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41)화 (41/86)

41.

소현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지한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예측조차 하지 않았던 발언이라 이해가 되질 않았다.

“떠나기로 한 날에 이런 얘기 하니 좋게 보일 수가 없겠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한이 소파에서 일어나 소현에게 걸어왔다. 삐걱거리듯 소현의 시선이 경직된 채 올라갔다. 지한은 갈 채비를 마친 사람처럼 반듯한 차림새였다.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눈부신 햇살에 지지 않는 외모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날카롭게 조각된 눈매가 소현의 얼굴로 내려왔다.

“진지하게 만나자.”

글자 하나하나에 무게가 담긴 듯 지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소현에겐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세 번만 만나자고 했던 그날과는 다른 의미였다. 지한은 소현을 직선적으로 마주했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소현은 목이 콱 막힌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저울이 딱 한가운데에 놓인 이상한 상황이었다. 감정적으로 그 말에 끌리고 있지만, 정작 현실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많은 고민과 갈등이 혀를 잡아당겨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싫지?”

지한은 예상한 것처럼 말했다. 소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지한은 한 손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다른 손을 뻗었다. 소현의 이마로 검지 끝이 닿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겼다. 귓바퀴로 지한의 손가락이 감겼다. 움츠러드는 감각이 떠나자 지한의 얼굴이 다가왔다.

“나밖에 안 보이게 해줄 테니까 옆에만 있어.”

소현의 심장이 꽉 조여졌다. 몸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커피와 술이 뒤섞인 액체를 마신 것도 아니었다.

“일단 넌 그 정도만 해.”

그럼에도 지한의 얼굴이 선명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묶여 있던 소현의 혀가 움직였다.

“그럼 미국은, 안 가겠다는 거야?”

“네가 이런데 어딜 가.”

소현의 손이 짧게 경련했다. 동정심인가? 제가 며칠 전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그걸 전부 듣고 목격한 터라 이러는 걸까. 소현은 잠깐이나마 설레었던 제가 순진하게 느껴졌다.

“내 상태가 뭐가 어떤데. 어차피 내일 출근하면 일 때문에 이러고 있을 여유도 없어.”

“그럼 다행이고.”

지한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선을 내렸다. 소현은 그 모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말 이상하게 하지 말란 소리야, 괜히 내 핑계 대면서…….”

“내가 가기 싫어.”

소현의 눈가가 구겨졌다. 지한은 핸드폰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현을 보았다.

“너 두고 이젠 어디 안 가려고. 이해됐어?”

“뭘…….”

“잠깐 있어 봐.”

지한은 소현의 말을 막고 창가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지한의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 청명했다. 파란 물감을 부은 것처럼 소현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한이 이미 결정한 일을 제가 말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저 때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출국이 포기할 만한 일이었을까. 이렇게 쉽게 안 가도 되는 건지 소현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더욱 우세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소현의 안을 빼곡히 채운 감정은 안도와 설렘이었다. 지한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으니까. 대체 언제부터 나를……횟수를 사용하지 않고 참던 지한의 모습이 이 순간 열쇠가 되어 닫힌 문을 열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더라도 사생활은 공유하지.”

통화를 마친 지한이 뒤돌아섰다.

“집 먼저 빼.”

설마 그때부터였을까. 소현은 열기가 번진 얼굴이 들킬까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집은 애초에 성민이 옆집으로 온 순간부터 애정이 사라져 있었다.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내려다보며 지한이 말했다.

“나 집 굴러다니는 거 하나 있으니까 거기로 가.”

“……됐어,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도와줄 필요 없어.”

“도와주는 거 아니니까 가.”

“친절은 그쯤 해도 괜찮아. 네가 이러면…….”

“지금껏 뭘 들었어.”

소현의 얼굴이 옅게 구겨졌다. 제아무리 정신이 없는 상태라지만 대화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지한은 제가 한 말을 무시라도 당한 사람처럼 핸드폰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밖에 안 보이게 할 거라고 했지. 거기엔 이런 것도 포함이야.”

저를 주시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소현은 심장이 제어가 되질 않았다.

“그거, 너밖에 안 보일 곳에 날 집어넣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소현은 팔짱을 꼈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지한에게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어제와 다른 현기증이 소현의 몸을 잠식해 요동쳤다. 지한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안심해. 예뻐해 줄 테니까.”

