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학습된 두려움처럼 무릎 꿇은 성민의 허벅지가 잔뜩 오므라들었다. 지한은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말이 사실인지 지켜봐야 하니까 우선 보류로 할까.”
“가, 감사…….”
“보류라고 했어.”
지한은 기어오르지 말라는 듯 낮게 말했다. 성민의 고개가 연신 위아래로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소현이 근처엔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지금 이 집도, 당장 빼고 연락도, 안 하겠습니다.”
소현의 옆에 저런 남자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성민은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뺏어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얼른 발을 빼고 싶었다.
“사과는 해. 만나진 말고. 나 또 눈 돌면 재미없어.”
“알겠습니다.”
지한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갔다. 박 비서가 그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와 참았던 말을 꺼냈다.
“이 정도만 하셔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고작 이런 거로 끝내기엔 지한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동정심을 느꼈을 리도 만무했다. 지한은 바로 옆집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눌렀다. 소현이 알려준 것을 기억하려고 몇 번씩이나 곱씹고 있었다.
“내가 너무 허술해 보여요?”
“화나신 것에 비해 신사적인 처사이긴 합니다.”
지한은 성민을 추락시키는 대신 한 번 용서하는 거로 기회를 주었다. 문이 열리자 지한이 말했다.
“지금은 너무 먹을 게 없어.”
“네?”
“승진하길 빌어요.”
지한은 크게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야 떨어질 때 더 아찔하지.”
역시나 그에게 동정심은 없었다.
*
소현은 지한의 집이라고 했던 공간을 돌아다녔다. 유리창 너머로 한강이 보이는 펜트하우스의 규모는 거대했다. 높은 천장과 운동장을 방불케하는 공간, 그곳에서 지한이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호텔 방안이 더 인간적이고 지한의 생활이 묻어 있었다. 이곳은 그저 누군가의 꾸준한 관리로 인해 보존된 하나의 성역 같았다.
“재상 그룹의 손주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
소현은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았다. 호텔에서 마주한 노인의 얼굴을 소현이 모를 리 없었다. 광고 업계에서 그룹의 회장 정도는 기본 소양처럼 꿰고 있어야 했다. 그 남자는 분명 정찬호 회장이었다.
정 씨일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땐 그런 호기심조차 독약이었다.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현은 지한을 둘러싼 환경에 손조차 대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하아……걘 왜 그런 말을.”
소현은 낯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했던 소현은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는 만남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소현에게 연인이 되었단 표식은 지속적으로 만나고 잠자리까지 한 남자였다.
한데 지한은 정반대였다. 좋아하는 감정도 없이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냈고 그 이후로도 연인이란 증표로 삼을 만한 관계를 쾌락을 위해 사용했다. 처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한이 출국하면서 정리될 관계였으니까.
그런데 지한이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무엇보다 애매한 건 제 마음이었다. 지한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길 원했다지만 그것이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헤어진 뒤에 지한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고……소현의 눈꺼풀이 올라왔다.
“……진짜 미치겠네.”
지한에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제가 답을 해줘야하는 게 맞는 상황이다.
그때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현의 고개가 움직였다. 슬리퍼를 끌며 걸어온 지한이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소현을 발견하고선 멈췄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조용하던 집 안을 에워쌌다. 소현이 입술을 깨물자 지한이 물었다.
“거기서 잤어?”
“아니. 너무 많이 자서 안 졸려.”
그럼 거기 앉아서 뭐 했냐는 식의 표정이다. 앉아서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는 소현의 입에서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지한이 걸어왔다. 양손 가득히 들린 짐 중에 하나가 테이블로 놓였다.
“나 기다렸나?”
그 말에 소현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내려갔다.
“널 기다리긴 했지.”
일부러 앞에 놓인 짐을 부산스럽게 뒤적거렸다. 내일 출근하면서 입을 옷과 속옷, 화장품. 생각나는 것들 위주로 말했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왔다.
노트북이 손에 잡히자 소현은 숨이 트였다. 주말 동안 잠으로 시간을 보낸 터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한은 느긋하게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밥은.”
“아까 너 나가고 나서 조금 먹었어. 맛있더라.”
이 집에 데려다주면서 지한은 포장된 죽을 소현에게 같이 안겨 줬었다. 할 일도 없고, 핸드폰만 보면서 시간을 축내다 보니 금세 허기가 몰려왔었다. 이틀간 먹은 거라곤 물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음식이 들어가니 속이 거북해 반 정도밖에 비우질 못했다.
“착한 짓 했네.”
지한의 입가로 언뜻 웃음이 스쳤다. 그 장면이 소현의 목을 간지럽게 했다. 배고파서 먹은 게 이렇게 칭찬받을 일인지 소현은 민망했다.
