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현은 손아귀에 뻑뻑하게 밴 땀을 추스르며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뭐 이렇게 재수 없는 우연이 다 있을까.”
웃는 입술과 달리 소현의 눈동자가 냉담하게 변했다.
“좋은 이웃은 못 될 거 같으니까 수고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현이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던 순간 벌어진 틈 사이로 신발이 들어왔다. 소현은 그걸 있는 힘껏 구두로 짓밟았다.
“발 치워.”
낮은 신음이 문틈 사이로 스며 들었다.
“소현아. 잠깐.”
끄떡도 하지 않는다. 뒷굽으로 찍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문틈이 큼지막한 손에 의해 벌어졌다. 소현은 쏟아지는 복도 조명을 등진 얼굴을 보았다. 포악성을 끌어안은 어둠이 소현을 덮었다.
“결혼은 싫다는 네 말대로 해준 거잖아.”
“뭐?”
소현의 치열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각자 지낼 개별적인 공간도 있고, 바로 옆이라서 서로 오고 가는 것도 알 수 있고. 사생활이 분리된 채로 몸은 만나는 거 네가 원하는 스타일 아니었어?”
“…….”
성민은 웃으며 독설을 했다. 이 모든 게 나를 위해서라고.
“나 지금 너한테 많이 맞춰주고 있어.”
소현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맞춰?”
소현은 현관 앞까지 들어온 신발에 제 앞코를 바짝 붙였다. 팽팽하게 힘이 접전하듯 가죽 구두가 구겨졌다.
“지금 이게?”
시선을 내리깐 성민의 눈동자가 어둑했다. 소현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한참이나 모르는 남자였다. 그땐 감정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메말라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좋은 기억들까지 짓밟힌 터라 소현에게 성민은 이제 침입자였다.
“그렇게 맞춰주고 싶었으면 연애하기 전에 결혼할 생각 없다고 한 나를 설득 시켰어야지.”
제 입으로 이런 것까지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이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고 말하면서 날 이상하게 취급하는 게 아니라, 내가 왜 너와 결혼해야 하는지 납득을 시켰어야지.”
어떤 것이 문제였고 왜 우리가 헤어졌어야 하는지.
“네가 하고 싶게 만들었어야지.”
비참해지는 기분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얘기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게 뭐니?”
우리는 분명히 서로 많은 것을 나누었는데.
“일은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내가 힘들어하는 거 보기 싫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경력이 단절된다. 소현은 어이가 없어 턱이 떨렸다.
“그렇게 보기 싫으면 네가 하면 되잖아. 네가 다 해 먹으면 됐잖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 마음껏 하라고 네가 다 맞춰준다고 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누구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신의 꿈도 끝나는 일이라 피해왔던 거였다.
“어디 그럴 용기는 없으면서 나한테 일방적으로 너를 강요해.”
그런데 저를 사랑했다는 남자는 웃으며 자신의 희생을 강요했다.
소현은 그것이 진절머리 났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감수하라고 한다면 소현은 그 감정을 비웃을 거였다.
“너는 방법이 틀렸어.”
소현이 손으로 성민의 배를 밀었다.
“말귀도 못 알아듣고, 협상하려는 자세도, 재주도 없어.”
그 힘에 성민이 뒤로 밀렸다. 소현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소현이 하는 말 한마디가 세게 박힌 게 분명했다. 소현은 문을 잡고 있는 손을 쳐다보며 성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또 잘못된 걸 말해줘야 아니?”
“…….”
글자를 토막 내 뱉었다. 비린 피 냄새가 감도는 상황과 눈빛이었다.
“내가 고쳐야 할 걸 네가 지금 다 말해줬구나.”
성민은 굳은 입가를 끌어 올렸다.
“새겨들을게.”
문을 막고 서있던 발이 뒤로 물러났다. 쾅, 문을 닫은 뒤 격양된 숨결이 현관문에 흩어졌다. 폐가 아릿해졌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뭘 새겨듣겠다는 걸까. 소현은 스트레스로 폭발 직전인 머리를 짚고선 부동산을 검색했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지만 그걸 깨서라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성민이 있었다. 붉게 충혈된 소현의 눈이 집안을 훑었다. 정겹고 안락하던 풍경 속에서 오래된 성민의 흔적이 겹쳐졌다. 소현의 눈꺼풀이 욱신거리며 떨렸다. 집까지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다.