그 목소리가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흘러 다니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발을 움직여 방치해 두었던 핸드폰을 찾았다. 업무와 관련된 얘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저를 애타게 찾는 메시지를 뒤로하고 중개인에게 도착한 문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성민이 옆집인 걸 안 다음 날, 집을 내놓겠단 의사를 부동산 측에 전달했지만 아직 집을 보러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상관 없이 소현은 새로운 집을 구하는 중이었다.

후보를 세 곳으로 추렸고 그 중 두 군데를 평일에 보는 거로 스케줄을 잡아 놓았었다. 한 곳은 돌아오는 주말에 보고 결정할 거다. 소현은 제게 다가오는 존재를 의식하며 고개를 들었다.

“며칠만 신세 좀 질게.”

“신세일 것까지야.”

지한은 시니컬하게 응수했다. 저런 태도가 바로 소현의 안에서 부담감을 지워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한과 있어야 안정이 되는 건 며칠 호텔에서 함께 지내면서 소현도 느꼈던 바였다. 출국하지 않겠다고 하는 지한이 솔직히 말해 반가웠다. 지한과 이별하지 않아도 되니까.

거기다 이젠 횟수를 신경 쓰지 않고 만날 수도 있었다. 언제든 볼 수 있고, 그때마다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치솟는 것을 잘라낼 필요도 없었다. 가벼운 만남을 위해 세웠던 규칙이 그동안 소현의 목을 갑갑하게 조여왔었다.

“우선……경찰서에 들려야겠어.”

소현은 더는 숨기지 않고 편히 제 얘기를 했다.

“헤어진 지 한 달은 더 된 남자야. 그동안 몇 번 마주쳤었는데 내 옆집까지 이사 올 줄은 몰랐어.”

소현의 입에서 다른 남자 얘기가 나오는 것이 불쾌한지 지한이 꽤 진지하게 답했다.

“경찰서는 됐어.”

“이런 일을 당했는데 그냥 가볍게 넘어가고 싶지 않아. 회사에 소문나는 일 있더라도 진행할 거야.”

“가볍게 안 넘어갈 거니까 넌 손 떼.”

소현은 의아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너 무슨 짓 하려고 그래?”

추궁하듯 바라보았지만 지한은 침대에 걸터앉은 소현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 뿐이었다. 손길 안으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 자동차 열쇠였다. 갈 채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던 외형이 순간 소현의 눈을 예리하게 긁었다.

“내 집에 가 있어. 옷 가져다줄 테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가 날이 서 있었다.

*

“회장님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럴만하지.”

박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이미 지한도 느끼는 바였다. 저조차 가물가물했던 집 주소를 확인하려고 전화했을 때 노인의 목소리는 한껏 격양돼 있었다.

지한을 위해 노인이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집은 가정부의 손길이 아니면 헌집이나 다름없었다. 지한이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1년에 한 번, 한 달가량 머무는 게 전부인데 거기에 체취를 남기고 정붙이면 의미가 생겨버린다. 그래서 지한은 늘 호텔에서 머물며 곧 떠날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던 정을 끌어와 붙일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지한이 층수 버튼을 눌렀다. 소현을 데려다주고 삼성동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올라가는 잠깐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박 비서가 앞으로의 행적을 물었다.

“출국은 보류하시는 겁니까?”

“가져오라는 물건 까먹겠으니까. 그 얘긴 나중에 해요.”

지한이 차갑게 말하자 박 비서의 입이 다물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한은 1602호 걸어갔다. 초인종이 여러 차례 눌렸다. 박 비서는 재킷을 어루만지며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에서 비디오 폰을 통해 얼굴을 확인한 건지 스스럼없이 문이 열렸다.

“누구세…….”

“나야.”

문고리를 열었던 성민이 흠칫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지한이 몸을 똑바로 세우자 성민의 발이 물러났다. 반사적으로 재빨리 문을 닫으려는 걸 손으로 차단한 지한이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안 반가워? 실망인데.”

문틈으로 짐승을 맞닥뜨린 성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왜 온 거지?”

성민은 저를 몰아붙인 남자가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 태연할 수 없었다. 지한은 문을 잡은 손가락을 두들겼다.

“알고 싶으면 문이나 활짝 열어. 쳐들어가기 전에.”

회색 눈이 날카로운 빛을 띠며 성민의 시야를 헤집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