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소현은 그곳에 입술을 부딪치고 싶었다. 들어가 저와 같은 독한 액체가 묻어 있는 향을 나누고 또 음미하고 싶었다.
지금 하면 관계는 끝이 난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빨리 끝내고 싶어 했잖아. 타협점을 찾으려고 안간힘이었다. 소현은 손을 들어 반듯하게 채워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12시네요.”
아까보다 훨씬 더 촉촉해진 목소리가 나왔다. 지한은 그 말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술이었다. 어쩌면 옆에 찍힌 점일지도 모른다. 소현은 농밀해지는 시선을 견뎌내며 웃었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더 늦기 전에요.”
아직은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소현은 반밖에 안 마신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선이 맹렬히 뒤를 쫓았다. 실제로도 벌어진 일이었다. 미련 없이 일어난 지한이 문고리를 잡은 소현의 뒤에 가까이 섰다.
“내가 데려다 주죠.”
흠칫 떨린 어깨 위를 지난 손이 소현과 겹쳐졌다. 문고리 위로 두 손이 진득하게 얽혔다. 지한이 손목을 구부리자 문이 덜컥 열렸다.
“가요. 빨리.”
소현은 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지한의 목소리를 신호 삼아 걸었지만 지금은 제가 이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아 바삐 걷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소현의 가슴으로 새겨지며 의식 되었다. 소현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메두사의 눈이라도 되는 것인 양 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이었다. 지한을 보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안 된다.
로비에 도착한 소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돌아보지도 못한 채로 말했다.
“배웅은 이만하면 됐어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밤이 위험한데 택시 타는 것까지만 보고.”
소현은 제발 지한이 사라져주길 바랐다. 인내심을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는 허벅지가 오늘만큼 원망스러웠던 적 없었다.
“내가 잡아 줄까요.”
로비 너머로 잠식된 차가운 풍경에 소현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돌아간다고 해서 그 집이 소현에게 안정을 줄 수 없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기에 거부감은 커져만 갔다. 소현은 지한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프런트로 향하자 데스크 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웃었다.
“안녕하세요.”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요.”
“예약하셨습니까?”
“아니요.”
“…….”
등 뒤에서 제 의도를 파악하려는 거센 눈빛이 느껴졌다. 머리가 뚫릴 것만 같아 소현은 눈을 감았다. 모니터를 확인한 직원이 말했다.
“현재 스탠더드룸과 스위트룸이 있는데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스탠더드요.”
“네. 서류 작성해 주시고요.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소현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그런 소현의 뒤를 힐끔거리는 직원의 얼굴은 마치 거울 같았다. 억지로 지은 미소를 유지하는 것을 보니 지한이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 예상이 갔다. 펜을 잡은 소현은 제 이름을 적으면서 말했다.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요.”
사실이었다. 성민 때문에 오늘만큼은 그 공간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새벽에 가면 성민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입을 마친 소현이 카드 키를 건네받았다.
“그러기에 내가 말했잖아요. 배웅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지금 이 모습이 지한에게 어떻게 비칠지 말 안 해도 알았다. 소현 스스로 생각해도 꼬리를 한 백 개쯤 단 여우 같았다. 갑자기 예상에도 없던 만남이 이뤄지고, 룸 안에서는 애를 바짝 태웠으면서 절묘한 순간에 발을 빼듯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같은 호텔의 방을 잡았다.
“이런 날도, 가끔 있어요.”
세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이 정도 방어는 해야 했다. 저를 정말 이상한 여자로 생각할 것만 같았다. 다른 호텔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었다. 소현 역시 잔뜩 달아오른 몸을 어서 빨리 찬물로 씻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소현은 카드 키에 적힌 숫자 버튼을 눌렀다.
“눌러요. 이 호텔에 묵으시잖아요.”
지한은 말을 대신해 짙은 숨을 내몰아 쉬었다.
“내가, 방까지 데려다 주죠.”
소현은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감았다. 19층에 도착했다. 엄숙한 복도 카펫을 즈려 밟으며 소현은 방에 도착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 카드 키를 스치자 문이 열렸다. 소현은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잘자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 문 위로 긴 손가락이 펼쳐졌다. 소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손만 잡고 잘게.”
“뭐……?”
몸을 돌리자 지한이 참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현을 내려다보았다.
“손만. 진짜야.”
소현의 가슴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아직도 앞은 흥분감에 절어 있는데, 눈동자는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 하는 듯 간절해 보였다. 소현은 손가락을 움츠리며 마저 문고리를 고쳐 잡았다.
“……들어와.”
댐이 터지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거센 몸집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소현은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덮쳐온 몸집은 아주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윽고 소현의 손가락 사이를 차근차근 엮듯이 잡고서 끌어당겼다.
