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32)화 (32/86)

32.

*

소현은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문소리를 듣고 성민이 나올까 싶었지만 다행히 복도는 잠잠했다. 곳곳에 설치된 cctv를 쳐다보며 소현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녁 11시,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오히려 일탈을 강행하듯 기분만큼은 개운하다. 소현은 택시를 잡아 호텔로 향했다.

라운지 바에 도착하자 소현은 자연스럽게 직원에게 다가갔다. 지한의 이름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직원이 소현을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은 사람들로 만석을 이루고 있었다. 대기 시간이나, 예약자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소현의 얼굴이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처럼 인식된 것만 같았다. 소현은 별다른 말없이 직원을 따라 복도로 들어섰다. 라운지와는 사뭇 다른 비밀스러운 중압감이 오늘따라 나쁘지 않았다.

“잠시만요.”

반대쪽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오자 직원이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소현도 덩달아 그를 따라 섰다. 스치듯이 본 얼굴이 낯익었다.

“…….”

배우 박민준이었다. 술을 꽤나 마신 건지 반쯤 풀린 눈을 보던 소현은 다시 직원과 함께 움직였다. 저번에 와본 적 있던 문 앞에 선 소현은 이유 모를 두근거림에 휩싸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직원이 노크하고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존댓말에 지한의 고개가 느리게 문쪽으로 움직였다. 회색빛 눈동자를 본 소현은 가슴을 맴도는 두근거림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와서 죄송해요.”

보고 싶었던 얼굴이라서 그렇다. 직원이 문을 닫자 은폐된 공간이 한층 더 소현의 감정을 치밀하게 조여 왔다. 이 순간만큼은 잡다한 생각조차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저를 주시하는 남자에게 감각이 몰두되었다.

“중대한 일을 해결해 주신 거나 다름없는데, 고맙단 인사를 말로만 하기엔 죄송해서요.”

소파에 앉자 올라섰던 지한의 고개가 똑같이 내려왔다. 잔을 친밀하게 쥐고 있는 손이 느슨했다. 꽤 많이 마신 걸까. 입가로 잔을 가져간 지한이 설핏 웃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어쩔 수 없지.”

지한은 이런 행동을 받아주는 것처럼 말했다. 거기에 소현의 가슴도 한결 풀어졌다. 왜 나를 만나고 싶었느냐고 묻거나, 규칙을 못 지켰다는 식으로 추궁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일어나 나갈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지한이 존댓말로 응수해준 이상, 지금 이곳은 접대 자리나 다름없었다. 장소도 몰입하기엔 적합했다. 덕분에 소현은 일하는 기분으로 지한을 볼 수 있었다.

술을 넘기면서 소현을 바라보는 시선이 길어진다. 이미 샤워한 이후의 소현을 본 적 있으면서도 오늘은 색다르다는 듯 쳐다본다. 정장 차림에 수수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호기심을 가질 만도 했다. 지한이 축축이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씻었네요.”

“네. 운동하고 샤워까지 했어요.”

지한의 눈빛이 일순 예리하게 변했다.

“어떤 운동이요?”

“러닝머신을 좀 뛰었어요. 체력 바닥 내기엔 그만한 녀석도 없거든요.”

“아. 그 운동.”

지한은 낮게 웃으며 느긋하게 자세를 풀었다.

“나랑 하지.”

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같이 운동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섹스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어감이었다. 소현은 지한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법 궁금해졌다.

꽉 막힌 공간이라 지켜보는 이는 없었다. 무엇을 하든 자유롭다. 이미 이곳에서 한차례 지한과 뜨거운 행위를 해본 적 있었다.

“그래서 운동하고 곧바로 온 겁니까?”

소현은 가슴이 저릿했다.

“힘 다 빼놓고?”

끈적한 물음이 소현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았다. 이토록 외설적인 공간에서, 단둘뿐이라는 것을 인지하자 성적 긴장감이 평보소다 몇 배는 거셌다.

“……네. 정지한 씨는 계속 여기서 술 마시고 계셨나 봐요. 과음은 몸에 안 좋은데, 식사는 하시면서 드시는 거죠?”

지한은 테이블에 놓인 과일 접시에서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먹고 있네요. 지금.”

고인 과즙이 혀에 감겨 울리자 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스킨십도 이뤄져선 안 되고, 존댓말로 상황을 유지해야만 하는 지금 이 관계가 순간 제약처럼 느껴졌다.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직원이 소현의 앞으로 잔을 세팅했다. 소현은 세공된 얼음이 담긴 잔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자고 말은 했지만 장소가 이러니 술로 대신 할게요.”

“커피 시켜요.”

지한은 직원을 향해 말했다.

“여기 커피 잘 해. 그렇지?”

“네. 어떤 거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닙니다. 저 술 마실 수 있어요, 오늘은 좀 마시고 싶기도 하고요.”

소현이 병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지한이 그 윗부분을 잡으며 제지했다.

“마시지 마요.”

“…….”

당부하는 말투였다.

