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며칠 동안 소현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한정돼 왔었다. 심리적으로 괴로우면 그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제가 잠에 못 드는 것처럼. 다만 그딴 남자 하나 때문에 몸이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이라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잘 먹으니 지한도 큰 고민거리를 내려놓은 셈이다.
“아, 배불러. 너무 많이 먹었나…….”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소현은 터질 것처럼 늘어난 위장이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반찬을 다 먹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계속 그릇을 쳐다보았다.
내일 먹자, 내일도 있잖아. 소현이 뒤늦게 휴지로 입가를 닦자 다가온 그녀가 말했다.
“아유, 안 남기고 다 드셨네.”
“솜씨가 너무 좋으셔서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아니에요. 도련님도 이렇게 잘 먹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지한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느린 턱짓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게 울려 퍼지는 벨 소리에 포만감에 늘어진 소현의 어깨가 흠칫했다. 지한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음성이 귀를 찢을 것처럼 달려 들었다. 조용한 집안과 대조될 만큼 큰 음량이라 소현이 옆 의자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소리가 왜 이렇게 커?”
“그래야 잘 들리니까.”
지한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고선 액정을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전화인가. 창가로 걸어가는 지한에게서 시선을 뗀 소현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할게요. 전화받으러 가서 언제 끝날 지도 모르고요.”
“그럼 정말 고마운데…….”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듯 식탁 앞을 서성였다. 소현은 그 행동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지한이가 원래 잘 안 먹나 봐요.”
“한식을 워낙 입에 잘 대지 않아서요.”
“외국에서 지내면 그럴 수 있죠. 저도 예전에 유학 갔었을 때 한식이 너무 그리웠었는데 살다 보니 느끼한 음식에 적응하게 되더라구요. 간단하게 먹기도 좋고요. 다시 돌아와서도 한동안 계란과 소시지로만 아침을 먹기도 했어요.”
“도련님은 외국에서 태어나 더 그러실 거예요. 한국엔 일 년에 잠깐 들어오는 게 전부고요.”
소현은 궁금증을 억누르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를 유추해 나갔다.
“이번엔 좀 오래 머물죠?”
“가는 날짜는 아직 안 정하신 모양이에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회장님께서 기뻐하셔서, 오래 계시면 좋겠는데…….”
“회장님이 지한이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아무렴요. 이 집도 회장님이 5년 전에 사두신 건데 생활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에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예요.”
애정이 남다른 건 알겠는데, 그 이유가 뭘지 소현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지한이가 외국에 부모님이 계시니까……자주 보고 싶으신가 봐요.”
“둘째 아가씨 그렇게 되고 난 뒤에…….”
넋 놓고 말하던 그녀가 서둘러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내 정신 좀 봐. 빨리 가봐야겠어요.”
어색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정리를 부탁한다며 나갈 채비를 했다. 소현은 태도가 뒤바뀐 그녀를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선 복도를 거닐었다. 거실 창가에 서 있는 지한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지한은 상대방과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통해 두 개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해왔을 거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그 언어가 나직한 음성으로 흘러와 소현의 가슴을 두들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현실과 먼 남자라고 느꼈었다. 그 오묘한 느낌이 지한을 둘러싼 환경에서 비롯된 걸까.
소현은 이제 그가 궁금해졌다. 창문 너머로 자옥하게 깔린 야경을 담아내던 회색빛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왜.”
소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멀리서 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한의 옆에 와 있었다. 소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기 위해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노트북 좀, 빌려줄래? 깜빡하고 회사에 두고 왔어.”
급하게 둘러댄 핑계치고는 적절했다. 오늘 집을 보러 가는 것 때문에 최대한 짐을 덜어내고 가볍게 움직였었다. 지한은 핸드폰 귓가에 밀착하며 걸어갔다. 서재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을 펼친 그가 한 손으로 비밀번호를 해제했다.
곧바로 방을 나가는 바람에 소현은 서재에서 업무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그래, 일이나 하자.”
반포기 상태로 의자에 앉은 소현은 인터넷 창을 열었다. 메일함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미 전에 작업하던 창이 열려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한의 메일 계정을 보게 된 소현의 눈동자가 매각이란 단어에 붙잡히듯 멈추었다. 이윽고 메일 제목을 천천히 훑으며 내려갔다.
입찰 날짜, 인수 자금……한 달 전부터 꾸준히 와 있는 메일 제목들은 전부 지한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까다로운 사안들이 메일함에 수북했다. 소현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매각이란 글자와 함께 언급된 ‘닌톤사社’는 국내에서 인지도 높은 ICT 기업이었다. 증권가에선 암암리에 매각설이 돌긴 했지만 대한민국의 기둥 같은 존재라 소현은 한 귀로 듣고 흘렸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왜 지한의 메일에…….
“뭘 봐?”
소현의 눈이 순간 정지했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 오는 지도 모르고.”
책상을 짚는 팔이 무겁게 소현의 폐를 눌렀다.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린 거냐고 묻고 있지만 답은 이미 모니터에 나와 있었다. 발뺌하기엔 이미 늦었다. 소현의 뒤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을 거였다.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엿볼 생각 없었는데 창을 여니까 바로 이게 보이네.”