킹사이즈 침대에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소현은 어둠 속에서 저를 아래로 깔은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끝인 걸까. 지한의 얼굴이 내려와 소현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소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비껴나가듯이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며 다른 한 손으로 소현의 어깨를 비스듬히 밀어 세웠다. 옆으로 돌아눕게 된 소현은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지한은 잡았던 손을 풀며 소현의 다른 손을 잡아 허리를 끌어안았다. 소현의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떨어졌다.
“자 자. 이제.”
소현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정말, 잠만 자자는 거였나? 의문했지만 지한의 숨소리가 급격하게 늘어진다. 알코올 향이 독하게 느껴질 만큼 마신 듯했다. 엉덩이에 맞닿은 형체는 아직도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내가 너무 술에 취해서.”
허벅지가 움직이며 소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래서 강 대리가 데리고 온 거로.”
이 와중에도 지한은 현재 상황을 필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마치 관계를 끊어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 부분은 소현도 동의했다. 참지 못해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내일 당장 지한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졌다. 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참은 거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소현은 싫지 않았다. 일하던 도중에 상대가 취해 방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킹사이즈 침대였고, 그래서 이렇게 엮여 있는 것뿐이라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합리화할 만큼.
“아니면 취한 사람 주워와서 재워주는 거로.”
소현은 숨을 죽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숨결과 밀착된 몸이 의식되었지만 애써 눈을 감았다. 카드 키를 꽂지 않아 내부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소현은 등 뒤에 밀착한 지한의 온기를 느꼈다. 고요한 덕분인지 제 몸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가 점차 강렬하게 들려왔다. 소현이 숨을 참자 등 뒤에 밀착한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탁한 목소리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 들었다.
“내 심장 너무 뛴다.”
소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등을 두드리는 심장 소리를 소현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귀가 멀 것처럼 제 심장이 뜀박질하는 것만 알고 있었다.
“자장가로 들어.”
그런데 지한은 제 것으로 착각하고선 말했다. 소현의 배 언저리에 놓인 손가락으로 더 길고 곧은 지한의 손이 엮여 있었다. 그 부위로 조금 힘이 들어가자 소현의 가슴이 오므라지듯 조여졌다.
온화한 숨결이 붉어진 소현의 귀로 젖어 들었다. 정말 잠든 건지, 나긋하게 변한 숨이 아스라이 소현의 뺨에 스며들 때에도 지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현은 눈을 감은 채 작게 호흡했다.
이 순간 쾌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욕구도 꺾였다. 그저 안고 있을 뿐인데, 머릿속이 지한의 숨결과 체향으로 차올랐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오늘 겪었던 고단한 일들을 덮어내고, 저를 단단히 끌어안은 두 팔이 이불처럼 힘들었던 순간을 또 덮었다.
소현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와 박자를 맞추며 소현은 잠에 빠져들었다.
*
“요즘 지한이 녀석 뭐하고 있어.”
창가로 뒷짐 진 노인의 목소리가 회장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박 비서는 중요한 사안을 알려주는 것처럼 노인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주름진 눈두덩이가 불만족스럽게 내려앉았다.
요일 별로 나눠 놓은 스케줄 표엔 지한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열돼 있었다. 호텔에서 술 마시고, 먹고, 자는 일이 전부였던 뻔한 일정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노인의 눈동자가 흡족하게 변했다.
“회사에 여럿 나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뭐 했는지 아는 거 있나?”
“현진 기획 미팅만 나간 거로 압니다. 담당자 부를까요?”
“그래, 올라오라고 해.”
“네.”
여러 번 왔으면 제 얼굴도 보고 갈 법도 한데, 필요한 것만 쏙쏙 빼먹고서 발을 뺀 손주가 얄미운 건 당연했다. 하나 그마저도 좋게 봐줄 수 있는 건 지한이 회사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 관심의 일환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본가에 그렇게 오라고 목이 터져라 말할 땐 먹히지도 않더니. 회사엔 자발적으로 드나들 정도로 뭐 먹을 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마케팅 홍보 김장…….”
“알고 있네.”
노인은 통성명은 필요 없다는 듯 저를 향해 고개를 한껏 숙인 김 부장을 손짓으로 불렀다. 김 부장은 신중한 걸음으로 소파에 착석했다. 노인의 관심 어린 얼굴이 부담스러워 진땀이 날 정도였다.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요즘 지한이와 뭘 그렇게 하는가?”
“아,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재상 전자 디스플레이 광고 때문에 미팅을…….”
“그것뿐이야?”
“예?”
노인은 뭔가 캐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득 담고서 응시했다. 김 부장의 눈치가 빠르게 발동되었다.
“광고보다는…….”
“그래.”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잿밥? 노인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키웠다. 김 부장은 그 표정에 제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지한이 강 대리 모르게 움직이라고 했지, 회장님 모르게 하지 말란 소리는 안 했었다. 그러니 고발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현진 기획의 강소현 대리라고, 정지한 군이 꼭 강 대리를 만나려고 미팅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딱 봐도 여자 이름이었다. 노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촉을 세우며 번득거렸다.
“박 비서. 한 번 알아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