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네. 안녕하세요.」
“통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관계자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재상 그룹 광고 CF 제안을 거절하셨다고요.”
「네.」
“죄송하지만, 사정을 들어봐도 될까요? 재상 그룹의 이미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저희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서요. 어쩌면 제가 장유란 씨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지도 모르고요.”
「CF는 하고 싶지 않아서요.」
“재상 그룹 임원들이 장유란 씨를 무척이나 좋게 평가하고 계세요. 이번 광고에서 장유란 씨가 제품에 미치는 영향력을 기대하고 있고요.”
「그냥 하기가 싫다고요.」
“…….”
소현은 반쯤 열린 입술을 억지로 잡아 올렸다.
“알겠습니다. 통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득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금 통화도 직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칠 요량으로 한 거지, 회유를 원하는 사람의 말투도 아니었다.
통화를 마친 소현은 핸드폰을 꽉 움켜잡으며 얼굴에서 조금 떼어 냈다. 하아, 까마득히 내리 떨어지는 계단으로 던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내자 얼굴로 열이 몰렸다.
“……다음 후보군이…….”
소현은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가 돌아가듯 뻑뻑하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몸을 돌릴 때였다.
“내가 해줘?”
낮은 목소리에 소현은 움찔했다. 거기엔 지한이 서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거지, 전화에만 집중하고 와서 그런지 뒤에 누가 따라왔는지 알아차리지 못 했다.
“뭘?”
반사적으로 말한 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대화하며 상대해 줄 여력이 없었다.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하자 지한이 한마디 덧붙였다.
“장유란 해준다고.”
거기에 붙잡힌 것처럼 소현의 발이 멈추었다. 통화 내용을 다 들은 걸까. 꼭 저런 식으로 제가 약하고 민감한 부분을 파고든다. 뒤돌아선 소현의 입가에 비웃음이 실렸다.
“네가 뭘 어떻게 해줘. 계약금 문제가 아니고, 협의 조항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싫다고 하는 배우를 네가 무슨 수로.”
“그것 때문이야?”
소현의 말이 멈추었다. 지한은 몸을 돌리며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었다. 소현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그림자가 되어 내려왔다.
“너 그때 목소리 안 좋았던 거 이거 때문이었냐고.”
“……그래.”
소현은 아무렇게나 답했다.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하나 생긴 것만 같았다. 벽으로 머리 옆면을 기댄 지한이 그 부위를 문지르듯 비볐다.
“언제까지야.”
“뭐가?”
“언제까지 해주면 돼.”
네가 대체 어떻게 해줄 거냐고, 추궁하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장난이 뒤섞이지 않은 진지한 눈빛은 그날 차 안에서 보았던 것과 닮아 있었다. 저를 의심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소현은 저도 모르게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얘기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배우 스케줄도 확인해 봐야 하고, 촬영 일정, 스태프들,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오늘 저녁이면 돼?”
오늘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다. 소현은 팔짱을 낀 손을 떼었다.
“어.”
“전화하면 받아.”
지한은 볼 일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돌아섰다. 소현은 잡으려던 손을 멈칫했다. 문이 닫히고, 계단으로 정적이 뒤덮였다. 자옥하게 깔린 의아함이 소현을 휘감았다. 저를 잡고 무슨 얘기라도 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한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소현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점점 더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
지한은 임원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편하게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헤집던 지한은 차에 오르며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두 번의 연결음도 되지 않아서 전화를 받는다. 핸드폰을 지그시 붙잡은 지한이 인사이드 미러에 비친 제 눈을 쳐다보았다.
“너 나 기억해?”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재빨리 받은 것치곤 미적대는 행동이었다.
「누구세요?」
지한은 조소를 흘렸다. 핸들을 잡으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앞 유리창으로 주차장 조명이 선을 죽죽 그으며 스쳐 지나갔다.
“기억나, 안 나.”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마치 급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해야 할 말을 못 정한 사람 같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눈부신 빛이 잘빠진 보디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나지. 정지한이잖아.」
마음을 정했는지 아는 체를 한다. 그제야 지한은 핸들을 틀어 도로로 합류했다.
“잊을 뻔 했나 본데.”
「번호를 지워서 그런가, 목소리만 듣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
내숭을 떠는 목소리가 웃겼다.
“지웠어?”
「응. 우리 그때 끝난 사이 아니었니? 너도 나 가고 나서 연락 없었잖아.」
지한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옆 좌석으로 던졌다. 문에 부딪친 핸드폰이 푹신한 시트로 안착했다. 창문틀에 팔꿈치를 기댄 지한이 여유롭게 운전을 이어나갔다. 머지않아 호텔에 도착한 지한은 버려둔 핸드폰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부재중 7통이 상대의 애끓는 심정을 대변했다.