“그래서. 봤나?”
“내용은 못 봤지만.”
소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웃었다.
“이렇게 들킬 거였으면 볼 걸 그랬네, 그럼 오해받아도 억울하진 않았지.”
뭐가 웃긴지 지한이 가볍게 숨을 흩트리며 허리를 숙였다. 소현의 귓가로 입술이 부드럽게 밀착됐다.
“그럼 억울하지 않게 보고 싶은 거 눌러서 봐.”
그 말에 소현의 심장이 꽉 조여졌다. 마치 시험당하는 것만 같았다. 남들에겐 알려지면 안 될 부분을 제게 허락하지만 이건 지한의 사생활이었다.
이걸 눌러 내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민하던 소현은 반쯤 올라선 손가락을 움직여 메일을 열었다. 거기엔 매각 의사를 밝히는 닌톤사 측 의견과 조 단위를 넘어서는 가격 등, 기업과 기업이 아니면 주고받을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빠르게 글자를 훑어본 소현이 물었다.
“인수할 계획인가 본데, 재상에서 하는 거니?”
지한은 제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아는 소현이 의외였는지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아니. 할아버지 말고 아빠가 관심이 있어.”
아버지라, 그러고 보니 지한의 가족이 뭘 하는지 소현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런 중대한 일을 지한이 맡아서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너 백수 아니었어?”
“백수도 머리는 굴리지.”
놀고먹는 줄 알았는데, 버젓이 하는 일이 있었다. 소현은 잠시 경직된 머리를 굴렸다. 글로벌 기업이 국내 시장에 침투할 때 인수하는 방법으로 시장을 점유하는 방법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 과정을 지한이 직접 주도하고 있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충격적이었지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 생겨난 이질감이었다. 소현은 팔짱을 끼운 채 물었다.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넘어가게 되면 넌 어떻게 되는 건데?”
“글쎄.”
지한은 생각하듯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소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움켜잡는 것처럼 긴 손가락으로 힘이 실렸다.
“한자리 달라고 해야지. 꽤 오래 공들인 거거든.”
손가락이 표면에서 깔끔히 떨어지자 소현의 심장이 끌어내려졌다. 그건 소현에게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참지 못해 소현이 물었다.
“한국에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뒤로도 계속 여기 있겠단 소리야?”
“너 때문에 있는 거지. 일은 별개야.”
진지한 어조로 말을 바로잡아주었지만 그 때문에 소현의 가슴은 벅차게 뛰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더는 제어할 수 없었다. 끌림이 고조되는 것을 막지 못한 소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오늘, 자고 갈 거니?”
지한의 눈 밑이 미끄럽게 올라갔다.
“대주기도 할 건데.”
소현의 입술이 질끈 묶였다. 한참 뒤에 숨을 달싹이며 물었다.
“뭐를?”
“팔.”
아……그거. 그런 뜻이었구나. 소현은 저 혼자 상상한 것이 민망해 긴 머리카락을 끈으로 한데 묶어 올렸다.
“일해야 하니까 나가. 빨리 끝내볼 테니까.”
지한은 더는 방해 안 하겠다는 듯 문으로 걸어나갔다. 벌어진 틈 사이가 맞물려 닫히자 소현의 눈동자가 모니터를 떠났다.
창문 밖 야경과 몸에 잠식된 열기가 뒤섞였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창문 그 어딘가에서 번쩍이며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접던 걸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했다.
*
“너 정말 미국엔 안 가는 거야?”
“그렇게 됐어.”
지한은 대충 답해주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매일 같이 이뤄지던 술자리도 간만이었다. 솔직히 말해 다들 지한이 한국을 뜬 거로 알고 있었다. 오늘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시선이 제게로 집중된 것을 느낀 건지 지한이 조용히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 신기해서.”
입술에 잔을 갖다 붙인 지한은 꽤 안색이 좋은 편이었다. 전처럼 잠들기 위해 막무가내로 술을 들이붓던 것과 달리 소량으로 천천히 나눠 마셨다. 마치 정신을 놓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긴 손가락엔 뭔가를 기다리듯 핸드폰이 감겨 있었다.
“형, 여기 머무는 거 아버지가 뭐라고 안 하세요?”
“내가 애야?”
지한은 나직이 말했지만 이곳에 부자간의 사이가 끈끈한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업으로 바쁜 인물인데다가 다 큰 성인이 뭘 하든 관심 없기 마련인데 아버지인 그는 꾸준히 지한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었다.
그 관심은 지한 하나에 한정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와 통화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는 제 아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해하기 보단 지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달라는 당부 비슷한 것을 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지한이 가진 것들은 없는 호감도 끈끈해지게 했다.
“회장님은 좋아하시겠다.”
성우의 말에 민준은 애써 웃으며 물었다.
“장유란 재상 전자 CF 하기로 했다며. 네가 부탁했어?”
“부탁은 무슨.”
지한은 표정 변화 없이 건조하게 말했다. 그 괴리감이 민준의 머릿속에 혼란을 만들어 냈다. 유란에게 듣기론 지한이 직접 만나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했는데 민준이 아는 지한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협박한 거면 모를까.
“소현이가 해달라고 해서 얘기를 좀 했지.”
“소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