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이. 뒤흔들리던 성민의 눈동자가 점차 파열할 것처럼 붉어졌다. 지한은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가지곤 흥분 안 돼.”
“으…….”
제 공포와 두려움은 남자에게 아무런 감흥조차 주지 못했다. 오히려 천천히 저로 인해 함락당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식의 태도였다. 조금 전 소현처럼, 성민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걸 보며 지한은 글자를 씹어 발기듯 물었다.
“즐겁지? 좋다고 말해.”
그 말에 성민의 얼굴이 혼미해졌다.
“이러는 게 좋다고 말하면 봐줄게.”
성민은 바르르 떨리는 턱을 간신히 움직였다. 좋……아, 외마디가 쥐어짜내듯이 나왔다. 지한은 조소하며 속삭였다.
“그래. 이렇게 말해야지, 허락인 거야.”
“으…….”
“그 말이 여자 입에서 먼저 나와야 해. 아니면 손가락 하나 건드리면 안 돼. 알겠지?”
“윽, 알았…….”
“잊지 말고 살아.”
윽, 억. 대답 대신 괴로운 신음이 흘렀다. 아래로 감각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지한이 구두를 바닥으로 내리자 성민이 참아왔던 숨을 내몰아쉬었다. 굼벵이처럼 몸을 뒤트는 것을 보며 지한이 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겼다. 지한이 이끄는 대로 걷던 성민은 현관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바닥이라는 것도 인지 못한 채 커다란 덩치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아래를 감싸 쥐었다. 지한은 제 손아귀에 잔뜩 뽑힌 머리카락을 허공에 털며 문고리를 잡았다.
“나중에 확인할 거니까 제대로 기억해.”
쾅, 문을 닫은 지한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안에서 날뛰는 야성을 밟아 죽이려고 했지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깨어난 난폭함은 주인의 머리끝까지 차올라 기어 다녔다. 눈을 감은 지한이 적막을 한껏 폐로 들이마셨다. 차분해지려고 기를 쓰는 머리와 달리 손은 재빠르게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연결음 끝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졸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자가 반듯하게 말했다.
「네. 도련님. 박 비서입니다.」
“박 비서님.”
지한은 뒤늦게 구두를 가지런히 벗었다.
“삼성동에 그랜드 오피스텔 전 층 CCTV 확보 해놔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지한은 아까와 달리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 선 지한이 문고리를 잡으려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두드렸다.
똑, 똑. 거기에 놀란 것처럼 문 너머로 경직된 분위기가 읽혔다. 지한은 살기를 죽이며 최대한 부드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침대에 앉아 있는 소현의 얼굴이 지한을 확인하고 풀어졌다. 그것도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곧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변질되며 침몰한다. 지한은 턱이 아릴 정도로 다물고서 다가갔다.
“나 봐.”
소현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울진, 않은 것 같았다. 직전이긴 했지만. 소현의 눈동자는 촉촉했지만 흘러내리진 않았고 얼굴도 부푼 곳 없었다. 맞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 떨리는 소현의 손끝으로 지한의 시선이 내려갔다. 무릎에 놓인 손은 양쪽 손톱끼리 맞부딪치며 상황을 이겨내려고 하고 있었다. 붉은 자국이 순간 지한의 눈동자 위를 사납게 채찍질했다.
“잡혔어?”
“…….”
손목에 열꽃처럼 얼룩이 피어 있었다. 소현은 감추듯이 그곳을 손으로 덮었지만 이미 지한의 눈을 화끈거리게 만든 후였다. 블라우스 단추가 풀린 걸 봐서 어렴풋이 예측하던 거였다. 들은 거라곤 대화뿐이었지,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진 못했다. 소현이 시선을 내리자 머리 위로 하아, 하며 스산한 공기가 번졌다.
“손을 부러뜨릴 걸.”
소현은 그것이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안은 고요했다. 성민은 간 걸까, 간 거겠지. 그러니까 지한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거겠지. 손목을 감싼 가느다란 손가락이 불안감을 억누르듯 꽉 조여졌다.
성민과 부딪치면서 생겨난 상처는 겉보단 안으로 거대한 열상을 입혔다. 뉴스나 기사에선 이별한 남녀의 사건 사고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곤 했었다. 저와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래서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제 연인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사랑했었고 제 일상을 공유했던 남자였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이면의 모습으로 저를 공격했다. 발등을 찍히다 못해 소현은 다리가 잘린 것만 같았다. 한때는 저를 보호해주고 아껴주었던 남자였기에 저를 다치게 하진 않을 거란 암묵적인 믿음이 칼날이 되어 가슴을 도려낸 거다.
배신감과 공허함, 두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버팀목이었던 존재가 그 관계를 이용해 저를 깔아뭉갰다. 소현은 거기에 깔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
꽉 손을 움켜쥔 곳으로 얼굴이 들어왔다. 바닥에 앉은 지한은 소현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묻지 않은 채 묵묵히 달아오른 시선을 정제 없이 보내왔다. 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비린 날것의 눈동자였다. 그런데, 그 눈을 본 소현은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
거기엔 걱정하는 눈빛이 아닌 저를 이렇게 만든 남자를 향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저 눈동자에 비쳤던 성민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옥에 처박혔으면 좋겠다, 제가 당한 걸 똑같이 느꼈으면 하는 억한 마음도 투명한 지한의 눈동자 안에선 가능했다. 불꽃이 뒤엉킨 눈이었으니까. 거울처럼 소현의 안에서 발현된 억한 마음을 지한은 아낌없이 담아냈다.