방에 도착한 지한이 갑갑하게 목을 죄이는 넥타이부터 잡아 뺐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요즘 부쩍 몸이 답답하고 피곤해졌다. 억지로 잠이 들려고 요즘 매일 같이 입욕제를 쏟아부어서인지 룸 안에는 여전히 달큰한 향이 진동했다.
지한은 소파에 앉아 길게 뻗은 다리를 테이블로 올려 두었다. 골머리를 썩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손으로 밀어 올렸다. 저야 일을 안 해서 업무적인 스트레스와 무관하다지만 소현은 아니었다. 상사에게 독촉을 받거나 프로젝트 하나로 소현의 앞날이 바뀔지 모른다.
오늘 얼굴이 좋지 않던 것도, 그날 목소리가 젖어 있던 것도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지한의 시선이 다시금 핸드폰으로 향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건 해본 적 없었다. 무음인 핸드폰 역시 제 손길이 닿지 않으면 계속 암전 상태였다. 성가신 일을 해결하는 것처럼 핸드폰을 집어 든 지한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너 왜 전화를 그런 식으로 끊어?」
“지웠다기에.”
지한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정말 네 번호를 지웠겠어?」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퉁명했다. 더는 길게 끌 것도 없다는 듯 지한이 말했다.
“너 재상 그룹 CF 해라.”
그 말에 또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지한은 어떤 이유에서 유란이 그 CF를 거절한 건지 알지 못 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장유란을 모델로 삼지 말라고 했던 것도 소현과 엮이는 게 싫었던 탓이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유란이 작게 속삭였다.
「맨 입으로?」
지한의 눈이 게슴츠레 올라갔다.
“어디 입이 근지러운데?”
그 말에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유란이 수줍게 말끝을 늘였다.
「나야……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지한은 무미건조하게 눈동자를 옮겼다.
“호텔로 와.”
「호텔?」
뭘 기대한 건지 유란의 목소리가 치솟았다. 지한은 아직 밝은 빛을 몸으로 흡수하며 말했다.
“라운지로.”
「아……그때 거기? 그런데 지금 오픈 시간 아니지 않아?」
“내 이름 말하고 들어와.”
지한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저녁때까지 소현에게 승전보를 안겨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비위를 맞춰야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소현과 세 번만 만나자고 했을 땐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티고 참아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의욕이 나질 않는다. 성가시다는 생각만 밀려올 때마다 지한은 기뻐할 소현의 얼굴을 되새김질했다. 계단에서 침울했던 얼굴이 환해지는 걸 여러 번 곱씹던 지한은 라운지 바로 내려갔다.
영업시간이 아님에도 지한을 맞이하는 직원은 언제나 준비돼 있었다. 매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고객인데다가 매년 이맘때쯤 호텔을 찾아와주는 터라 그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과한 특혜를 퍼부었다.
“마시던 걸로 줘요.”
“알겠습니다.”
제 전용 방인 것처럼 지한은 익숙한 정경을 눈에 담았다. 요즘 침대보다 제 몸을 오래 맛보는 건 이 소파였다. 술을 마셔도 뇌와 몸이 늘어질 뿐, 깊은 수면은 바랄 수 없었다. 가늘게 눈을 뜬 지한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푹 잠든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헤집어 보니 한쪽 뺨이 눅눅해진다.
저를 깨우고 가던 소현을 붙잡았을 때 뺨으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 왔어.”
“알아. 봤잖아.”
지한은 시선을 내리깐 채 잔을 기울였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유란은 입술을 감쳐물며 다가갔다. 옆자리에 앉을까 하다가 자존심이 상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곳엔 두 번째로 오는 거였다. 첫 번째는 지한과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제게 얼굴을 논하면서 치욕을 안겨 주었었다. 그때의 분노가 수그러들 만큼 지금은 단둘뿐이다.
비밀이 보장된 프라이빗 한 공간이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조금씩 반응하는 것과 달리 지한은 그날처럼 입가에 닿은 잔을 여러 차례 나눠 마시고 있었다. 유란은 괜스레 목이 탔다.
“마셔.”
지한이 낮게 말하자 유란은 손끝을 매만졌다.
“나 보기 보다 주량이 약해서, 취하면 실수할지도 몰라. 그때도 그랬었고.”
그 말에 지한의 입술이 올라갔다.
“주스 줄까?”
저를 애 취급하는 발언에 순간 유란은 귀가 붉어질 뻔했다. 사실 주량이 세긴 하지만 지한의 앞이라 여지를 남겼던 건데, 회색빛 눈동자는 그걸 간파한 것처럼 유란을 쳐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스 가져다줘요.”
지한은 유란을 주시하며 물었다.
“차갑게, 뜨겁게?”
교묘하게 사람을 낮춰 보는 건방진 말투에다가 압도하는 성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란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