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35)화 (35/86)

35.

「전화해도 돼?」

그 말에 소현의 인상이 구겨졌다.

“전화? 지금 하고 있잖아.”

「언제든 해도 되는지 묻는 건데.」

소현은 예상 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만남을 원하거나 횟수를 늘리는 방법을 말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저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때아닌 전화라니.

「내가 부른다고 네가 그때마다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현은 청각을 세웠다. 침대에서 벗어난 것인지 목소리가 곧게 선다.

「열심히 회사에서 아저씨들하고 놀아줘야지.」

나를 생각해서 고작 전화인 건가? 소현은 낯설게 답했다.

“언제는 그런 거 생각하고 만났니? 정시 퇴근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이제 신경 쓰려고.」

“너 그런 거 정말 안 어울려.”

「아저씨 좋아하는 취향까지 이해해주는 걸 보면 대단하긴 하지.」

내가 아저씨를 왜 좋아해? 소현은 울컥해 목소리가 나갈 뻔했다.

「대신 잠은 집에 가서 자야 된다?」

그보다 먼저 튀어나온 사나운 음성이 말문을 막았다.

「확인 전화할 거야.」

소현은 굳은 입술에서 담배를 빼내었다. 이건 줘도 못 먹는 게 아니라, 소름 끼칠 만큼 똑똑한 거였다.

「옆에서 일어나는 건 안 되니까 내가 제일 먼저 네 목소리 듣게 해.」

한 번 만나면 그만일 횟수보다 더 장기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거였다.

「몇 시에 일어나.」

그 말에 소현의 정신이 돌아왔다.

“일어나는 시간이야 항상 다르지.”

「그럼 눈뜨면 네가 해.」

“……그래, 그거면 되니?”

「어. 내가 못 받으면 다시 전화하고.」

“바쁘면 못해.”

「안 바쁠 때 해. 내가 받을 테니까.」

꼭 마치 제시간을 전부 소현에게 사용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소현은 이런 배려를 받아본 적 없었다. 전화를 못 받는 상황이면 문자라도 하라는 연인들이 태반이었다. 그럴 수 없던 상황을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 그들은 이해해줄 수 없었다. 너 같은 사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말도 헤어질 때마다 종종 들어왔었다.

알고 있다. 주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소현이 애정을 준다고 생각했지만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그마저도 허덕거렸다.

「이제 예쁜 목소리로 속삭여봐.」

그런데 지한은 그 허덕거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했다. 소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숨소리 섞어서?”

「최고지.」

귓가에 달라붙는 숨소리가 햇살처럼 포근하게 번졌다.

「말 나온 김에 해 봐.」

“하아……마침 담배 태우고 있는데.”

이런 괴상한 주문도 익숙해진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소현은 제 얼굴을 덮는 빛의 장막을 음미하며 필터를 빨아들였다. 연기를 흘려보내는 숨소리가 몇 번씩 이어졌다. 불현듯 지한이 물었다.

「전화하면서 다른 거 해도 되지.」

“…….”

「이것도 사적인 건가?」

이 와중에도 착실하게 소현이 내건 조건을 지키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끝에 다다른 담배를 내려다보며 소현이 말했다.

“뭘 하든 내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그러자 입술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전화 끊지마.」

질척한 목소리가 귓바퀴로 흘러 들어갔다. 소현의 눈동자가 경직됐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지한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소현은 넋을 놓았다가 타들어가는 담배 끝에 손이 뜨거워져 비벼 껐다.

「이제 간드러지게 얘기해봐.」

예전에 처음 지한과 식사할 때,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는 걸로 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소현은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사무적이지만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지한 씨, 곧 있으면 점심인데 그만 일어나고 식사하세요. 아, 메뉴는 정하셨나요?”

그러자 나른해진 숨결이 웃음처럼 번졌다.

「갈 거 같아.」

*

지한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핸드폰은 암전 됐지만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지한은 여전히 전화를 받는 모습이었다.

잠이 다 깰 정도로 야한 음성이었다. 침대에서 치솟는 신음도 섹시했지만 벌건 대낮에 그런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이 몇 배는 더 자극적이었다. 깨어난 뒤 늘어진 몸은 원래의 형태로 굳건해졌다.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익숙하다는 듯 빳빳하게 고개를 든 것을 방치해두었다.

그때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이 불빛을 반사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지한은 액정에 찍힌 낯익은 번호를 보았다.

받지 않을까 했지만 기분도 좋고, 푹 자고 일어나 상쾌했다. 지한은 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나 바빠.”

「이 녀석, 가만 보니 이게 할애비한테만 하는 단골 대사였구만.」

자다 일어난 것 다 안다며, 목소리만 듣고 제 상황을 맞추는 게 신기해 지한은 입술 끝을 올리며 응수해주었다.

“왜.”

「오늘은 강 대리라는 여자 안 만나느냐?」

그 말에 지한의 눈이 사납게 튀었다.

노인은 오늘은 일찍 퇴근했다며 떡밥을 던지고서 현혹시켰다. 본가로 향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한은 거대한 저택 앞에 도착해 차 문을 열어젖혔다. 거대하고 견고한 철창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가정부가 친밀한 목소리로 지한을 반겼다. 그 소리조차 지한에겐 거슬렸다.

