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지한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몇 번씩 만나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잠깐 즐기다가 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고는 치지 않을까 주의 깊게 지켜보던 것이 애석해질 만큼 골치 아픈 일까진 만들지 않는다. 노인이 개입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여자와 호텔이 아닌 회사에서 만난다니, 이건 또 살다 살다 처음 보는 행각이었다. 진작 지한과 즐기는 사이라면 굳이 회사까지 나와서 만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생각이 깊어지느라 매서워지는 얼굴을 보며 김 부장은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재벌가의 암투극을 엿본 것처럼 진땀이 배겼다. 괜히 제가 한 말 때문에 소현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김 부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저, 회장님.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하지만 제가 봐온 강 대리는 아주 참하고 싹싹합니다.”
“으음?”
“능력도 좋고,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정지한 군을 귀찮아하고요.”
“그게 무슨 소린가?”
“네?”
“지한이를 귀찮아 해?”
아뿔싸, 소현을 보호하려던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번졌다. 김 부장은 손주를 끔찍하게 아끼는 성정을 건드렸을까 재빨리 말했다.
“그게 정지한 군이 자꾸 미팅을 가져 달라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귀찮아 한다는……아니, 피곤해하는.”
“편히 얘기하게나.”
엄한 목소리에 더는 포장하기도 어려웠다. 김 부장은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말했다.
“정지한 군이 강 대리한테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건지, 매번 회사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미팅을 해도 일 얘긴 별로 안 하고 강 대리 얼굴 보는 거로 시간을 보냅니다.”
“정말인가?”
“네. 주말에도 불러달라고 해서 제가 얼마나 진땀을……하하.”
“연락처도 모르는 겐가?”
“네?”
“지한이 녀석 말일세, 여자가 마음에 들었으면 진작 번호를 얻다 못해 다른 거라도 했을 녀석인데. 지금 자네 말을 들어보면 우리 지한이가 그 여자한테 쩔쩔매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은가?”
“아니, 쩔쩔매는 건 아니고요.”
“그럼?”
“매달리는 것쯤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맞는 소린가. 김 부장은 머릿속이 패닉이 되었다.
“저, 헤어지라고 회장님께서 나설 사이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강 대리는 정지한 군을 남자로 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남자로 안 보는 건가?”
“네?”
김 부장의 표정이 아연실색했다.
“지한이가 얼굴이 부족하나, 능력이 부족하나. 어? 집안이 빠지는 녀석도 아닌데.”
자꾸 탈출하려고 하는데 어느 곳으로 도망치든 구덩이로 빠지는 그림이었다.
“강 대리가, 그걸 알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기야, 지한이 제 입으로 뭔가를 떠들어대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 일리가 있었다. 노인의 표정이 한 뼘 더 진지해졌다.
“지금 하는 말 전부 사실이겠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내 한 번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데.”
“아, 회장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강 대리는 전혀 정지한 군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장님께서 나서면 정지한 군이 난처해질 수도…….”
“그럼 박 비서, 자네가 볼 텐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 만나는 건 안 됩니다.”
노인의 얼굴이 폭발하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만나서 잡아먹는다고 했는가? 그냥 한 번 보는 걸세.”
“대체 그 이유가…….”
노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며칠 안 남았네.”
“어떤 게 말입니까?”
노인이 아침에 일어나 수십 가지 영양제를 먹는 것 다음으로 체크하는 일이었다.
“출국이 얼마 안 남았어.”
지한이 미국으로 갈 날짜가 코앞이었다.
“만약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강 대리라는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지한이가 여기 더 머물 수도 있지 않은가?”
김 부장의 눈동자가 굴렀다. 확실히 그간 지한의 모습을 보건대 그건 여자한테 매달리는 모양새였다. 소현을 보는 눈동자는 매 순간 어떻게 하면 제 옆에 더 붙여 놓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만 같았고, 간혹 입에 넣고 굴리는 것처럼 소현을 보는 눈빛이 끈적했었다. 소현의 움직임이나 표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 같았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도 노인은 기세가 팔팔해졌다.
“지한이 녀석을 불러보면 알겠지.”
노인은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자 얘기에 총알처럼 튀어나오면 그게 맞는 걸세.”
전화를 하려다가 노인이 멈추었다. 아직 10시밖에 안 되었다. 지한이 어제 잠들었다면 아직 수면 중일 거였다. 노인은 창문 너머로 열렬히 쏟아져 부서지는 햇살을 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두툼한 손이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그 위를 덮었다.
*
나흘. 소현은 관계가 끝날 지점인 출국 날짜를 되새기며 펜대를 굴렸다.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일분일초가 신경 쓰였다. 그때 사무실 안을 헤집으며 지아가 다가왔다.
“대리님, 장유란 컨택 성공했나 봐요. 지금 막 에이전시한테 연락 왔는데 하겠다고 했대요.”
“그래.”
어제 이미 들었던 말이라 소현은 건조했다. 놀랍기는 했다. 정말로 지한이 해낸 거니까.
“아우, 진짜 간 쫄렸는데 다행이에요. 그쵸?”
“응.”
그게 저를 위해서였다는 생각에 소현은 이유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펜대를 멈추며 의자 뒤로 체중을 실었다.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동자가 발아래에 고정돼 있다가 올라왔다.
“별거 아니었겠지.”
