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38)화 (38/86)

38.

“또, 무슨 소리야.”

상관하지 말라고 밀어내야만 한다.

“괜찮…….”

소현의 입술이 덜컥 멈추었다. 경비와 성민, 그리고 경찰마저 도움을 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의 눈에 소현은 술 취한 취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재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잠들자니 소현의 심장은 아직도 터질 듯이 뛰었다. 불조차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내부가 소현의 몸을 차갑게 덮었다. 소현은 두려움에 잠겨 있던 고리를 풀었다.

“하아……삼성동.”

이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소현이 말한 주소를 빠르게 입력하고선 지한이 말했다.

「10분 걸리니까 어디든 처박혀 있어.」

“…….”

그 목소리엔 형태가 없었지만 소현에겐 무엇보다 강인하게 와닿았다.

「전화 끊지 마. 나 갈 때까지만 통화해.」

저를 안아주는 손길인 것만 같아 소현은 입술을 깨물며 오감을 세웠다.

「그만 떨고. 금방 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거센 음성에 두려움이 지워진다. 내가 떨고 있는 건 어떻게 알까. 소현은 욱신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제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소현의 심장은 점차 안정된 형태로 변해갔다. 입술 위로 잔류하던 떨림이 어느새 멈추었다. 몇 번이고 심호흡하며 어질러진 생각을 정리했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곁눈질하던 소현은 긴 숨을 뱉었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소현은 제일 먼저 집 안 불을 환하게 켰다.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소현은 옆에 놓인 쿠션을 의지하듯 움켜잡았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곁눈질하던 소현은 긴 숨을 뱉었다.

삑, 삐, 삑.

순간 눈동자가 멈추었다. 미세하게 들려오는 소리의 출처는 현관문이었다. 소현은 뇌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삑, 삑.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누를 만한 사람은 소현이 알기론 딱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소현은 성민과 헤어진 뒤 제일 먼저 비밀번호를 바꿨었다. 이별했으니 과거를 공유했던 것을 지우는 건 당연한 거였다.

삑.

집에 들어오기 전, 소현의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떠오른다. 틀리지 않으려고 느리고 신중하게 번호를 눌렀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다. 뒤에서, 보았던 걸까?

삑. 띠리링.

소현의 몸이 굳었다. 문이 열리자 발끝까지 피가 서늘하게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쾅, 둔탁한 소음을 등지며 성민이 서 있었다. 소현을 보며 느리게 신발을 벗은 성민이 걸어왔다. 숨이 안에서 토막 난 듯 나오질 않았다. 소현의 입술이 다시 경련하기 시작했다. 소파 앞에 선 성민은 생각에 잠긴 듯 둔탁하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소현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

성민이 소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저앉았다.

“우리가 가까워질 방법은 대화가 아닌 거 같아.”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입술을 부딪치려는 체구가 위협적이었다. 소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닿은 입술에서 빠득하고 분노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은 소현의 팔이 온 힘을 다해 성민의 머리를 후려쳤다.

윽, 낮은 신음과 함께 성민의 몸이 살짝 밀렸다. 소현은 다리를 구부려 성민의 허벅지 사이를 찍어내며 밀었다. 허리를 구부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감옥 같은 몸집에서 벗어난 소현은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눈에 걸렸다. 소현은 그곳으로 달렸다.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아!”

“소현아.”

허리를 휘감으며 결박한 팔에 소현의 숨이 반으로 잘렸다.

“소현아…….”

성민이 더 세게 소현을 끌어당기며 제게로 갖다 붙였다. 쾅, 작은 틈을 보였던 문이 다시금 꽉 맞물리며 닫혔다. 소현은 머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로 앞에 탈출구를 두고 소현의 손이 문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때였다.

「문 열어.」

귀를 관통하는 낮은 목소리가 침몰하던 소현의 이성을 다시 끌어올렸다.

소현은 손끝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힘껏 돌리자 문틈이 벌어졌다. 작은 부분만 해결해주면 되었다는 듯이 그 위로 손가락이 들어와 문을 열었다. 소현의 얼굴로 복도 조명이 쏟아졌다가 그림자로 다시 덮였다.

“…….”

문을 차지한 형체에 성민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 뭡니까?”

“…….”

질문하는 성민에겐 답하지 않고 지한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회색빛 눈동자가 살기를 띤 칼날처럼 내려갔다. 성민의 품에 억지로 안겨 있는 소현은 목과 허리가 결박당한 채였다. 몸싸움이 있었는지 열린 블라우스와 무방비하게 드러난 살결을 본 지한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왔다.

“늦은 시간이지.”

목소리가 나오자 사나웠던 공기가 침전했다.

“사람 하나 죽어도 모를 시간이기도 하고.”

바닥에 진득하게 붙어 있던 발이 떨어졌다. 손을 든 지한이 성민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잡힌 머리카락이 한 번 휘감기며 두피를 팽팽하게 땅겼다. 윽, 신음하며 고개를 움직인 성민이 지한에게 끌려가면서 팔을 풀었다. 성민의 품에서 벗어난 소현은 거실로 향하는 지한의 뒷모습을 보았다.