“하아……인생 왜 이래.”
성민에게 저런 집요한 면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소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러 번 울린다. 시선이 힘없이 떨어졌다. 손목을 비틀어 액정을 본 소현이 한탄했다.
“타이밍 하고는.”
지한이었다. 소현은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때 지한이 택시에 있을 때 전화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숨을 몇 번이고 환기한 뒤 준비를 마친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매끄럽고 평탄하게 목소리가 나갔다. 지한은 술을 마셨는지 어눌해진 발음으로 말했다.
「장유란 한다고 했으니까 내일 연락 갈 거야.」
“뭐……?”
소현은 놀라 주춤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이라, 믿기지 않았다.
“정말이야?”
「속고만 살았나.」
“아니,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지. 잠깐…….”
장유란이 진짜 한다고?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꾼 것이 의아했다. 거기다 지한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방법이야 알 수 없었지만 큰 고민거리 하나가 사라졌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낮은 한숨이 흘렀다.
「또 왜 그래.」
“어……?”
당혹감에 소현이 말끝을 흩트렸다. 지한은 가까이 근접하는 것처럼 숨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뭔데.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
그 음성이 동굴처럼 소현의 귓가에 울렸다. 제 뺨에 입술을 대고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만 같다. 소현의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막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마치 제 심란한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지한이 말했다.
「그럼 목소리가 나아져야지.」
긴장감이 소현의 가슴을 휘감았다. 평소처럼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지한은 저를 의심했다. 수많은 사람과 하루에도 몇 번이고 통화하는 게 일인 소현이라, 포커페이스엔 자신 있었다.
“나 지금 기분 좋은 거 체면 때문에 참고 말해서 그래. 고마워, 네 덕분에 큰 고민이 사라졌어.”
「난 왜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
그러니 지한에게 읽힐 리가 없는데. 소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한의 말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뭉글뭉글 풀어졌다. 이렇게 제 마음을 알아차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소현은 이내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너 지금 심심한가 보구나. 나랑 놀고 싶어서 그래?”
어쩐지 지한이 보고 싶어졌다. 지한은 말없이 침묵하다가 물었다.
「올래?」
“뭐 하고 있는데?”
「술 마셔.」
“누구랑.”
아, 소현은 묻고 나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생활을 묻는 건 안 되는데. 지한이 작게 혀를 움직여 소현의 청각을 휘감았다.
「애들 있는데 너 온다면 다 꺼지라고 하고.」
묵직하게 심장을 울렸다. 소현은 손톱을 세웠다. 핸드폰 뒤 표면이 긁혔다.
솔직히 말해 가고 싶었다. 지금 이곳은 소현에게 발붙일 안정적인 공간이 되질 못 했다. 벽 너머에 성민이 있었고, 그걸 안 이상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잠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애인이었던 성민 보다 이름 말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지한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 횟수 쓰는 거야?”
「됐어. 오지 마.」
곧바로 벽을 차단하듯 지한이 물러섰다. 횟수 한 번 사용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구실을 잃은 소현은 뜨거워진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그럼 술 적당히 마시고 자. 끊을게.”
마지막 날 쓰려고 아껴두는 거겠지. 그게 어떤 이유이던, 소현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지한이 그 횟수 한 번에 신중해진다는 점이다. 연속으로 이틀 불러냈을 때만 해도 지한은 충동적이었다. 지금은 억누르고 또 자제하고 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 횟수를 쓰지 않을 거였다.
전화를 끊으려고 시선을 들었다. 오늘따라 끔찍하게 느껴지는 집 안이 차가운 온도로 소현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잠깐.”
그러자 멀어졌던 지한의 입술이 다시 가깝게 닿는 것이 느껴진다.
“정지한 씨.”
소현은 낯선 호칭을 앞세워 말했다.
“내가 오늘 일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데, 지금 커피 한잔할래요?”
횟수를 사용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적이지도 않은 만남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감사 인사로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미팅의 일부분인 듯 말했지만 지한이 제가 보낸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소현은 말하고 난 뒤 초조하게 핸드폰을 붙잡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걱정될 무렵, 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강 대리.」
일순 소현의 눈으로 불꽃이 튀었다.
「이리 와요.」
이어지는 목소리는 어루만지는 것처럼 은밀했다.
「나랑 얼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