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40)화 (40/86)

40.

제멋대로 하고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으로 확인한 호텔은 그야말로 무법지대였다. 술과 무자비하게 사들인 옷들이 놓인 곳이 자리인 듯 태연하게 몸을 늘어뜨린 채였다. 뻔뻔한 건 주인을 똑 닮았다. 값비싼 물건들을 밟지 않으려 애쓰면서 노인은 소파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착석한 지한이 한쪽 다리 위로 도드라진 복사뼈를 눕혀 올려 두었다.

“할아버지. 나 정말 많이 바빠.”

받침대에 팔을 세워 머리를 기댄 지한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것이 불면증 때문인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할애비도 너 때문에 정말 많이 바빠지게 생겼다.”

“…….”

무슨 소리냐는 듯이 삐딱하게 내려감았던 눈꺼풀이 올라왔다. 노인은 어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얘기했다. 지한은 시선을 창문 쪽으로 옮기며 집중하지 않았다. 노인의 목소리가 엄중해졌다.

“그 남자에게 뭐 흘린 거 있느냐.”

그러자 지한이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로 던졌다. 다 구겨진 명함이었다. 그것을 펼쳐본 노인의 눈에 W 자동차 영업부 팀장이란 직함이 들어왔다. 김성민. 어제 지한과 마찰을 일으킨 인물일 거라 확신하며 노인이 그것을 박 비서에게 건네었다.

“네가 흘린 것 있느냐고.”

“없어.”

“그럼, 됐다. 할애비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손 떼.”

일순 머리를 기대고 있던 지한의 손가락이 펼쳐졌다.

“좋은 건 나눠 먹어야지. 할아버지.”

고개를 기울인 지한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였다.

“나한테 유능한 비서만 빌려주면 돼.”

노인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저 성질머리가 이상한데 꽂혔는지, 어제 문제가 있던 남자를 끝까지 물어뜯겠단 소리였다. 노인은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게 장난인 줄 알아, 문제 커지면 안 되니까 박 비서에 맡기거라.”

“…….”

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조작했다. 그리고선 노인의 앞에 내밀었다. 20분가량 되는 음성 녹음 파일이었다. 지한은 박 비서를 쳐다보았다.

“이어폰 있어요?”

“네. 있습니다.”

박 비서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노인에게 먼저 그것을 착용하게 했다. 음성 파일을 재생시킨 노인의 표정이 의아하게 번졌다. 거기엔 어떤 여자와 남자의 대화가 담겨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올라와 지한을 보았다. 그건 분명 지한의 것일 터였다.

지한은 상념에 갇힌 사람처럼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소현과 통화하면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곧바로 녹음 버튼을 눌렀었다. 그리고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제 목소리로 인해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뭉개지고 어그러질까 봐. 제대로 담겨야 보복도 할 수 있는 것이라, 소리치고 두려움에 떠는 소현의 목소리를 새기며 말하고 싶은 걸 견뎌냈다. 인내심에 뜯겨진 입안이 아직도 아물지 않아 너덜거렸다.

20분 넘게 녹음을 듣던 노인이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냈다.

“박 비서. 이거 김 변에게 넘기게나.”

“알겠습니다.”

“이런 몹쓸 놈.”

쯧, 혀를 찬 노인은 음성을 듣고 태도가 완벽히 돌아섰다. 허기진 짐승처럼 지한의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먼저 먹고, 할아버지 줄게. 처리는 알아서 해.”

“알겠다. 알았으니까…….”

증거는 충분했다. 여자를 위협했던 남자의 정황이나 대화가 전부 파일에 남아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걸 전부 듣고 있었을 지한의 심정이었다.

“너는 괜찮은 게야?”

괜찮지 않았다. 어제의 충격 때문에 소현은 계속 떨다가 아침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걸 지켜보느라 지한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차라리 제가 대신 괴로워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눈물을 보이는 소현을 달래는 건 지금까지 겪어본 경험 중 손꼽히게 고되었다. 심장이 찢겨도 이런 기분은 아닐 거다.

그래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불면증 탓이 아니라, 졸음이 오는데 잠들 수 없었다. 간신히 제 품 안에서 잠든 소현이 깰까 봐 움직이지 못 했고 잘 자고 있는지도 살펴야 했다. 너를 안고 있는 일분일초가 지옥 같았다. 그때 노인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아…….”

가느다란 목소리에 지한의 얼굴이 빠르게 움직였다. 언제 일어난 건지 소현이 옷을 갈아입은 채로 나와 있었다. 소현은 노인과 박 비서를 보고선 묵례했다. 얼떨결에 노인도 같이 고개를 움직였다. 늘어진 몸이 튕겨나가듯 순식간에 소현에게 다가갔다.