소파에 도착한 지한이 성민의 머리를 잡고 그곳에 앉혔다. 힘에 굴복하듯 성민의 엉덩이가 소파에 움푹 들어갔다. 지한은 잡아 죽일 것처럼 성민을 주시하다 눈동자를 옆으로 옮겼다.

“방에 들어가.”

어둡고 음산한 목소리가 소현에게 닿았다. 소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 하나 움직여지질 않았다. 모든 것들이 낯설고 무서웠다. 지한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런 소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들어가라는 듯이. 거기에 소현은 발끝을 움츠리며 힘을 주었다. 무너질 것만 같은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발로 지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보호해주는 것처럼. 거기에 의지한 소현은 방문을 잡고 열었다.

달칵,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한의 시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리를 휘어 잡힌 성민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놓으라고 말하는 대신 손목을 잡고 힘으로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표정은 무감각했고, 그래서 사람 같지 않았다. 성민은 대화를 시도하려 말문을 열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지한은 말없이 내리깐 눈으로 성민을 응시했다.

“아……가만 보니. 기억나는군.”

“…….”

성민은 조명에 반사된 회색빛 눈동자에 기억을 되찾았다. 그때, 소현과 라운지 바에서 함께 있던 남자였다. 벌건 대낮에는 슈트를 입고 식당에서도 소현의 옆에 있는 걸 본 것이 떠올랐다. 성민은 경계심을 한껏 세우며 물었다.

“너……소현이랑 무슨 사이야.”

지한은 말없이 성민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성민의 말문이 막혔다. 작은 움직임조차 허락하지 않는 살기가 성민을 굳게 했다. 지한은 한참 끝에 느리게 감상을 뱉었다.

“와. 반갑다.”

첫 마디가 살결을 베는 것처럼 깊었다. 지한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종료했다.

“내가 귀로 듣기만 했을 때 네 얼굴이 무척 궁금했거든.”

누군가와 연결된 고리가 잘리듯 화면이 꺼졌다. 그걸 본 성민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뒤흔들렸다. 누구와 통화하고 있던 거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밀어 넣은 지한은 더는 참을 것 없다는 듯 손에 힘을 줬다.

“악!”

성민의 고개가 뒤로 급격하게 꺾였다. 등받이에 목덜미가 완전히 밀착된 채 성민은 숨을 흐트러뜨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움푹 들어가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쪽 다리를 직각으로 세워 올리고 허리를 숙인 지한이 성민의 얼굴 가까이 밀착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위로 칼날이 스치듯이 말이 흘렀다.

“날 목소리만으로 이렇게 눈 돌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독성이 진득하게 늘어진 목소리였다.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살결을 어루만지듯이 부드럽게 한번 휘감겼다. 뽑힐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하자 성민이 이를 악물며 지한을 쳐다보았다. 높은 콧대를 반으로 갈라내듯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동자가 껍질이 벗겨진 것처럼 전에 없던 혼탁한 빛을 냈다. 지한의 입술이 위험하게 올라섰다.

“꼴려서 뭐라도 박아야겠는데.”

“무슨……윽!!”

동시에 강렬한 통감이 허벅지와 배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앞머리를 든 검은 구두가 성민의 다리 사이를 짓밟은 것이다. 흥분감에 올라섰던 중심이 통증에 뭉개지고 있었다. 턱이 으깨질 만큼 악다물자 전신이 떨렸다. 지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새빨갛게 열이 오른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신음 흘려.”

“크으, 윽…….”

소파를 움켜잡은 손을 들어 성민이 지한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잡아 당겨지며 머리와 아래로 고통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악……!”

성민이 안간힘을 써 손을 떼자 잘했다는 듯 힘이 느슨해진다. 고통으로 조련당하는 성민의 눈가로 열이 몰리다 물기로 변질됐다. 지한은 그걸 지켜보며 말했다.

“더 애타게 울어야지.”

귓바퀴로 들어온 목소리가 목에 선 핏대를 불거지게 했다.

“반응이 안 오잖아.”

“아악!!”

경련하는 입술에서 그만, 그만……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한은 얌전히 제게 굴복한 채로 고통에 허덕이는 얼굴을 보았다. 조소하듯 입술이 올라가 있었다.

“좋지?”

그걸 본 성민의 눈으로 공포가 뒤덮였다.

“입은 좋아서 헐떡거리네.”

제가 소현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싫다고 거부하는 소현에게 몸은 솔직하단 소리를 했었으니까.

“더 하고 싶지.”

“안, 아니……! 윽!”

“몸은 맞다고 하는데. 이렇게 뜨겁게 달아올라서는.”

귀에서 멀어진 차가운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떻게 도살할까, 견적을 내는 눈빛이었다. 그동안 느껴본 적 없던 미지의 공포감이 성민의 몸을 압박해왔다.

“소리 질러.”

“악!!”

고통이 들쑤셔진 성민의 눈으로 핏대가 섰다.

“나 흥분 시켜야 끝나는 거야.”

저는 이토록 두려워하는데 눈앞의 남자는 지독하리만치 여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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