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30)화 (30/86)

30.

얼굴이나 체형,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분위기까지. 유란이 말이 없자 직원이 대신 말했다.

“차갑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한은 여전했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는 모습은 유리관에 담겨 보존 되어온 것처럼 변함없이 독점하고 싶은 모습으로 심장을 뛰게 했다. 양옆으로 벌어진 허벅지를 본 유란은 자존심을 세운 걸 후회했다.

옆자리에 앉을 걸 그랬나. 그럼 그때처럼 술을 핑계로 저곳에 올라타 입을 맞출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터였다.

지한은 한쪽 다리를 들어 반대쪽 다리에 올려 두었다.

“너 드라마에서 인기 좋다더라.”

“아, 봤어?”

“아니.”

그럼 들었나. 유란은 차분히 머리카락을 귓바퀴로 쓸어 넘기며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제가 배우라고 소개했지만 지한은 그냥 제 이름을 배우 정도로 생각했다. 원체 저 아닌 다른 것에 무감각한 남자였다. 유란의 인지도나 인기, 유명세 같은 건 지한에겐 먼 얘기였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기분이 색다르긴 하다.”

저를 행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처음엔 자존심 상했는데 민준을 통해 배경을 듣고서 납득했다.

“나 재상 그룹에게 제안받을 정도로 유명한 거 알고 나니까 이제서야 관심 주는 거니?”

“말해.”

“뭘?”

“어떻게 하면 CF 할 건지.”

유란은 웃음이 나올 뻔 한걸 가까스로 짓눌렀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CF를 걷어찬 일이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제게 돌아올 줄은 몰랐었다. 단순히 유란은 그날, 이곳에서 민준도 있는데 지한이 면박 주었기에 재상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던 거였다.

업계에서 진귀한 보석으로 취급받던 유란은 한 남자의 말 한마디에 버려진 기분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글쎄……요즘 바쁘기도 한데, CF도 좋지만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빨리 소비되면 곤란한 것도 있으니까.”

이건 바닥을 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생각을 조금 더 해봐야 할 문제 같아.”

“생각?”

“응. 재상 그룹이라면 너와 관련된 곳이잖아. 디스플레이 광고였지? 그럼 삼촌이 하시는 거겠네.”

“…….”

유란은 저를 빤히 보는 회색빛 눈동자에 주눅 들지 않으려 했다. 의지를 배반하고 뛰는 심장이 문제였지만 배우니 이 정도는 가뿐히 연기할 수 있었다. 제게 매달리는 지한을 볼 수만 있다면야. 지한은 소파 등받이로 한 팔을 올려두었다.

“생각하라고 부른 게 아닌데.”

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노란 빛깔의 주스를 내려놓았다. 달그락, 유리와 유리가 만나자 차가운 소리를 냈다.

“……감사해요.”

유란은 웃으며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목은 바싹 말라 있었다. 크리스털로 세공된 긴 잔을 잡자 지한이 잔을 든 손목을 까딱였다.

“건배.”

지한은 잔에 남은 액체를 입으로 털어 넣었다. 조심스럽게 빨대를 문 유란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빨아들이면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달콤한 액체가 들어왔지만 분위기는 중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독한 알코올을 들이부은 것처럼 내부가 싸해졌다.

유란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제 것으로 끌어와야 하나 생각했다.

분명 우위에 있는 건 자신이다. 지한은 지금 CF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유란의 입술로 조금씩 웃음이 스며들었다. 이 버릇없는 남자를 제게 천천히 무릎 꿇리게 할 상상을 하자 척추가 짜릿했다. 뜨겁게 발화하는 독점욕을 감추며 유란은 말했다.

“꼭 나여야만 하는 이유 있어? 다른 배우로 교체해도 되잖아.”

“…….”

“후보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테고, 재상 정도면 충분히…….”

“…….”

빈 잔으로 병이 기울어지며 다시 안을 채웠다.

“……충분히, 나와 동급인 배우들도 섭외할 능력이 있을 텐데. 왜 내게 이러는 거야?”

그 물음에 입가로 잔을 대었던 지한이 멈추었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인상이 구겨졌다.

“넌 역시 재미가 없네.”

“뭐?”

갑작스러운 발언에 유란의 표정이 옅게 흔들렸다. 그 얼굴을 살피며 지한은 술을 마셨다. 뭔가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말투가 계속 속에서 거슬렸다. 빙빙 돌리고, 또 돌려서 결국 원하는 말을 들으려고 할 거다. 진저리 날 만큼 뻔한 패턴이 지한의 의욕을 한풀 꺾었다.

“흥미가 안 생겨.”

강소현은 그러지 않았다. 핵심을 간파하는 눈썰미는 지한의 생각을 헤집어 꺼낸 것처럼 먼저 그 입에서 나오곤 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다 읽었으면서 지겨울 만큼 침묵하며 생각에 잠긴다. 그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숭도 떨지 않고 정리한 것을 얘기할 땐 꽤나 직설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거기에 넘어가 지금 이런 짓까지 하는 거였다. 지한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너 지겹다고.”