“너는, 먹었니?”
지한은 벗은 외투를 소파로 던져두며 말했다.
“포식하고 왔지.”
근육으로 완성된 어깨가 드러나자 소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박혔다. 뭘 많이 먹고 왔구나, 애써 가볍게 생각하며 소현은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이제 저를 애타게 찾는 사람들의 원성을 해결해줘야 할 차례였다. 소현은 파일을 열며 일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 소매를 접어 올리는 지한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 일해야 되는데.”
“방해 안 해.”
지한은 곧바로 집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소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물건도 받았으니 이제 가라는 말은 너무 매정했다. 때가 되면 호텔로 가겠지, 소현은 신경을 끄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한이 테이블로 물병을 여러 개 올려 두고선 소현의 옆에 앉았다. 움푹 패는 가죽 시트가 소현이 앉은 곳까지 주름을 만들어 냈다. 지한은 소파 팔걸이에 목뒤를 대고 다리를 반으로 접었다. 소현은 두들기던 자판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잘 거야?”
“어.”
“…….”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지한은 잠을 통 못 잔 얼굴이긴 했다. 들어가서 편하게 자지. 제아무리 5인용 소파라지만 지한이 저러고 있으니 한없이 작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소현은 제게 안 닿게 하려고 접힌 다리를 보며 말했다.
“……다리 그러지 말고 내 뒤쪽으로 뻗어.”
그 말에 지한의 눈꺼풀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침대로 가서 자라는 말이 더 어울렸을까, 소현이 빤히 바라보자 긴 다리가 천천히 가죽 위를 기며 움직였다. 소현의 엉덩이 뒤로 한쪽 다리가 들어왔다. 그 꽉 차는 압박감이 소현을 절로 긴장시켰다.
소현은 애써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깜빡이는 커서가 심장 박동 수처럼 느껴진다. 사라졌다가 또렷해졌다가. 고작 다리 하나 닿았는데 감각이 집중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기획을 구상하는 것에서 막혔다. 소현은 마른 입술을 쓸며 지한에게 물었다.
“너 담배 가진 거 있니?”
지한은 말없이 팔을 옆쪽으로 뻗어 버려두었던 재킷을 집었다. 주머니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가 함께 나왔다. 소현이 피는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이거라도 어딘가. 멈춘 뇌를 팽팽 돌리기엔 니코틴만큼 좋은 게 없었다. 소현은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여긴 담배 어디서 태워야 해? 건물에 흡연실 따로 있어?”
“그냥 여기서 해.”
별거 아닌 듯 말했지만 소현은 쉽사리 불길을 당길 수 없었다. 고가의 가구와 깨끗한 벽지는 독한 연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소현이 포기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자 지한이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입술에 문 끄트머리로 불꽃이 고였다. 연기를 나긋하게 흘려보낸 지한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선 허리를 일으켰다. 소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순식간에 제 얼굴 앞까지 다가온 지한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입술에 대었다.
“벌려.”
소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거기에 담배를 끼워준 지한이 다시 누웠다. 소현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굴렀다. 지한의 입술이 닿았던 필터가 눅눅하게 점막에 달라붙었다. 고민하듯 물고만 있던 소현이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선 흘렸다. 물병을 열어 반쯤 비우고선 그 안으로 재를 털어 넣었다. 꽉 막혀 있던 뇌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체 중이던 키보드가 빠르게 소리를 냈다. 담배가 그 위를 함께 움직였다. 타격감에 타들어가던 담배가 얇은 표피를 떨궜다. 키보드에 재가 떨어질까 신경 쓰여 소현이 다시 입에 물려고 하자 지한이 다시 일어났다.
“이리 줘.”
지한이 소현의 손목을 잡아끌어 손에 들린 담배를 입술로 가두었다. 소현은 흠칫했다. 내리깐 지한의 시선이 올라왔다.
“하고 싶으면 말해.”
담배 때문에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저를 위한 행동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소현은 또 뛰려고 하는 심장을 억누른 채 키보드를 두들겼다. 바짝 당겨진 다리로 팔꿈치를 댄 지한이 연기를 흘리며 말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나는 너 때문에 어지럽다. 소현은 그 말을 삼키면서 모니터를 주시하는 시선을 모른척했다. 지한은 선호도 분야가 꽤 흥미로운지 질문을 했다.
“이런 것까지 해?”
“광고가 그럼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아니. 소비자층을 겨냥하고 성향이나 생활 패턴까지 파악하려면 분석은 기본이야.”
지한은 볼이 패도록 깊게 연기를 빨아 당기면서 물었다.
“나는 분석해봤어?”
소현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