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넌 광고가 아닌데.”
“그렇긴 하지.”
지한은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내 소현에게 내밀었다. 소현이 그걸 조심스레 물자 지한이 그 입술을 주시했다.
“애인은 네 머리에 안 껴줘?”
“…….”
하아, 연기를 뱉은 소현이 지한을 쳐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업무에만 매달려도 부족한데 일하면서 애인 생각하면 결과가 좋게 나오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완벽히 분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인과 다투거나 감정적으로 한바탕 한 날엔 예민해져 업무에도 영향을 미치곤 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지한이 연기와 뒤섞인 오묘한 눈으로 쳐다보니 소현은 입이 바싹 말랐다.
“난 방해 안 해.”
엉덩이 뒤에 있던 다리가 구부러지며 올라갔다. 그곳에 쓸린 척추가 저릿했다.
“지금도 대주고 있잖아.”
어지러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번졌다. 소현은 마른 입안을 축이며 지한의 손에 들린 필터를 머금었다.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입을 떼자 지한이 그걸 물병 안으로 넣었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치이익, 뜨거웠던 담배가 물에 젖으며 색이 진하게 변했다. 소현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지한을 쳐다보았다.
“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상관없어. 일 다하고 남는 시간 줘.”
귀로 열이 몰리는 것만 같다. 소현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러던지.”
“씻어야겠다.”
나른하게 다리를 뒤에서 빼낸 지한이 걸어갔다. 그제야 소현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심호흡했다.
자고 간다는 그 말 한마디가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횟수도 끝났으니 모든 건 상황에 따라 흘러가야 한다. 지금 허락도 소현이 원해서 한 말이다. 소현은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들겼다. 어서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멈춰 있던 뇌가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참을 키보드와 조우하던 손이 무거워진다. 찝찝한 감각을 느끼던 소현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세면대로 걸어가자 찰박하며 수면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놀래라.”
욕조에 기대어 있는 지한을 본 소현은 심장이 철렁했다. 아까 지한이 씻으러 간다는 소리를 한 이후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계속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 지한은 물기를 한껏 머금은 모습이었다.
“미안, 볼 생각 없었는데.”
너무 빤히 본 것만 같아 소현이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있는지 몰랐어. 다른 화장실로 갈게.”
“봐도 돼.”
이끌리듯 다시 소현의 얼굴이 움직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탄력 있는 근육으로 간지럽게 새하얀 거품이 흘러내렸다. 욕조를 가득 채운 거품에서 익숙한 향이 풍겨왔다.
“호텔에서 입욕제를 가져왔는데.”
지한은 느릿하게 물속에 잠겨 있던 팔을 들었다.
“아무리 부어도 잠이 안 왔어.”
새하얀 타월에 손을 문질러 닦은 지한은 바닥에 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소현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종종 안색이 어둡다고 느꼈었는데 잠을 잘 못 자는 걸까. 그러기엔 소현이 기억하는 건 깨우기 미안할 만큼 곤히 잠든 지한의 모습이었다. 라이터를 켜자 지한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음영 졌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게 빠졌더라고.”
“뭐가?”
“너.”
그 말에 소현은 문득 주변 공기가 연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입술에 필터를 미끄러뜨리며 지한이 소현을 보았다.
“강소현, 네가 없었어.”
이상한 논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기엔 진지한 지한의 얼굴이 소현을 끌어당겼다.
“못 믿겠으면 들어와.”
소현은 잠시 갈등했다. 자기 전에 샤워를 할 생각이긴 했으나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씨름한다고 해서 기막힌 아이디어가 생각날 거란 확신은 없었다. 소현은 욕조에 걸쳐진 긴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응시했다. 탁한 냄새와 달콤한 향기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기분 전환으로 괜찮지 않을까. 소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옷을 벗었다. 가느다래진 지한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조명등 아래에서 잘록한 허리가 곡선을 드러냈다. 허벅지를 훑으며 내려간 바지를 뒤로하고 소현이 샤워 부스를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소현은 긴 머리를 끈으로 높게 묶고서 욕조에 발을 담갔다. 지한이 다리를 반으로 접으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보다 더한 행위도 함께했던 사이다. 알지만 소현은 차마 다리 사이에 뻔뻔하게 기댈 순 없었다. 지한의 반대쪽으로 허리를 기대어 앉자 수면이 올라가며 일렁였다. 소현을 주시하며 지한이 필터에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따뜻하지.”
“어, 응……그러네.”
지한은 잠자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한 말이 사실인 듯 잠에 빠질 듯 노곤한 얼굴이었다. 아까 소파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누워 있던 것이 소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말 내가 있어야 잠이 오는 걸까.
“잘 거야?”
“네가 벗고 있는데 어떻게 자.”
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양옆으로 지한의 다리가 있어서 그런지 긴장된다. 소현이 시선을 떨어뜨리자 올라선 무릎이 거품 속으로 잠겼다. 그와 동시에 소현의 허벅지로 미끄러운 감촉이 스쳤다. 소현이 물속에 잠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지한은 욕조에 세운 팔로 고개를 기울이며 소현을 바라보았다.