“어디 가.”

소현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마른 얼굴로 지한에게 작게 속삭였다.

“잠깐, 뭐 좀 사 오려고.”

“내가 갔다 올게.”

그 말에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됐어. 손님 온 모양인데 가 있어.”

“뭐 사 오면 돼.”

지한의 입에서 뭘 대신해주겠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세상에 저밖에 없는 녀석인데, 지금은 껍데기만 지한이고 본체는 다른 사람 같았다. 소현은 저를 보며 놀란 노인의 표정을 불편하게 읽고선 지한에게 말했다.

“어서 가. 나 신경 쓰지 말고.”

“박 비서 시켜라.”

노인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소현이 당혹스러운 낯빛을 띠며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일을 처리하던 핸드폰을 내리고선 정중히 물었다.

“어떤 게 필요하십니까?”

소현은 주춤하다가 이내 말했다.

“두통약이요.”

“그 정도는 호텔에 상비해 두었을 겁니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현은 숨을 갈무리했다. 문 뒤로 느껴지는 어수선한 기운에 TV를 보는 줄 알았건만, 손님이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손님은 저를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일일이 반응해줄 만큼 소현은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머리를 들쑤시는 통증에 깨어난 뒤라 더 그랬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것이 목적일 만큼 통각이 계속 바늘처럼 소현의 머리를 찔러댔다. 그때 서늘한 손이 소현의 이마를 덮었다.

“아파?”

소현이 눈을 깜빡였다. 이마에 닿은 긴 손가락이 벌어진 빈틈을 조이듯 붙었다.

“얼마나.”

사뭇 진지한 물음이라 소현은 저도 모르게 구기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이상하게 지한의 손이 닿으니 머리를 돌아다니던 난잡한 통증이 둔감해졌다.

“그냥 욱신거리는 정도야. 약 먹으면 금방 괜찮아져.”

“잠은. 더 안 와?”

지한은 손가락을 다시 벌리며 소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기에 소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이 잠깐 막혔다가 열렸다.

“응. 충분히 잤어.”

회피하듯 말하자 지한이 소현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뭐라도 먹자. 가벼운 거로.”

“어, 응.”

당혹감에 말이 흐트러졌다. 끈적한 스킨십보다 지한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시선을 내린 소현의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할아버지. 눈.”

서늘한 경고음이 울렸다. 노인은 소현을 빤히 보고 있던 눈을 얼른 옆으로 치웠다.

“내, 내 눈이 뭐가 어때서 그러냐.”

“깔든지 가든지 둘 중 하나만 해.”

불쾌감이 스며든 목소리가 노인을 또 당황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도 예외는 없었다. 소현은 무례한 말투에 한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입술을 꾹 닫고 노인을 마주했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세월의 애석함마저 역행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멀리 떼어놓고 봐도 시선을 압도할 강한 인상을 풍기는 외모와 풍채였다.

“할애비는 그만 가보마.”

노인이 바쁜 일이 생긴 것처럼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현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제가 가려는 듯한 행보였다. 현관으로 걸어가던 노인이 멈추며 지한에게 물었다.

“내일 공항은 어쩔 게야?”

“알아서 해.”

“뭘 알아서 한다는 거냐.”

출국하기 전, 가족끼리 한데 모여 식사라도 하면 좋으련만 지금 지한은 그런 놀음에 맞춰줄 수 없을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지한이 말없이 문 쪽으로 느리게 눈짓했다. 여자와 시간을 보내겠다는 거군. 노인은 꽁한 얼굴을 했다.

“공항 가는 길이라도 데려다주마. 내일 11시까지 준비하고 있거라.”

“그쯤하고 가.”

“잔소리로 듣지 말고.”

노인은 끝까지 제 할 말을 다 하고선 나섰다. 박 비서가 연락을 드리겠단 말을 건네며 문이 닫았다. 지한이 몸을 돌리며 룸서비스를 시키려고 책자를 꺼내 들었을 무렵이었다.

“왜 그래.”

소현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선 지한이 멈추었다. 소현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때 벨이 울리며 직원이 가져온 두통약을 건네었다. 소현은 그걸 받자마자 껍질을 벗겨 입안에 밀어 넣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얼른 이 모든 걸 잠재우고 싶었다. 물병을 내려놓은 소현이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저녁에 갈게.”

“안 돼.”

지한은 메뉴판을 읽어가며 말했다. 소현이 지한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런 거엔 끄떡도 하지 않는 위인이다. 오늘 아침에도 가겠다고 말했는데 금세 지한에게 붙잡혔었다. 그 집엔 발도 못 붙이게 할 사람처럼 말이다. 소현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호텔에 따로 방을 잡을 예정이었는데…….