지한이라면 손 하나 까딱할 만큼 손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상 전자 사장과도 안면이 있으니 인맥이 넓다는 가정 아래, 장유란과도 친밀한 사이였을 지도 모르고.
“……장유란 하고 친하나?”
어쩌면 지한과 밀접한 관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현의 머릿속을 깊게 찔렀다. 개인적인 사유로 안 하겠다고 못 박은 마음을 돌릴 정도면 꽤……순간 소현의 눈썹이 앞쪽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몸으로 엮인 적 있나.
“아니다, 됐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소현은 눈을 감으며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업무나 하자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보았지만 계속 지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게 하는 행동이나, 눈빛. 말투를 보건대 충분히 다른 여자와도 그럴 수 있는 위인이다. 정조관념이 없는 녀석인 건 초반부터 알고 있던 거였다. 처음 마주쳤던 것도 다른 여자와 입술을 부딪치는 장면이었으니까. 소현의 눈꺼풀이 일그러졌다.
나와도, 그런 식으로 만나기도 했고.
그러니 키스쯤은 우습겠지. 가볍고 또 가벼운 남자였다. 지한과 뭘 어떻게 하고 싶어서 이런 걸 생각하는지, 제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소현은 저를 기다리는 업무를 확인하고선 파일을 열었다. 하얀 배경에 떠다니는 커서가 무의미하게 깜빡거렸다.
그럼 다른 여자에게도 그럴까.
심장이 너무 뛴다고, 자장가로 들으라는 말도 할까.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리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지 소현의 머릿속을 드나들며 어지럽혔다. 어제의 잔상을 만들어내고 이제는 체온까지 되살아난다. 흉포함으로 새겨진 근육은 소현을 안는 거로 만족한 듯 얌전히 잠들었다. 야한 입술로 소현을 안고 곤히 잠든 숨소리를 들려주었다.
끌어안았던 단단한 두 팔이 문제였다. 육체적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안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닿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심장이 어제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다.
소현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할 요량으로 담배를 태울 생각이었다. 제 분신 같은 핸드폰을 들고 재킷까지 챙기자 핸드폰이 울렸다.
양반은 못 되는구나, 그런 시답지 않은 농담도 나오질 않았다. 소현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 사이에도 끈질기게 진동하며 재촉한다. 머릿속까지 울렁거리는 것만 같아 소현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제 갔어.」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소현의 고막을 침투했다. 소현은 마른 입술을 훑으며 말했다.
“새벽에……갔는데.”
언제나 새벽에 나갔었고,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가지 안 한 게 있었다.
「왜 안 깨우고 가.」
그것이 화가 나 일어나자마자 전화한 듯 보였다. 소현은 재킷을 한쪽 팔에 올려두며 말했다.
“내가 움직여도 눈도 못 뜨던 데 너 같으면 깨울 수 있겠니?”
품에서 벗어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지한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날처럼 잠든 눈꺼풀을 억지로 벌리게 해 인사하기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것 말고는 어제도 별다를 것 없는 헤어짐이었다. 잠든 지한의 얼굴을 조금 구경하다가 나온 것 빼고는.
“지금 일어난 거야? 팔자 좋다.”
소현은 제 속마음을 감추는 것처럼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라도 지한이 제가 쳐다본 걸 알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방향을 돌리는 거였다. 지한은 무거운 숨을 몇 번 고르더니 다시 이불에 파묻히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내 즐거움을 지금 네가 빼앗았지.」
소현은 의아해 말했다.
“내가 뭘?”
「깨우고 가. 내가 아무리 잘 자고 있어도.」
예상치 못한 말에 소현은 입을 움직이는 걸 잊었다.
「살이라도 잡아 뜯어서 깨워서 너 보게 해. 알았어?」
나직한 목소리에 소현은 심장을 억눌렀다. 제가 꼭 즐거움의 일부분인 것처럼 말을 하니, 두근거림이 거세져 어지러웠다. 중독성 강한 니코틴을 물고 있지만 귓가에 닿은 목소리를 이기진 못했다.
「장유란은. 한다고 했지.」
그 이름이 나오자 소현은 기분이 아래로 처박혔다.
“그거 확인하려고 전화했니?”
「겸사겸사.」
“다시 한 번 고마워. 장유란 배우 한다고 오늘 아침에 연락받았고, 계약 진행 중이라고 해서 한시름 놓았어.”
어떤 사이인지 묻고 싶어 하는 질문이 앞다투어 나오려 했다. 소현은 입술을 오므리며 필터를 가두었다. 하아, 연기를 흘리자 이글거리던 속이 한결 가라앉았다.
“너무 고마워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갚을 건 없고.」
뭐라도 얘기해줬으면 했다.
「어제 얼굴 본 거로 됐어.」
큰 계약을 성사시켜준 거나 다름없는데, 고작 그거면 되었다니.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발언에 소현은 목 안이 불편해졌다. 어쩌면 지한은 횟수를 다 사용하면 그만 만날 사이에 선물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흘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며 소현이 물었다.
“어제 그건 감사 인사였고, 이거는 개인적으로 들어주고 싶은 거야.”
굳이 만날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소현은 제 스스로가 낯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지한이 큰일을 해준 것이기도 했다. 거기다 감정을 숨긴 채 말하는 건 소현이 잘하는 거였다.
“얘기해 봐. 이런 기회 두 번은 안 오니까.”
「그럼 사양 않고 해볼까.」
소현은 지한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제게 뭘 원하고, 뭘 바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