“미안. 발이 스쳤어.”
“……괜찮아.”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소현은 무릎을 세워 웅크렸다.
따뜻한 반신욕은 건강에 좋다. 그런데 저 눈빛은 위험했다.
저를 쳐다보는 지한의 눈매가 진한 농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욕조에 담긴 수면이 비쳐 회색빛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손가락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며 물 위를 두들겼다.
“애인을 만들어 본 적 없어서 참고할 것이 필요해.”
“나, 아직 너랑 만나겠다는 소리 안 했어.”
“미리 연습해두려고.”
지한은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에 방치해둔 채 물었다.
“뭐가 되고 안 되는지 말해.”
“그런 거 묻지 마.”
소현의 얼굴로 연한 빛이 물들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두 뺨을 응시하던 지한이 말했다.
“알아서 하라는 소리로 들려.”
“분위기 봐가면서 하는 거지. 너 정말 애인 사귀어본 적 없어?”
지한은 대답 대신 팔을 접어 필터를 입술 사이에 가뒀다. 느긋하게 빨아 당긴 연기가 수증기와 뒤섞여 흘러나왔다. 연기 사이로 올라간 입술 끝이 소현의 눈에 보였다.
“지조 있지.”
꽤나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소현은 맞받아쳤다.
“그런 말, 너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데.”
“너랑만 어울리면 돼.”
소현은 할 말을 잃었다. 천천히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연기가 퇴폐의 한 장면이었다. 저런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이어나가본 적 없다니. 가만두지 않을 여자들이 한 트럭이었을 텐데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소현의 시선을 받아주며 지한이 담배가 끼워진 손을 욕조 바깥으로 뻗었다. 소현은 문득 숨이 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담배를 펴?”
“네 입술을 빨 수는 없잖아.”
진지하게 응수한다. 또 할 말이 사라진 소현은 더는 연기처럼 이 대화를 배회하고 싶지 않아 물었다.
“왜 나와 연인이 되고 싶은 건데?”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라, 솔직히 이젠 모르겠다.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소현은 성민의 일도 겹쳤기에 이제 연애는 손을 떼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좋은 것들이 나중에 소현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똑같이 반복 되어온 일에 대한 질투 역시 소현을 지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한에겐 말하고 싶어진다. 제 감정은 음지와 어울리는데. 말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 상황인데……소현은 열리지 않던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왔던 남자들은 전부 내 직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
그 말에 지한의 표정이 진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내 생활이 규칙적인 건 아니잖아. 주말에도 회사 일 끌어와서 할 때가 많다 보니 항상 그 문제로 다퉜어.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고, 자기 생각은 하는 거냐며 내가 하는 일에 질투를 했지.”
“나는 안 그래.”
소현은 뻔한 답에 조소했다.
“다들 처음엔 너처럼 얘기했어. 나중엔 다 똑같더라.”
“별 볼 일 없는 남자들만 만나서 그런 거지.”
“넌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넘치는 자신감이 소현을 자극했다. 지한은 생각할 문제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오히려 일에 지치고 찌든 너를 만나는 게 낫지. 전부 나로 채우면 되니까.”
소현의 입술이 굳었다. 일을 사랑하지만 그 과정이 항상 소현에게도 즐거운 건 아니었다. 저도 사람이기에 쉬고 싶고, 기대고 싶던 순간이 언제나 존재했었다.
연인의 위로와 사랑이 절실하던 순간들.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일을 손에서 놓고 찾아가면 원망과 다툼이 소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상대는 한숨과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적선하듯 관계를 주지 말라고.
그런데 지한은 달랐다. 오히려 일에 열정을 쏟아붓는 소현을 반겼다.
“……너처럼 말하는 남자 없었어.”
지한은 입가에 엉킨 연기를 느슨하게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별 볼 일 없지 않으니까.”
소현을 완벽히 저로 채울 수 있는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지한을 보는 소현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웅크린 엉덩이 옆면으로 형체가 비벼졌기 때문이다. 소현은 거품에 가려진 수면이 일렁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방금 것도 실수니?”
“부드러워서 만져본 거야.”
“내 살결이 좋은 건 나도 아는데 조심해줘.”
소현은 인내를 새기며 웃었다.
“내 쪽에서 참기 어렵거든.”
지한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다른 곳을 비빌 걸 그랬나?”
미끄러지는 음성에 소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머릿속을 채운 건 호텔 욕조에서 미끈거렸던 감촉과 행위에 위협적으로 몰아치던 수면이었다. 살과 근육이 맞부딪치며 내던 소리가 되살아나 소현의 고막을 두들겼다. 지한의 눈이 가늘어지며 녹아내린다.
“안심해. 예뻐해 준다고 했잖아.”
그건 소현의 허락 없이는 건드리지 않겠단 거였다. 그래서 참기 더 어려웠다. 허리로 올라온 감촉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어졌다. 지한이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수면에 담갔다가 빼며 옆으로 던졌다.
“오늘도 손만 잡고 자자고.”
관계가 확실해지기 전까진 나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