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42)화 (42/86)

42.

마른침을 삼킨 성민은 공간을 내어주었다. 헐거워진 문을 마저 열며 지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박 비서는 그 뒤를 함께 따라왔다.

성민은 제 집 소파에 뻔뻔하게 앉는 커다란 체구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남자지만 다른 종족처럼 느껴지는 건 몸이 기억하는 본능이었다. 지한은 정리가 덜 된 어수선한 집안을 둘러보더니 성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리 와.”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온순한 말투였다. 정작 개가 된 성민은 움직이지 못 했다. 제가 집 주인인데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뀌었다. 공간을 압도하는 성정을 지닌 남자에게 상식은 통하지 않을 거다. 그나마 함께 온 남자는 정상인처럼 보였다. 그날 밤처럼 저를 해하진 않겠지. 성민은 이를 악물고서 발을 떼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이 움직였다. 아직도 짓밟힌 부위가 얼얼해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성민이 소파에 착석하자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지한이 감상을 뱉었다.

“걷는 게 불편해 보이네.”

“그쪽한테 당한 게 있으니까.”

말에 힘이 실렸다. 지한이 눈썹을 까딱였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이틀 동안 아예 터트릴 걸 그랬나 후회했으니까.”

성민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당황한 것을 숨기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일부러 지한과 떨어진 곳에 앉았지만 소파란 같은 장소 때문에 아래가 욱신거렸다. 지한은 벌어진 양쪽 허벅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성민이 다리를 좁혔다. 지한의 입가에 조소가 서렸다.

“근데 언제까지 반말할 생각이지?”

“나보다 어린놈한테 존댓말 할 이유가 없지. 이런 짓까지 당했는데,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 고소는 피할 생각하지 말고.”

박 비서를 본 성민은 그가 변호사 일 거라고 예상했다. 합의 목적으로 찾아온 거겠지. 폭행을 당한 입장으로서 성민은 지한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가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뭐?”

“강간하려다가 덜미 잡힌 주제에.”

강간이라는 불쾌한 단어에 성민이 말했다.

“소현이는 나랑 만나던 사이야. 거기에 끼어들었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지한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재미없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래 함부로 놀리다가 인생 망하는 부류가 있지.”

무미건조하게 조명 아래에서 배회하던 회색빛 눈동자가 성민에게 고정됐다.

“물론 나는 아니야.”

네가 될 거란 암시였다. 성민은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걸 깨닫고선 말했다.

“차라리 옆에 있는 사람하고 대화하는 게 낫겠군.”

지한은 손으로 입가를 쓸며 곁눈질했다.

“박 비서님.”

“네. 김성민 씨, 오늘 찾아온 건 차후 문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합의금은 됐습니다. 몇천만 원을 준다고 해도, 그 이상을 제시해도 안 받을 거고 법대로 할 겁니다. 저 녀석, 용서 못 해요. 병원에서 진단서도 다 떼었으니 긴말할 필요 없습니다.”

“합의금 얘기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뭡니까? 난 저 새끼, 얼굴도 보기 싫습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고요.”

“내일 김성민 씨가 근무하는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갈 겁니다.”

성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회사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동시에 성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제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말한 적 없는데도. 박 비서는 입력된 기계처럼 말했다.

“연락이 가면 W 자동차 인사과에선 김성민 씨가 했던 강간 미수 및 무단 침입. 그리고 여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범죄를 계획한 사안을 놓고 내부 회의가 열릴 겁니다. 사생활로 인해 회사 이미지에 누가 되었으니 어떤 처벌이 있을진 그때 가보시면 알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뭘 했다고요.”

“강소현 씨 옆집으로 이사 온 게 설령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증거 자료가 있어서 빠져나오긴 힘드실 겁니다.”

“무슨 증거요, 설마 CCTV요? 하, 눈을 똑바로 달고 다니셔야겠습니다. 저 녀석이 어제 제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내던진 게 찍혔을 텐데 그걸 못 보다니.”

“보았습니다만 그보다 더 자세하게 김성민 씨 목소리가 녹음돼 있습니다.”

녹음? 성민은 싸한 기운이 머릿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지한이 저를 앞두고 핸드폰을 만지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CCTV에 찍히지 않은 부분까지 담겨 있고요.”

“자, 잠깐만요.”

소현과 제가 대화했던 것이 들렸을까. 그러고 보니 소현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만약 누군가와 연결돼 있었더라면……성민의 고개가 경직된 채로 지한에게 닿았다. 혹시 저 남자와 통화 중이었던 걸까.

“그래서.”

지한은 무료하게 지켜보던 시선을 들며 물었다.

“언제까지 반말할 생각이지?”