찰캉, 묵직한 쇳덩어리가 풀어지자 지한이 안으로 들어갔다. 더럽게 넓은 가운데 구석구석 공들여 가꾼 조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감흥 없이 걸어가던 지한을 박 비서가 마중 나왔다.

“이제 오십니까?”

지한은 박 비서의 가슴팍으로 자동차 키를 안겨주었다.

“가서 제대로 대요. 문 열고 왔어.”

빠르게 저택에 도달한 지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여유롭게 차를 즐기던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조사했어?”

“음?”

“강소현에 대해 알아봤냐고.”

지한은 가운데 의자에 앉은 노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노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무슨 소리냐. 네 녀석이 매번 미팅에 나간다고 해서, 내 그렇게 얘기한 거지.”

노인을 가만히 주시하던 지한이 반대편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꽤 급하게 온 모양이다. 지한은 입고 잔 듯 다 구겨진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더운지 눈을 감은 지한이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할아버지.”

“왜.”

“손 버릇 나쁘면 안 돼.”

그 말에 뜨끔한 노인은 찻잔으로 입을 막았다. 실은 조사를 하긴 했었다. 깊게 알아본 건 아니었고 회사 이력과 간략한 신상 정도였다. 자잘한 것만 봐도 한 번에 터득할 수 있는 눈이었다. 강소현이라는 여자와 무슨 사이인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제가 백번 말하면 한 번 귓등으로 듣던 본가에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이야. 애석함에 굳게 다물린 노인의 입이 열렸다.

“애인이라도 생긴 게야?”

노인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지한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그 표정 하나하나 감별해 내겠다는 듯이 노인이 되물었다.

“좋아하는 여자 없어?”

반응하지 않는 지한을 파헤쳐보자는 심산으로 노인이 또 물었다.

“서른 살 이상에, 응? 당차고 싹싹하고 전문 직종에 근무하는 참한 여자 말이다.”

“할아버지.”

“왜?”

“내가 환장할 얘길 자꾸 하네.”

그제야 지한의 눈꺼풀이 열렸다.

“알아봤지?”

소파 등받이에 붙어 있던 허리가 앞으로 숙여졌다. 날카로운 눈빛이 제게 향하자 노인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자세를 고쳐 잡은 지한의 시선에 노인이 못 이기겠다는 듯 실토했다.

“박 비서가 가져온 거 잠깐 훑어 보기만 했다. 만난 건 아니니까 눈에서 힘 빼거라.”

“만나지 마.”

낮게 읊조리는 말에 담긴 의미를 노인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끼어들면 재미없어.”

지한은 제 생활에 참견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한데 이번만큼은 그 모습이 다르게 노인의 눈에 비추었다. 마치 넘으면 안 될 선이라도 있는 것인 양. 노인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참견해야만 했다. 한국에 남게 하고 싶으면 꼴려서 못 견딜 만한 걸 가져오라던 녀석이 아닌가. 노인이 보기엔 그것이 현재로선 그 여자였다. 조금 전, 지한은 스스로 환장할 얘기라고 했으니 자백한 거나 다름없었다.

“네가 뭘 하고 돌아다니든지 할애비 귀에 다 들어온다는 거 알면서 그러느냐.”

“할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식어.”

“어디 가?”

소파 등받이로 팔을 길게 뻗은 지한이 눈짓으로 제 골반을 가리켰다. 노인은 이 무슨 배은망덕한 표현이냐며 혀를 차려다가 말았다.

“그 처자랑 마음 있는데 잘 안되는 거면, 할애비가 도움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무슨 도움.”

“왜, 들어는 볼 테냐?”

“웃겨서. 한 번 해 봐.”

노인은 소싯적 정략결혼을 한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잘생긴 외모로 재벌가 여식들의 입에 회자된 적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백발이 만개하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는 감춰지질 않았다.

“네 녀석이 날 닮아서 어디 꿀릴 외모는 아니고, 돈이 모자라서 빌빌 거리는 것도 아니지. 허우대 하나는 멀쩡해서 눈 있는 여자라면 싫지 않을 게야. 네 할미를 보거라. 내 얼굴에 홀딱 반하지 않았느냐.”

“할머니 지금 없는데.”

“옛날 얘길 하는 거지, 살아생전에 내게 얼마나 푹 빠졌었는지 너도 봐서 알지 않느냐?”

지한은 적적한 노인의 얘기에 맞춰주는 것처럼 듣고 있었다.

“그 처자도 네게 마음은 있을 거야.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울 수도 있지.”

“그래서.”

“네가 곧 떠날 사람이라서 더 말을 못 하는 걸게다.”

은근히 제 욕심을 밀어 넣었다. 김 부장의 말로는 지한이 매달리는 꼴이라는데, 그렇다면 과감한 결정을 내릴 거였다. 지한은 느리게 웃었다.

“틀렸어.”

“뭐야?”

“그 여잔 내가 떠날 사람이라서 만나는 거야.”

그럴 리가, 이건 예상 밖이었다. 지한이 곧 사라질 녀석이라서 만난다니.

“할아버지 도움 하나도 안 되는데 어쩌지.”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인 양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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