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때마침 가정부가 다가와 지한에게 말을 걸었다.
“마실 걸 준비해 드릴까요?”
“제가 꺼내 마시죠.”
지한은 온 김에 뭐라도 해치우고 가겠다는 듯이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노인의 컬렉션이 즐비해 있었다. 빈티지 와인부터 시작해 시중에선 구할 수도 없는 귀한 술들이 지한의 간택을 바라듯 번쩍거렸다. 안에서 길쭉한 병을 꺼내든 지한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만요, 술상을 봐올게요.”
“괜찮아요.”
앞에 있는 찻잔에 술을 따른 지한이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한 모금 마셨다. 노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그놈에 술 좀 그만 마시거라.”
“수면제 먹는 거 싫어하면서.”
수면제라는 말에 노인의 눈이 또 급격하게 떨렸다. 지한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입술에 잔을 밀착했다.
“실수.”
꺼내면 안 될 얘기였다. 지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수면제는 노인에게 죄책감이자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었다. 노인은 두 손을 맞잡으며 텁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도 돼. 적당히만 한다면야.”
지한의 시선이 들렸다. 거대한 저택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노인의 양쪽 어깨가 쓸쓸해 보였다. 노인에게 자랑이었던 두 아들은 이미 가정이 생겨 나간 지 오래였고, 함께 늙어가던 아내는 병마를 이기지 못해 생을 마감한지 3년 째였다. 거대한 부를 이용해 누구보다 윤택한 삶을 누리고 사는 건 어쩌면 도려내진 속에 외로움을 채우려고 그런지도 모른다.
“네 어미 때문에 내 속이 이미 한 번 무너졌었다.”
그리고 노인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여느 집안 자제들처럼 어릴 적부터 외국에 보내놓고 엘리트 코스를 밟던 여자였다. 아들밖에 없던 집안에 유일한 여식이라서 그런지 노인은 저를 닮은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수면제를 과다로 복용해 실려갔을 때에도 축 처진 여린 몸을 들쳐 안고 뛴 건 노인이었다.
“그런데 이젠 네가 내 속을 썩이는구나.”
노인이 오랜 아픔이 묻은 얼굴로 지한을 쳐다보았다.
“그런 것도 애미를 닮은 게야?”
“내가 뭘.”
지한은 다리를 교차하며 꼬았다.
“몰라서 묻느냐. 정상적인 만남을 가져야지.”
시선을 떨어뜨린 지한이 혼잣말했다.
“정상적인 만남이 뭐지.”
단 세 번의 숫자, 오직 육체적인 관계로만 사용되어야 할 횟수.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 관계.
카페에서 본 소현은 선을 만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한은 당장에 소현을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본능과 이성을 계산하는 여자에겐 단편적인 만남이 제격이었다. 그렇게라도 당장 소현을 옆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어디 만날 게 없어서 그런 여자를 만나느냐. 네가 가길 원하다니.”
제 성격과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놀아본 적도, 잡혀준 적도 없었다.
“그렇게나 자주 보는데, 정조차도 생기지 않는단 말이냐?”
지한은 단숨에 알코올을 넘기며 찻잔을 내렸다. 둥그런 잔이 손가락에 걸린 채 다리 옆에서 흔들렸다.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어.”
제멋대로인 내 세상에 법을 세우는 여자였다.
자신도 오래 머물 생각이 없고, 소현 역시 사생활에 극도로 조심스러워했으니.
규칙을 지키지 않는, 고삐 풀린 정지한은 상종 안 해줄 거였다. 소현은 입술 안에 혀는 뜨거워도 상황적인 면에선 냉철해지는 여자였다. 잘 알기에 그녀가 만들어 놓은 상황 안에서 참는 거다.
“예정대로 가야지.”
그거라도 안 하면 소현이 관계를 완벽히 끊을 지도 모른다. 저를 속인 거냐고 실망한 여자를 다시 붙잡는 건 해보지 않아 자신 없었다. 승산 있는 쪽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 우선은 전화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니 출국한 다음을 기대할 수 있었다. 지한은 으깨듯이 잔 표면을 물었다.
“내 눈만 안 돌게 하면.”
예정대로 이뤄질 거다.
*
어둑한 밤공기가 웃는 소현의 폐로 들어갔다.
“최 사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탁, 차 문이 닫히고 새빨간 등불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개폐 호흡을 하듯 한껏 갈비뼈를 벌린 소현이 오므리며 뒤돌아섰다. 팀장과 한 대리, 오늘의 자리를 함께한 든든한 아군이었다.
“수고하셨어요, 팀장님. 한 대리님도요.”
“금요일이라서 달릴 힘이라도 있지. 오늘 월요일이었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맞아요. 어후, 아까부터 넥타이 풀고 싶어서 죽을 뻔했습니다.”
5시부터 새벽에 가까워지는 11시까지, 두 업체의 광고주들과 이어달리기 하듯 연달아 만난 터라 뱃속은 기름진 저녁 식사부터 술까지 포화상태였다. 피곤함과 끝났다는 해방감이 찌든 눈동자들이 둔탁했다. 소현 역시 조절해 마셨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억눌려 있던 알코올이 힘을 발휘하는 건지 수위가 간당간당했다.
“저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소현은 축 처지는 고개를 숙이며 코트 주머니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핸드폰을 꺼내면서 다른 한 팔로는 도롯가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휘적였다. 매정하게 지나가는 차량을 보던 소현이 한숨을 흘리면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금세 전화를 받는다.
