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45)화 (45/86)

45.

횟수는 전부 사용했다. 남은 건 줄타기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관계뿐이었다. 넘어갈 듯 말 듯 유지되는 불완전한 관계. 그건 연인이 아닌 사이에서 이뤄지는 묘한 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한은 호텔에서 잘 때도 있었고, 집에 찾아와 하루를 보낼 때도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저로 인해 수면의 질이 나아진 건지 육체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제 옆이면 어디든 잘 자는 모습이었다. 그건 소현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잠들 때보다 지한과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안정되는 건지 금세 깊은 수면에 빠지곤 했었다.

이 안정감이 낯설고 이상했다. 제 공간도 아닌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다니.

“이런 집 주변에 또 없어요. 전에 살던 사람이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요.”

소현은 중개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집 내부를 훑어보았다. 25평에 방 하나, 거실. 그리고 복층까지. 가장 기본적인 구조의 오피스텔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신경 써 지냈는지 딱히 흠잡을 데는 없었지만 답답한 느낌이 소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이 집 보러 온 사람이 셋이었어요. 빨리 계약 안 하면 우리도 보장 못 해요.”

“그럼 저랑 인연이 없는 거겠죠.”

창문을 열어본 소현은 달려드는 바깥 소음에 도로 문을 꽉 닫았다. 성민만 아니라면 이런 고생도 안 하는 건데. 소현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잘 봤어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마음에 안 들어요?”

중개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미소 지었다. 소현은 그녀를 따라 웃었다.

“네.”

하나는 날아갔고, 나머지 두 개가 남았다. 이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팀장은 딱히 꼬투리를 잡지 않았지만 6시에 가방을 챙기는 소현을 좋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회사로 돌아갈까. 저녁을 먹지 않아 속에서 허기진 감각이 씁쓸하게 몰려왔다. 요즘 입맛이 통 없다 보니 일어난 결과였다. 담배를 태우던 소현은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도착한 메시지엔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소현아. 그날은 내가 잘못 했어. 두 번 다신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집도 뺄 거야.]

말투를 보건대 딱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신 차단을 했더니 다른 번호로 연락한 걸까. 소현은 불쾌감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네게 상처줘서 미안하다. 한 번만 용서해줘. 내가 첫째인 거 알잖아.]

연달아 도착한 문자에 소현은 담배를 입가에서 떼었다. 이런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던 기억이 소현의 입에서 독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개새끼처럼 살지 마.]

불쌍한 척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미안하다는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 본데, 밤길 조심해라?]

짙은 냄새가 밴 손끝으로 문자를 쓴 소현은 잠자코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지한이 가볍게 안 넘어간다고 손을 떼라고 한 이후부터 소현은 이 문제를 잊고 지냈었다. 덕분에 생각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지한은 성민에게 뭘 했을까.

[너 나한테 사람 붙였어? 왜 그래, 네 주변엔 얼씬도 안 한다고 했잖아.]

성민이 이토록 벌벌 떠는 걸 보아하니 상상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날 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괴로운 신음이 상상을 부추겼다.

제가 경험했던 공포를 조금이나마 느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불안에 떨면서 그날을 후회하고 두려워하길.

소현은 가볍게 문자를 씹으며 몸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재킷 안으로 스며든다. 아무래도 회사보단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

지한이 준 카드 키는 까탈스러운 보안을 뚫고 지나가는 열쇠였다. 아무리 비싸도 경비 시스템이 확실한 곳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소현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 본 집은 이에 훨씬 못 미쳤었다. 이곳처럼 조용하지도 않고. 소현은 복도를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아…….”

열자마자 현관에 보이는 신발이 소현의 심장을 두들긴다.

지한이 와 있구나. 아까 퇴근하면서 전화했을 땐 통화 중이라 바쁜가 했었는데 여기에 있을 줄 몰랐다. 소현은 애써 차분하게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못 봤던 박스들이 집 안 이곳저곳 놓여 있었다. 오피스텔에 방문하길 꺼려 하는 소현의 마음을 읽었는지 지한은 그날 이후부터 조금씩 짐을 가져왔다. 박스 겉에 적힌 이삿짐 상호를 보아하니 오늘은 아예 업체에게 맡겨 전부 쓸어 온 듯했다.

어차피 이사할 거라 짐을 이곳으로 옮기는 건 상관없는데.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터라 소현은 대리석 바닥을 헤치며 걸었다.

“너 뭐 해……?”

주방을 점령하고 선 큰 몸집에 소현이 당혹스러운 음성을 뱉어 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지한이 말했다.

“요리하는데.”

“뭘, 한다고?”

지한은 제 손에 들린 야채를 소현에게 확인 시켰다.

“요리.”

큼지막한 손에 들린 양파가 껍질은 고사하고 속살까지 헤집어 있었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았다. 개수대에 참혹하게 토막 나 버려진 야채를 본 소현은 기함했다.

“혹시 오늘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지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면, 화나는 일이 있다거나…….”

날렵한 손과 한 쌍인 양 어우러져 있던 칼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입맛 없다며.”

“내가 언제 그런 소릴…….”

말 끝이 흐려졌다. 며칠 전에 혼잣말처럼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거와 상관없이 지금 이 장면은 소현에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식재료가 난도질 된 모습은 남아 있던 식욕마저 사라지게 했다. 지한이 더 망치기 전에 손에 들린 칼을 빼앗은 소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테니까 저리 가.”

