. 내용을 소화시킨 지한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멈춰 섰다.

진한 립스틱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제 얼굴에 찍혀 있으니 표식처럼 퇴폐적인 느낌을 풍겼다. 거울을 주시하며 욕조로 다가간 지한이 비치된 물품을 하나씩 건드렸다. 청소하고 새것을 채워 두는 룸 클리닝 서비스가 만족스러웠다.

물을 튼 지한이 그 안으로 새롭게 채워진 입욕제를 들이부었다. 병 안에 담긴 많은 양이 한꺼번에 수면으로 쏟아졌다. 지한은 손톱을 세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선 그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미끈한 감촉이 발가락을 긴 꼬리로 감는 것처럼 엉켰다. 욕조의 곡선을 따라 척추를 늘어뜨리자 질척한 느낌이 점차 차올랐다.

물과 만난 입욕제는 과할 정도로 미끄러웠다. 옅은 막을 씌우듯이 피부에 달라붙어 흔들린다.

지한은 양손을 욕조에 걸터 두고선 목을 젖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뻐근한 아래가 짙은 향과 만나자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거센 힘으로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수면은 얌전하지 못했다. 기포를 만들어 내며 안에서 전쟁과 같은 물살을 형성했다.

―이거 하면 살결 부드러워지는데 너도 자주 해봐.

지한은 짧게 숨을 터트렸다.

―향도 오래가고. 반신욕이 건강에 좋다잖아.

비웃음이 사라진 코끝으로 달콤함이 스며든다.

―피곤할 때 이거 하면 잠도 훨씬 더 잘 와.

파동치는 수면이 제 안까지 번졌다. 한쪽 뺨에 온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현의 입술이 닿아 있다. 그래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옆에서 속삭이듯 들려왔다. 지한은 입을 열었다.

“잠이…….”

눈가가 경련하듯 떨리며 일그러졌다.

“안 와.”

푹 잠든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

소현의 기분은 요 근래 최저를 기록했다. 뭔가 틀어진 듯 평탄했던 일상이 삐그덕거렸다. 이럴 땐 성과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소현을 도와주지 않았다.

“뭐라고요?”

소현의 얼굴이 깨질 것처럼 일그러졌다. 배우 섭외 담당인 PD 지아는 당혹스러운 낯빛을 띠었다.

“제가 계속 말은 해보았는데…….”

“담당자 연락처 줘요.”

긴말할 필요 없이 소현이 손을 내밀었다. 지아가 제 핸드폰을 뒤적이며 소현에게 번호를 주었다. 소현은 곧바로 전화를 연결했다. 골반을 짚은 손가락이 전화를 받지 않자 점점 구겨졌다. 이윽고 통화가 연결됐다.

“안녕하세요, 현진 기획 강소현 대리입니다. 재상 그룹 CF 계약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담당자는 한숨과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소현의 미간이 깊게 팼다.

“실례지만 어떤 연유로 계약을 거절하신 건지 여쭤보려고요. 조건이 나쁘지 않았을 텐데요.”

「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배우가 개인적으로 이유로 싫다고 했어요.」

“건강과 상관있는 일인가요?”

「그건 아니고요.」

다른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이유라니. 답도 안 나오는 말이다. 소현은 구겨진 인상을 펴며 말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상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와 영향력이 있는 그룹이에요. 배우 이력에 말할 것도 없이 좋을 거고요. 이번 광고로 인해 장유란 배우 이미지가 더 빛날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희뿐만 아니라 기획사 사장부터 매니저, 팀장까지 죄다 가서 설득 시킨 모양이에요.」

계약을 맡은 에이전시를 포함해 장유란의 소속사도 골머리를 썩었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 재계약 안 한다는 소리 나올 정도로 완고하다고 합니다. 기획사 입장에선 배우 케어가 우선이라고 하니…….」

“하…….”

「장유란 말고 신지수는 어떻습니까?」

은근히 장유란과 같은 소속사 배우를 떠미는 것이 소현의 신경에 거슬렸다.

“죄송하지만 그 배우는 저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네요. 장유란 배우, 저와 연결해주실 수 있나요?”

「그것도 배우한테 물어보고 진행되어야죠. 제가 한 번 물어는 보겠습니다.」

“그래요. 제발 부탁드려요.”