그 말에 조금씩 균열이 가던 유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치욕감에 물든 얼굴이 조금 흥미를 돋웠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금세 상처받은 표정으로 돌변하는 처연함이 다시 지한의 흥미를 죽였다.

“날 불렀다는 건, 그만큼 너에게도 중요한 일 아니야?”

그날, 문을 열고 들어왔던 날 키스하던 여자의 얼굴을 소현은 기억하지 못 했다. 지한은 그걸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만 보고 있었다는 결론이 머릿속에 독물이 되어 번졌다.

안일했다. 내 눈을 피하지 않던 너를 마주했을 때부터 예감했어야 했다. 내 턱짓에 살며시 벌어지던 그 붉은 입술이 미치도록 색정적으로 느껴졌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타액을 삼키자 함께 떨리던 네 턱을 벌리고 혀를 넣는 상상을 했을 때, 직감해야만 했다. 고작 하룻밤을 즐기는 거로 그치지 못할 거라고.

“부탁하려거든 정중하게 해.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하나도 설득 안 돼.”

내가 이렇게, 기어 다니게 될 거라고 나도 생각 안 했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라고, 꼭 나여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

“다 떠들었나?”

지한의 시선이 사납게 올라서자 유란이 숨을 집어삼켰다.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처럼, 지한도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만하고 조건이나 말해.”

목을 조이는 단추를 풀자 일그러진 유란의 얼굴로 붉은빛이 부산스럽게 피어올랐다. 지한은 조소하며 말했다.

“몸 빼고 다 줄 테니까.”

*

정지한에게 말한 게 잘한 일이었을까.

원래 감정을 드러내기보단 음지에 감추는 것이 소현의 성격이었다. 지고 있는 상황이더라도 이긴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고, 슬프더라도 기쁜 듯이 웃는 게 어울린다. 그런데 지한에게 처음으로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나 지금 곤란하고 힘들다는 투정처럼.

“하……내가 왜 그랬지.”

어디 믿을 사람이 없어서 지한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되지만 그렇게라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상황이었다. 현진 기획에선 A 시안의 모델로 장유란이 제격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건 소현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에서 예쁘기만한 여자가 아니라, 냉철한 상사로 뛰어난 업무력을 보여주고 남자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장유란을 찾아가 설득해 보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지한이 말한 저녁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믿을 것 하나 없는 남자에게 뭘 기대하는 걸까. 결국 소현은 시계만 노려보다가 퇴근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소현은 딱딱하게 뭉친 목덜미를 주물렀다.

“오늘은 운동해야지, 안 되겠다.”

비록 사람의 맞닿은 체온이나 살냄새를 느낄 순 없지만 짧은 시간 내에 체력을 바닥까지 뽑아내기엔 러닝머신은 꽤 적합한 기구였다.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움츠려 있으면 피로가 배로 축적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뛰었음에도 소현의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았다. 땀을 흥건하게 빼내도 금세 식어버리는 것처럼 머리가 다시금 무거워졌다.

오피스텔 내부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소현은 지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에 맥주가 얼마나 남았더라. 가서 확인해보고 편의점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16층에 내린 소현은 제 옆집에 쌓인 박스를 보며 의아해했다.

“누가 이사 왔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현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옆집엔 변호사인 남자가 살았는데, 일주일 전에 나간 후로 줄곧 비어져 있었다. 위치가 강남 역세권인데다가 주상 복합으로 웬만한 건 다 갖춰진 터라 그런지 가격이 무시무시했다.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렸다. 소현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옆집 문이 열렸다. 이웃이니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 소현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눈이 커다래졌다.

“이제 퇴근해?”

그 얼굴을 본 남자가 웃었다.

“너…….”

편안한 옷차림을 한 남자는 성민이었다. 소현은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온몸이 경직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성민은 그 반응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틀 전에 이사 왔는데 이제야 만나네.”

“…….”

“너 내 번호 차단했지?”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에 소현은 떨리는 눈꺼풀을 일그러뜨렸다. 입술로 온 힘을 쏟아부어 경직된 뼈를 움직였다.

“성민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내뱉고 나니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질문과 상관없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연인이었을 당시, 성민은 종종 소현의 집에 머물곤 했었으니까. 늦은 시간까지 야근에 주말까지 반납해야 하는 소현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간을 쪼개어 만나려면 성민이 소현의 집으로 퇴근해 잠들어 있거나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보는 식이었다.

“마침 좋은 가격으로 나와 있기에 이사 온 거야.”

소현은 오한이 돌았다. 이별한 남자가 다시 만나자던 헛된 말과 그리고 옆집까지. 악의적인 생각만 가득 찼다.

“예전부터 네 옆집에 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성민은 소현이 이별을 고한 이후부터 이곳에 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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