“내일 속 쓰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내일의 출근길을 걱정하는 것처럼. 소현의 손끝 하나 닿지 못하게 하려는 듯 지한이 병을 들고 아예 제 앞에 놔두었다. 소현은 하는 수 없이 직원을 보며 말했다.

“전, 아메리카노요. 시럽은 됐어요, 1샷 반으로 부탁드려요. 차갑게요.”

“알겠습니다.”

직원이 나가자 지한의 허벅지가 다른 한쪽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 무슨 힘든 일 있었어요?”

“아니요.”

“술 마시고 싶다면서요.”

“운동하고 가볍게 맥주 한 캔 정도는 하거든요. 기분 상쾌하잖아요.”

소현은 자연스럽게 제가 실수로 흘린 말을 주워 담았다. 성민 때문에 속이 엉망인 터라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털어낼까 싶었다. 그런다고 사라질 일도 아니었지만. 당장 바쁜 와중에 이사까지 생각하려니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소현은 웃으며 지한을 보았다.

“혹시 커피와 위스키 섞어서 마셔본 적 있어요?”

“아니요.”

“전 마셔봤어요. 아이리시 커피 맛이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소현이 옆자리를 손으로 짚으며 벨벳 소재를 어루만졌다. 지한의 시선이 천천히 그 부위로 향했다.

“어떤 맛이었는데요.”

농도 짙은 시선이 감아올리는 듯해 소현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궁금해하시니까 뜸들이고 싶네요.”

제아무리 일적인 상황을 연출했다지만 저런 관심을 보이는 지한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서 상상하면 그만이니, 규칙을 깨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맛이냐면…….”

입을 벌리자 안이 다른 이의 타액을 흡수한 것인 양 늘어졌다. 무거웠던 머릿속이 외설적인 상상에 허물어지며 질척하게 번졌다. 지한은 눌어붙은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아찔한 밀도감이 공기를 밀어내며 소현의 얼굴로 다가왔다. 소현의 눈이 커졌다. 얼굴 옆으로 뻗어진 팔이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궁금해서 입술 앞까지 왔는데.”

끈적한 시선이 흘러내려 입술에 고였다.

“열어서 속삭여 봐요. 숨소리는 덤으로 얹어서.”

거친 숨결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 잡아 벌리는 것만 같았다. 달뜬 숨이 공기에 분산되었다. 소현은 아릿한 감각을 느끼며 입술을 움직였다.

“하……몸은 뜨거워지고 늘어지는데, 시야는 오히려 또렷해져요.”

“…….”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지한은 목이 타는지 잔을 입가에 대었다.

“그거 끝내주겠네요.”

“어떤 점이 그렇게 느껴지시는지 궁금해지는데……물어도 될까요?”

알코올을 넘긴 지한이 답했다.

“강 대리는 잘 모르나 본데, 흥분했을 때와 비슷한데요.”

“그런가요?”

“나는 그러더라고.”

회색빛 눈동자가 가늘고 긴 속눈썹을 헤집었다.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

소현은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보이지 않게 오므렸다.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가슴으로 손길이 지나간 것처럼 빳빳해진다. 허리에도 긴장이 서렸다. 지한은 몸을 움직여 소현의 옆에 앉았다. 푹 꺼지는 깊이처럼 소현의 살결도 한껏 뭉그러졌다. 손을 더욱 오므리자 살결 위로 반달 모양이 새겨졌다. 아찔해서 눈앞이 돌 것만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소현의 몫인 커피를 내려놔 주었다. 차가운 냉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소현이 잔을 들어 목 안을 축였다. 시원한 것이 들어가니 한층 열 오른 몸이 가라앉는다. 입안이 얼얼해져 입술을 떼어내자 지한이 입술 가까이 제 잔을 가져다 대었다.

“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소현이 그곳에 입술을 붙이고 마셨다. 독하지만 풍미가 느껴지는 몰트위스키가 원두의 진한 맛과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쓸고 내려갔다. 잔을 기울여주던 지한이 손목을 내렸다. 불현듯 입술이 떨어진 소현이 고개를 돌리자 끈적하게 물기 젖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강 대리도 이제 나 밖에 안 보입니까?”

몸이라도 섞은 듯 흥분감에 도취된 얼굴이었다. 소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흉흉하게 선 부피감이 눈에 얽혔다. 얼얼했던 속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지한은 제 허벅지 위로 내려놓은 잔을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마치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눈으로는 소현을 쳐다보면서 벌어진 입술을 움직였다.

“아부는 상대방 기분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 립 서비스라도 해요.”

서로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형체를 세운 거로 증명되자 소현은 입술이 따끔거렸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입안으로 혀가 간지러워졌다. 미끈한 것과 만나고 싶어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가 서로 꼬이는 것만 같았다. 운동을 할 때보다 땀이 더 짙게 배어 나왔다. 시선으로, 눈빛으로,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언뜻 모습을 비추는 혀끝에.

“못 하겠으면 입이라도 벌려 봐.”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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