“손질 다 했어.”

“뭘 다 해? 치울 게 산더미인데, 대체 뭘 만들려고 이 난장판을 저지른 거야?”

소현이 재킷을 벗으며 시계를 풀었다.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지한이 개수대에 팔을 짚으며 소현을 가로막았다.

“안 되겠는데요.”

소현의 눈이 사선으로 옮겨갔다. 가만 보니 지한의 한쪽 귀에 이어폰이 걸려 있었다. 누구와 통화 중이었나. 지한은 찌푸듯하게 눈가를 구겼다.

“지금 와주세요. 내가 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니까.”

그 말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종료했다. 소현은 칼을 든 채로 지한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누구랑 전화한 거야?”

“요리 잘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어?”

“어. 말 잘 듣고 있었는데 네가 방해했지.”

그래도 그렇지, 레시피를 알려주던 상대방도 지금 이 사태를 보면 할 말을 잃을 거다. 영상 통화로 안 한 게 어디인가. 소현은 칼을 내려놓고서 정리 먼저 하기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지한이 손목을 잡았다.

“먼저 씻고 나와.”

“금방 해. 제발……아무것도 하지 마. 네가 칼 들고 있으면 걱정돼.”

“다칠까 봐?”

아니. 사람 하나 죽일 거 같아서. 소현은 웃었다.

“그래. 다칠 까봐. 피 보긴 싫거든.”

예리한 물건과 지한은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음식물을 한곳에 모은 소현이 주방 곳곳을 뒤적거렸지만 담을 만한 봉투가 보이질 않았다.

샤워하면서 편의점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현이 욕실을 나왔다.

뽀얀 살결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자 개운해진다. 소현은 가벼운 차림을 한 채로 주방에 도착했다. 아까와 달리 낯선 여인과 지한이 함께 있는 걸 발견한 소현의 입이 서둘러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나오셨나 보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이렇게 와서 미안해요.”

수더분한 얼굴의 여자는 소현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까 지한과 통화한 인물인가. 그녀가 가져온 건지 식탁 위로는 완성된 반찬이 밀폐용기 안에 정성스럽게 담겨 탑을 이루고 있었다.

“도련님, 여기 보세요.”

그녀는 요리 도중에 지한을 불렀다.

“보고 있어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현은 식탁 의자에 앉아 요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까 전화로 알려주었던 것을 직접 보여주는 모양이다. 집중한 건지 지한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다. 여자의 손짓과 말을 오롯이 흡수하는 것처럼. 소현은 문득 가슴으로 잔열이 일었다. 저를 볼 때 지한의 표정이 지금과 한 장의 그림처럼 맞물렸다.

“식사 시간이 늦어서 어떡해요?”

“아니에요.”

그녀는 금세 식탁이 가득 찰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늘어놓았다. 소현은 꼴깍 군침을 삼켰다.

“도련님 입맛에 맞추긴 했는데, 간이 맞으려나 모르겠어요.”

전복에, 불고기에, 어전 그리고 손이 많이 간다는 구절판까지. 진수성찬이었다.

잦은 미팅으로 인해 맛에 까다로운 식성을 가지게 된 소현이었기에 큰 기대감 없이 입에 음식을 넣었다. 소현은 저도 모르게 굳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음식이 입안에서 씹을 새도 없이 녹아내렸다. 놀란 마음에 서둘러 말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래요? 다행이에요.”

“실력이 보통이 아니신데요, 이렇게 맛있는 식사 정말 오랜만이에요.”

풍미가 진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국과 포슬포슬하게 알이 살아있는 밥까지. 소현은 젓가락을 움직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잘 먹는 모습에 안도하며 웃었다.

“아유, 칭찬 들으니까 부끄럽네. 많이 먹어요. 일하느라 바쁠 텐데 체력이라도 튼튼해야지.”

제가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소현은 그와 상관없이 식사를 하기 바빴다. 열심히 움직이는 입술 옆에 찍힌 점을 감상하던 지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입에서 아부 잘 안 나오는데.”

진지한 눈빛이 미소 지은 그녀의 입가를 지나갔다.

“부럽네요.”

그녀는 민망한 듯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도련님, 과찬이세요. 어서 드세요. 정리까지 하고 갈게요.”

“아니에요, 정리는 제가 하면 돼요. 이렇게 귀한 음식까지 오셔서 해주셨는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편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소현은 미안함에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미각이 한껏 자극돼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제 입에 꼭 맞는 음식을 먹는 건지, 없던 식욕까지 생겨나 곤혹스러웠다.

“천천히 잘 씹어 먹어.”

“그러고 있어.”

소현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남은 밥을 국그릇에 넣고 말았다. 그냥 떠먹을 때도 맛있었는데 밥까지 촉촉하게 적셔 먹으니 금상첨화였다. 숟가락으로 한 움큼 퍼서 입에 넣는 모습을 지한은 턱을 괸 채 음미하듯 쳐다보았다.

눈으로 포식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시각적인 포만감에 지한은 차려진 밥상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너도 얼른 먹지 그래?”

“그러고 있어.”

저 입술로 들어간 음식이 텅 빈속을 채울 때까지 지한도 소현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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