나보다 더 화내주고, 나보다 더 아파하고, 그래서 나보다 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하아…….”
소현은 참아왔던 숨을 터트리며 두 팔을 뻗었다. 지한의 목을 꽉 끌어안자 바닥에 놓였던 손이 올라와 소현의 등을 살며시 두들겼다. 위로라고는 모르는 남자의 손길이었다. 안아도 되는 건지,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건지 등에 손이 닿는 찰나의 부딪침에도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소현은 단단한 어깨에 입술을 묻고 울었다.
“흐읏……윽…….”
무서웠다. 지한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자 소현의 가슴은 뛰고 부서졌다. 지한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기다릴 수도 없는 막연한 두려움에 갇혀 있었을 거다. 도와줄 누군가도 없는 캄캄한 지옥 속에서. 문 열라고 했던 목소리는 한줄기 빛이었다. 그곳을 향해 소현은 힘껏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지한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쏟아졌을 때, 소현은 막연하게 그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나, 무서웠어.”
“…….”
“하아……그 새끼가, 나를…….”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힘으로 짓눌린 육체는 나약했다. 직장에선 큰 목소리를 내던 소현도 힘 앞에선 밀리는 여자였다. 지한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소현의 등을 다독거렸다.
“나 왔으니까 됐어.”
그 말 한마디에 소현의 눈에 어린 물기가 어그러졌다.
“하윽…….”
다르다. 성민과는 달랐다. 그가 저를 제압하려고 사용했던 것을 지한은 오롯이 소현을 달래는데 쓰고 있었다. 짙은 체향이 밀려와 소현의 몸 안에 얼룩진 불쾌한 감정을 빠르게 희석 시켰다. 경직된 몸이 조금씩 풀어지자 눈물이 맺힌 턱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소현의 팔이 힘없이 풀렸다. 손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자 지한이 다가오며 입술을 대었다.
읏, 짧게 신음을 흘리자 뺨에 닿은 입술이 깊어지며 달라붙었다. 점막이 벌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혀가 움직이며 소현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지워나갔다. 눈 밑으로 혀끝이 닿자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혀가 속눈썹에 묻은 물기까지 거둬 냈다. 감긴 눈꺼풀이 위로 깊고 진한 온기가 밀착되었다. 지한은 느리게 입술을 벌렸다.
“지금 횟수 한 번 사용한 거로 하자.”
그 말에 소현의 눈꺼풀이 진동했다. 둘에게 허락된 마지막 숫자였다. 짙은 숨결이 핥은 부위로 점성이 되어 달라붙었다.
“나랑 가.”
*
“삼성동?”
노인은 박 비서에게 전달된 사안을 들으며 청각을 세웠다. 이른 아침부터 거하게 식사를 한 노인이 후식으로 준비된 찻잔을 거침없이 내렸다.
“CCTV에 뭐 문제 될 만한 내용이 있었나?”
“도련님께서 모습이 찍히긴 했는데, 아직 정황을 알지 못해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 김 변이 폭행 사건으로 연루될 만한 것이 있는지 검토 중입니다.”
노인은 주름이 깊어진 미간을 문질렀다. 침묵하는 노인에게로 박 비서가 나직이 말했다.
“일전에 보고드렸던 강소현 씨 자택입니다. 회장님.”
그 말에 노인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뭐야, 이게 지금 사랑싸움인 게야?”
“그건 저도 듣지 못해서 말씀드릴 순 없지만 도련님과 연루된 남자가 강소현 씨의 애인이었다고 합니다.”
“내, 살다 살다.”
노인은 말을 아꼈다. 놀라움에 말을 잃은 것이기도 했다. 제가 떠나기만을 바라는 여자와 연관돼 있는 것도 충격인데 폭행이라니.
지한이야 워낙 눈에 뵈는 게 없는 녀석이지만 귀찮아하는 성향도 한 몫 하는 터라 한국에 들어와서 이렇다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박 비서의 말을 들어보면 그 여자를 위해 지한이 나선 거로 밖에 생각되질 않았다.
여자 얘기에 본가로 내달려 왔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성이 없어진 지한은 보지 못 했던 터라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지한이 녀석 호텔에 있겠지?”
“네.”
“차 대기 시키게. 얼굴 보고 얘기해야겠구만.”
노인은 주저하지 않고 저택을 떠났다. 호텔에 도착한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곧바로 오를 수 없었다. 고객의 허락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제아무리 재상 그룹의 회장이나 되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까다로운 성벽 위에서 태연하게 서식하고 있었다. 본가에 안 들어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견이 싫어서.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연락을 취한 직원이 확인을 받고 엘리베이터로 노인을 안내했다. 층수를 대신 눌러주고 인사한 직원의 얼굴이 문에 닫혀 사라졌다. 노인은 올라가는 숫자를 노려보았다.
카펫 깔린 복도를 성큼성큼 기세 좋게 걸어나간 노인이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이 또 누르려던 찰나였다.
“한 번만.”
문이 열리면서 지한이 인상을 구긴 채 노인을 맞이했다. 노인은 지한이 내뿜는 살벌함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한의 시선이 사납게 올라와 뒤에 서 있는 박 비서에게 꽂혔다. 비서가 고개를 숙이자 막아섰던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조용히 들어와. 겨우 재웠으니까.”
누굴 재웠단 말인가. 노인은 알 수 없단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