“나 이제 통화돼.”
소현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노란색 차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쌩 지나가는 차가 애석하다는 듯 소현이 말을 흘렸다.
“택시가……안 잡혀.”
「얼마나 마신 거야.」
지한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구겨진다. 소현은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적당히, 했어. 적당히.”
3시간 전에 지한에게 전화가 왔었다. 받지 못했고 그래서 제가 여유가 될 때 콜백을 했다. 솔직히 말해 이걸 기억하는 뇌가 신기할 정도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뿜어대는 차들을 보며 소현은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걸 참았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만큼 다리가 무거웠다.
「빨리 집에 가.」
“아직 못 탔어.”
「뭘?」
“택시, 택시 타려고 한다고.”
「부르면 되잖아.」
묘하게 날이 선 지한의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도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는 이게 더 빨라.”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 손끝을 까닥이자 택시가 정확히 앞에 멈춰 섰다. 소현은 빙긋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운전기사를 향해 소현이 취한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삼성동…….”
딸국, 소현은 입을 막았다가 그 손을 떼어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집 주소를 말하고 난 뒤에야 소현은 시트에 편히 기대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지한이었다.
「탔어?」
“어, 이제 가.”
시트에 머리를 기댄 소현은 주머니로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익숙하다. 침묵 또한. 소현은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 감았다.
처음 지한이 전화를 원했을 때, 소현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전화하면 하는 대화라고는 사적인 얘기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걱정과 달리 지한의 통화는 별거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속한 대로 전화하면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현을 반겼다.
일어났어?
어.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샤워해야 하니까 끊으라고 하면 또 전화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다시 전화를 걸면 이어폰을 끼라고 했다. 그리고 출근 준비하라며 소현을 놓아준 뒤 지한은 말이 없었다. 마치 생활 소음을 흡수하듯. 그래서 소현은 지한과 통화할 때 블루투스 이어폰을 꼭 착용해야만 했다.
간혹 밥을 먹는다든가, 담배를 태운다던가 지금 뭘 하고 있다는 평범한 말을 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느냐는 소리는 소현의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늘어진다.”
저 역시도 그런 얘길 지한에게 하고 있었다. 혼잣말처럼, 그러나 듣는 이가 있는 말들이었다.
「…….」
침묵이 어색하지 않는 남자라서 그럴까. 소현은 불현듯 몸이 서늘해져 제 한쪽 팔을 감싸 문질렀다.
“너, 짐은 다 쌌어?”
「…….」
지한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소현이 눈을 뜨며 남은 날짜를 손가락을 접어 세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금요일……내일, 내일모레 출국하잖아.”
「알아서 해.」
그 말에 소현은 머릿속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럼 우리 토요일에 보는 거야, 일요일에 보는 거야?”
「언제 볼래.」
“네가 횟수 쓰는 건데, 네가 정해야지.”
날짜를 세느라 세 개만 접힌 손가락이 굳은 것처럼 펴지질 않는다. 쿡쿡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울렸다. 술이 과했나. 소현은 어른거리는 눈동자로 창밖을 보았다. 현란한 네온사인이 창문 위로 미끄러지며 뒤엉켰다.
“아직 안 정했으면 토요일 밤에 보자. 밤이 좋겠어…….”
어두울 때 만났으니, 그때 헤어지는 게 어울렸다.
「그러던가.」
덤덤한 목소리에 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라면 하도 많이 만나 와서 이별 또한 익숙한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헤어지면 끝인 만남들만 그동안 이뤄져 왔으려나. 지한은 배우 못지않게 잘생긴 편이었고, 그러니 접근하는 여자도 많을 거였다. 외국에 나가면 문란함에 날개 단 듯 펄럭거릴지도 모르지. 소현은 어쩐지 눈가가 욱신거렸다.
“나 졸리다. 그만 끊자.”
「도착할 때까지 해.」
“하아……떠들기 귀찮은데.”
「내가 귀찮은 거겠지.」
그 말에 소현은 조소했다.
“그래, 네가 귀찮아.”
잠들고 싶을 만큼 취했는데 귀 기울여 집중하게 만드는 네가, 소현은 성가시고 미웠다. 침묵이 길게 이어진다. 전화가 끊겼나, 늘어진 손으로 확인한 소현이 쨍한 액정 불빛을 보며 말했다.
“정지한 너 엄청 귀찮은 사람이야.”
「…….」
“회사에, 미팅에, 사람 놀라게 하고 또 괴롭히더니…….”
어차피 떠나야 하는 남자다.
“그래서 내가 널…….”
소현은 말을 멈추었다.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그런 남자에게 감정을 흘려봤자 좋을 게 없다.
「나 왜.」
그 말에 소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내 일상이.”
모든 것을 평범하게 만드는 얼굴과 독선적인 말투, 오묘한 빛을 띤 회색 눈동자는 현실을 생각나지 않게 할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었다. 심장을 떨어뜨릴 만큼 당황시키고 또 머리끝까지 새하얘지는 쾌락으로 잡아 데려가고.
“망가진 거 같아.”
그래서 남들 몰래 감춰두고 있었는데 어느 새 그 맛에 길들여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지한이 떠난 뒤 정상적으로 돌아올 일상을 생각하니 한없이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제게는 일이 전부였고 사랑했는데. 소현의 귀로 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걱정 마. 나도 요즘 너 때문에 제 정신은 아니니까.」
깊숙이 파고 들어 소현의 가슴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