상황은 역전되었다. 더는 친절하지 않은 목소리와 눈빛이 성민을 주시했다. 성민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말을 하지 못 했다. 취해서 헛소리를 한 거라고 둘러대기엔 소현은 제 의사를 계속 말해왔었다. 그걸 제압하려고 힘을 쓴 것도 사실이었다. CCTV와 소리를 대조해 본다면 그 상황이 취한 사람을 부축하는 정도가 아니었음을 금세 눈치챌 거였다. 그 음성이 회사로 알려진다면. 성민은 숨을 터트리듯 말했다.

“회사엔, 알리지 말아 주세요. 그건…….”

성민의 눈동자가 혼비백산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만큼 성희롱 문제는 회사 내에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팀장인 성민의 사생활이 회사에 알려진다면 그 징계가 가볍진 않을 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막아야 한다.

“오해가 있는, 아니. 제가 잘못한 거 맞습니다. 소현이랑 헤어진 것도 맞고요. 그날은 제가 너무 과했습니다. 취해서 도와준다고 했던 일인데…….”

성민은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급하게 이사 온 집 안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졌다.

“복잡할 필요 없이, 지금 선에서 해결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도 고소 생각 접을 테니 그쪽도……서로 합의한 거로 합시다.”

지한은 무미건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성민은 지금 이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남자라서 알 거 아닙니까. 한 번쯤 실수도 할 수 있는 거고. 잘못한 걸 인정하면 됐지, 이런 문제로 직장까지 건드리는 건 너무 한…….”

“난 공감 능력이 없어.”

그 말 한마디가 성민의 말문을 막았다. 공감대라도 형성할 생각이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자비 없는 눈동자가 성민을 응시하며 허벅지를 느슨하게 벌렸다.

“성의를 보여. 그건 잘 알아들으니까.”

성민은 갈등하듯 바삐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잘못 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성민의 무릎이 바닥과 맞닿았다. 위에서 깔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성민의 머리는 더 깊이 숙여졌다. 당장의 치욕감보다 더 중요한 건 제 앞날이었다.

“회사까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저희 부모님은 아시면 충격받으실 겁니다……나이도 꽤 많으신데, 아시지 않습니까?”

지한에게도 부모는 있을 터였다.

“제, 가 첫째입니다.”

제 아들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실망감과 충격 때문에 쓰러질 거였다. 성민은 선처를 바라는 듯 목을 조아렸다. 그러자 벌어진 다리 위로 양팔을 걸친 지한이 손가락을 매만졌다. 성민의 눈에 그것이 흡사 잘 다듬어진 칼날처럼 보였다.

“미안하지만 쓰러질 엄마는 없고. 아빠는 내가 뭘 하든 안 쓰러져.”

성민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요동쳤다.

“그런데 네 부모님은 마음이 약한가 봐.”

이 남자에게 공감 능력이란 모래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거였다.

“아니면 쓰러지면 치명적일 질환이라도 가지고 있나?”

성민은 이를 악물었다. 저에 대해서 알아본 걸까.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심장 질환이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말도 사실, 소현이 준비가 덜 돼 시간이 필요하단 말로 모면했었다. 성민은 집안에서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실망을 안겨드릴 수 없었다.

“제발,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이젠 치욕감과 모멸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민은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몸을 숙였다.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벌레로 전락했다. 지한은 그걸 보며 나른하게 다리를 풀었다. 성민이 필사적으로 다리 한쪽을 잡고 머리를 깊게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제가 한 행동 자책하며, 자숙하고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지한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잠들지 못해 퍼석해진 눈엔 성민의 감정 따윈 비치질 못 했다. 이틀 동안 소현이 도피하듯 잠에 빠져 먹지도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느낀 기분을 지워내려면 저런 거로 어림도 없었다. 고작 그 이틀이 지한의 인생에서 손꼽힐 만큼 괴로운 순간이었으므로.

“윽……부탁드립니다.”

성민은 끝내 눈물을 쏟아 냈다. 지한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막막함에서 오는 눈물은 질척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밑바닥이나 다름없었다. 어렵게 입사해 올라갔던 지위와 부모님의 기대감. 저를 바라볼 직원들의 시선.

지한은 또 다른 공포감에 떨고 있는 체구를 익숙하게 내려다보았다. 위기의 순간엔 가장 중요한 걸 지키기 마련이다. 그게 소현이 아니었을 뿐.

“전 애인이라고?”

그 말에 성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한은 상체를 앞으로 깊이 숙였다.

“내가 들이대는 중이니까 손끝 하나 건드려 봐.”

귓가로 목소리를 박아 넣어 주었다.

“그땐 진짜 터져.”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는 너무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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