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37)화 (37/86)

37.

차가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현기증에 소현은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끊자.”

제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그만 끊어.”

혼잣말처럼 소리 내 말한 소현은 크게 숨을 내뱉으며 택시 기사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문을 연 소현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긁어내는 심정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지만 더 어지러워질 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소현은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간신히 걸어갔다. 흐릿한 시야로 제 문 앞에 서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틀렸다는 음성이 울렸다.

“하아…….”

이것마저 안 도와주는 구나. 숨을 가다듬은 소현이 검지를 빳빳하게 세워 숫자를 눌렀다. 삑, 삑, 삑……두개를 더 눌러야하는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소현의 눈이 경직됐다.

“아…….”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성민의 얼굴이 시야로 거세게 밀려들었다. 삽시간에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이 전부 빠져나간다. 휑하게 비워진 머리를 대신해 눈동자가 열린 문에 적힌 호수를 보았다.

1602호. 소현의 집이 아니었다.

“술 마셨어?”

바로 옆집이었다. 소현은 뒷걸음질 했다. 놀란 탓인지 구두 굽이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기며 소현을 끌어당겼다. 밧줄에 묶인 것처럼 배가 움푹 팼다. 소현은 소스라치게 반응하며 성민의 가슴팍을 밀었다.

“이거 놔, 실수였어.”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현의 손가락만 구겨졌다.

“실수야.”

몇 번씩이고 다시 말했다. 실수야, 실수. 알코올에 녹아 휘어지는 발음은 누가 봐도 설득력 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실수가 아니라 그리워서 찾아온 거 같은데.”

소현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민은 눈으로 웃었다.

“이번엔 맞게 봤지?”

너무 빨리 뛰어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성민이 팔을 구부리자 늘어진 소현의 몸이 밀착하며 달라붙었다. 허벅지로 다리가 엉켰다. 소현은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발버둥 쳤다.

“비켜, 내 몸에 손대지 마.”

“들어 와. 물이라도 먹여야겠다.”

소현은 저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지금 상황이 공포스러웠다.

“놓으라고!!”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네가 꼬리치면 나도 참기 힘들어.”

“싫……!”

소현의 손목을 잡은 부위로 거센 힘이 실렸다.

“너는 항상 입으로는 싫다고 하지.”

피부가 짓눌렸다.

“몸은 솔직해서, 내 집에 찾아온 거잖아.”

부들부들 떨리던 소현의 손가락이 견디지 못해 펼쳐지려 했다. 소현은 핏대가 선 눈으로 쳐다봤다.

“내 말을 언제나, 못 알아먹는 건 너밖에 없어. 개새끼야.”

성민은 거기에 자극을 받은 미친개처럼 웃었다.

“그 입, 가만두고 싶지 않아지네.”

취했으니 얌전히 들어오라던 말은 사라지고 대신해 강압적인 움직임이 이뤄졌다. 부딪치는 상황에서 소현의 구두가 문턱에 걸렸다. 손으로 벽을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선을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소현은 복도가 울릴 만큼 소리쳤다.

“이거 놔!!”

“조용히 해.”

“뭘 조용히……!!”

그때였다.

“저기, 무슨 일이십니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일그러지던 소현의 눈이 희망이라도 본 것처럼 밝아졌다.

“복도가 시끄럽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성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현을 잡은 손을 놓으며 웃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1602호에 살고 있습니다.”

“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소현은 저를 잡아 멋대로 휘두르던 제약이 풀리고 나서야 다가온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건물 보안을 담당하는 경비원이었다.

경비는 문과 복도에 걸쳐 서 있는 소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긴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고 정장도 한껏 흐트러져 있었다. 바삐 들썩이는 소현의 가슴을 떠난 눈빛이 성민을 쳐다보았다. 성민은 신사적인 미소로 중무장한 채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소현이가 술에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바람에…….”

“아니요, 이 사람이.”

이 순간만큼은 똑바로 목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날 멋대로 집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조처 좀, 취해줘요.”

술에 찌들었지만 머릿속만큼은 공포감에 잔뜩 감각을 세운 채였다.

“경찰, 경찰이라도 불러 줘요. 빨리요.”

“소현아. 왜 그래.”

성민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겁니다. 감정적으로 많이 격해진 상태예요.”

저를 예민하게 만드는 화법에 소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경비는 소현을 보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에 여자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민원이 들어와서요. 술에 취하셨으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가셔야죠.”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성민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가 대신해 미안함을 전하는 것처럼 경비에게 말했다.

“괜히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잘 달랬어야 했는데…….”

“애인 사이입니까?”