통화를 마친 소현은 핸드폰을 든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미 세트 제작과 촬영을 위한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1순위로 두었던 장유란이 불발됐다. 다음 타자를 서둘러 준비해야하는데 그 생각까지 소현의 머리에서 매끄럽게 이어지질 않았다. 솔직히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개인적인 사유라니, 소현은 뜨거워진 귀 밑을 문지르며 걸어갔다.

“되는 일이 없네.”

이 사실을 알게 된 내부에선 어서 빨리 다음 타자를 구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냉철하고 도시적인 페이스를 지닌 배우들로 다시 물색이 이뤄졌다. 소현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

“하아…….”

회사 건물과 동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던 소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이따금씩 속이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피곤함에 찌든 눈꺼풀을 내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 위를 포근히 이불처럼 덮었다.

“오늘 날씨 좋다…….”

잠든 남자의 얼굴이 이 순간 떠오르는 건, 곧 만나기 때문일 거다.

소현은 그날 지한에게 거절당한 이후 생각을 깊게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마지막 날 횟수를 사용한다고 했으니 출국 날인 일요일에 쓸 거다. 그럼 지한과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된다. 깨끗하게 지워질 남자에게 감정을 할애하기에 현재 소현의 컨디션이 따라주질 않는다. 쓸데없는 소모전은 피하고 싶었다. 제가 매달려야만 끝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소현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재상 그룹 본사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김 부장님.”

“오느라 수고 많았네.”

김 부장이나, 소현이나 매너리즘에 빠진 직장인들 같았다.

“나한테는 인사 안 해요?”

여기서 신선하고 독창적인 건 지한뿐이었다. 셔츠와 재킷, 그리고 넥타이까지. 직장인의 규격에 딱 맞춘 의상을 입고 있지만 태도는 격식을 무너뜨렸다.

“얼굴은 또 왜 그래.”

회색빛 눈동자가 번득이며 주시하는 제 얼굴이 소현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았다.

“김 부장님. 나 좀 봅시다.”

“네?”

나직한 물음에 김 부장의 고개가 움직였다. 지한은 테이블 위로 팔을 세우며 그 위로 턱을 대었다.

“내 얼굴은 어때요.”

명품에게 감정을 요구하는 뻔뻔한 물음이 김 부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지한의 외모는 평가를 내리자면 별 다섯 개였다. 김 부장은 이미 답이 나온 말을 내뱉었다.

“뭘 그런 걸 묻습니까. 훤칠하니 모델 같은데요.”

“아부가 좋질 않네.”

지한의 손가락이 얼굴 옆면을 쓸어 올렸다. 그곳이 제가 입술을 대었던 자리라는 걸 아는 것은 소현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잠을 통 못 잔 사람처럼 지한의 눈 밑이 어둡게 그늘져 있다. 설마 제 얼굴도 저런 식으로 비칠까. 이미 오기 전에 거울로 살폈지만 요즘 워낙 기분이 엉망인 터라 매일이 칙칙했다. 소현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홍보 이벤트 전략으로 새롭게 의견이 하나 나왔는데요.”

“그보다 배우 계약건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

하필이면 정곡을 찌른다. 소현은 입가에 고운 호선을 그렸다.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회사에선 대책을 세우고 재상 그룹에 다음 플랜을 설명하기로 했었다. 지한은 턱을 괸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소현의 눈에 거슬렸다. 장유란은 별로라고 했던 지한의 발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강남역 일대와 삼성동 거리에서 고화질 체험을 하는 건 어떨지 의견이 나왔어요.”

구멍 난 프로젝트를 손으로 틀어막는 것처럼 소현은 입을 움직였다. 균열 난 곳을 김 부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소현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확인 해본 문자에선 장유란의 연락처가 찍혀 있었다. 소현은 미소로 김 부장을 대했지만 온 신경은 그 문자로 향해 있었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촬영 날짜는 예정대로 이뤄질 겁니다.”

“알겠네. 수고 좀 해주게나.”

“그럼요, 제가 해야 할 일인 걸요.”

소현은 30분이 다 돼 가는 것을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어요.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했어, 강 대리.”

“아닙니다.”

눈웃음 지은 소현이 지한을 스치며 회의실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문자에 찍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비상구 계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연결음이 끊어지길 기다렸다. 여보세요, 가녀린 목소리가 소현의 귓가를 두들겼다. 소현은 팔짱 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장유란 씨. 현진 기획의 강소현 대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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