“…….”

소현은 머리를 짓누르는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침실로 향했다.

“누워 있을 테니까 불러.”

푹신한 곳에 기대니 한결 나아진다. 소현은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성민은 어떻게 됐을지 이젠 생각해야 할 때였다. 집은 이사해야 하고, 새로운 곳도 알아봐야만 했다. 월요일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출근해야만 한다. 어제는 붉기만 했던 손목으로 색이 진해졌다. 멍울이 다 빠질 때까진 긴 팔로 가리면 괜찮을 거다. 문제는 감추려고 애쓰는 마음이었다.

내일이면 지한은 떠난다. 보내줘야 하는 걸 알지만, 가슴은 내일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나 생각을 하면 갑갑하게 죄여왔다. 그 통증이 머리까지 올라간 것만 같았다.

시트에 깊게 밴 짙은 체향이 소현의 코끝을 적셨다. 약효가 점차 도는 것인지 머리가 가벼워졌다. 소현은 깊이 잠에 빠져 들었다.

귓가로 실가닥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자, 나직하게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소현은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안 먹을래.”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몸부림 같았다. 잠든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현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갔다. 쇳덩이를 속눈썹으로 올리는 듯한 무거움이었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는 지한이 있었다. 저와 똑같이 한쪽 어깨를 세운 채로 소현을 쳐다본다. 건조한 눈동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저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 해?”

소현이 작게 묻자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널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 지한은 소현을 안고 등을 다독일 뿐이었고 간혹 자장가를 들려준다며 지친 얼굴을 제 가슴으로 끌고 데려갔다. 소현은 흐리게 눈동자를 옮겼다. 몇 시지. 그러다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이마를 짚었다.

“머리 아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손등 위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소현의 시선이 올라왔다. 손가락으로 입술이 닿아 숨결이 드나들었다.

“왜 아파. 혼내줄까.”

소현은 눈가가 욱신거렸다. 이 통증은 성민이 아니라 지한 때문이었다. 붉은빛이 선회하며 머릿속과 눈가를 데웠다.

“이제 뭐 먹자.”

“……입맛 없어. 너 혼자 먹어.”

지한은 살짝 턱을 벌렸다. 그러다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소현의 손가락 하나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멀어졌다.

“더 자.”

그 목소리에 소현은 또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온통 밝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오색으로 찬란하게 부딪쳐 오묘한 형체를 만들어 냈다.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지한은 없었다. 소현은 손을 뻗어 시계를 확인했다.

낮 12시. 대체 얼마나 잠든 거지? 소현은 재빨리 일어나 저를 혼몽하게 만들었던 침대에서 벗어났다. 장시간 누워 있던 탓인지 머리가 어질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지한이 보여주었던 비행기 티켓이 낮 3시 출발이었다는 거였다. 소현은 소름 끼치게 고요한 내부의 공기를 들이 마시지 못 했다.

벌써 갔을 지도 모른다. 침묵이 가시가 되어 소현의 발밑을 찔렀다. 발을 떼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침실 문 앞으로 다가간 소현이 차갑게 식은 문고리를 잡고 옆으로 밀었다. 레일이 드르륵, 차가운 소리를 내자 막혀 있던 시야가 열렸다. 소현은 삭막해진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풍경이 소현에게 잿빛으로 다가왔다. 어제처럼 옷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쓸쓸하게 버려져 있었다. 소현의 고개가 공허하게 움직이다 멈추었다.

지한은, 아직 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도와 떨림이 뒤섞였다. 소현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잘 가란 인사를 건네야 할까. 그동안 즐거웠다고 해야 할까. 무엇을 말하든 지금 이 감정을 다 담아내진 못할 거였다.

“너 공항 가야지.”

물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을 든 소현이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한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주먹 쥔 손을 눈썹에 대고 있었다.

“짐은, 이거 다 버리고 갈 생각이야?”

마디가 도드라진 검지가 짙은 눈썹 위를 진득하게 지나갔다.

“주말이라 가는 길도 막힐 텐데.”

지금 출발해야 맞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호텔 방 안에는 여전히 물건과 옷들이 규칙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텅 빈 캐리어가 유독 소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진작 저곳에 물건이 들어가 몸집을 부풀리고 있어야 했다.

“강소현.”

나직한 목소리에 소현의 신경이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 소파에 목 뒤를 대고 앉아 있던 지한의 고개가 움직였다. 소현은 흐트러진 채로 어둡게 가라앉은 지한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잃었다. 잊고 있었다.

“나랑 사귀자.”

지한은 반격할 줄 아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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