“네.”

“누가, 애인이야.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릴 해?”

“원래 이렇게 사나웠다가 또 풀리는 거 잘 아시죠? 남녀 사이가 항상 그런 식이라.”

성민은 유려하게 소현의 발언을 차단했다. 경비는 공감하는 듯 맞받아쳤다.

“같은 층에 연인이 거주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이해는 합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주의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아, 여기요.”

뒷주머니를 뒤적인 성민이 지갑을 꺼내 무언가를 내밀었다.

“며칠 전에 이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그걸 받아 든 경비가 성민이 건넨 명함을 보았다. 보장된 신분, 그리고 제 직함을 꺼내 드는 것이 경비의 눈에는 결백해 보였다.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란 의식의 흐름이었다.

“좋은 곳 다니시네요.”

“아닙니다.”

의심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행동에 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거로 모자라 깔아뭉갰다. 피의자가 단숨에 애인이 되었고, 자신은 얼큰하게 취한 취객일 뿐이었다.

소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경비가 가지고 있는 명함을 낚아채 힘껏 구겼다. 바닥으로 버리자 경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재킷에서 꺼낸 제 명함을 내밀었다.

“신원은, 나도 확실해요.”

경비가 얼떨떨해하며 소현의 명함을 보았다.

“이딴 거로 사람, 차별하면 안 되지. 내가 지금, 이 남자가 내 집에 쳐들어올 뻔했다고 말했잖아요?”

“아니……그건.”

“애인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 가 위험을 느꼈다고요.”

똑바로 말하려고 애썼지만 두려움에 자꾸 말이 엇나갔다.

“이 건물에서, 내 집 앞에서요. 입주민 보호하는 게 일 아닌가요? 술에 취한, 취객 취급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해 달라고. 당신이 못하겠으면 경찰 불러 달라고요.”

말문이 막힌 경비가 성민을 보았다. 성민은 웃으며 그에게 가보라는 듯 눈짓을 보내왔다. 경비는 한숨을 내쉬며 소현의 명함을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내일 보안실로 방문해 주시면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흥분한 거 같으니까, 우선 들어가시죠.”

가는 걸 지켜보겠다는 듯 경비가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소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성민이 먼저 소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바로 옆문으로 인도했다.

“내일 얘기하고. 어서 들어가.”

소현은 어깨를 거세게 털어 냈다.

“나한테 손대지 마.”

열기로 범벅이 된 눈동자가 성민을 응시했다. 성민은 여유로운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이번엔 제 집인 걸 확인하고 소현이 도어록에 손을 올렸다.

뒤에 두 남자가 지켜보니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차분하게 누르려고 했다. 급하게 하면 틀릴 거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띠리링, 맑은 소리가 소현의 고막을 관통했다. 문고리를 힘주어 잡자 경비가 말했다.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쾅. 문을 닫은 소현은 으스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힘주어 움직였다. 주방으로 가 가지런히 정렬된 컵을 잡았다. 손잡이가 계속 흔들리며 떨렸다. 정수기에 갖다 댄 컵으로 물이 담기자 소현은 힘겹게 입술에 갖다 붙이고 마셨다. 꿀꺽, 꿀꺽. 차가운 냉수가 목으로 넘어갔다.

“하……아. 하.”

술은 진작 깼다. 제게 벌어진 이 위험한 일 앞에 알코올도 도망 친지 오래다. 문제는 제 상태였다. 몸이 어디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후들거렸고 시야가 공포와 충격에 어그러졌다. 소현은 떨리는 손목을 멈추는 것처럼 부여잡았다. 성민이 억지로 잡고 끌어당겼던 곳이었다. 만약 그대로 끌려 들어갔더라면…….

쾅! 묵직한 마찰음이 소현의 한쪽 귀를 강타했다. 놀라 흠칫 한 소현이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보았지만 고요히 닫혀 있었다. 그때 거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 지금 차 탔어.」

소현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연이어 포악해진 배기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이 익숙한 남자라서 몰랐다.

「내가 못 물으니까 네가 말해.」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끼이이익, 내달리는 바퀴 소리가 소현의 귀를 맹렬하게 긁어댔다.

「말해. 빨리.」

탁한 숨소리가 무자비하게 고막으로 발산됐다.

「나 여기서 더 눈 돌면 재미없어.」

야만적인 맹수가 소현의 입술을 잡아 벌리듯이 속삭였다. 공포에 질렸던 순간도 밀어내는 강한 목소리였다. 말하라니,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이 모든 대화를 다 들었다면 지한이 묻는 건 딱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 소현은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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