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말끝을 늘이던 성우가 입을 붙이며 다물었다. 강소현에서 소현이로 갑자기 전개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름을 성 떼고 부른다는 것도 낯설었다. 자주 만나는 저들마저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 것이 지한이었다. 민준은 놀라움이 번진 내부 속에서 정신을 차린 채 물었다.
“많이 친해진 거 같네. 그때 만나기로 했다면서……그럼 애인?”
애인이라는 단어에 성우가 경기를 일으키듯 눈치를 주었다. 일전에 강소현에 대해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희생된 녀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지한은 온순한 양처럼 말했다.
“아직 거기까진 아니고.”
“그럼?”
“같이 지내고는 있지.”
그럼 동거인가? 지한을 제외한 눈빛들이 오고 갔다.
확실히 사상이 개방적이다 보니 동거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가. 그보다 지한이 한 여자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공들이며 만남을 이어나가는 점이 신기하고 색달랐다.
그만큼 남다른 애정을 주면서 왜 연인 사이는 아니라고 하는 걸까. 혹시 지한이 그 사실을 인지 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민준이 헛기침했다.
“그 정도면 연인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아?”
“고백했는데 기다리는 중이야.”
고백, 고백. 그 놀라운 단어가 메아리처럼 내부에 번져 나갔다. 성우는 아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잔을 들고만 있었다. 지한은 침체된 분위기를 감지하고선 시선을 들었다.
“왜 문제 있어?”
“아니. 장우야, 거기 물 좀 줄래.”
“저부터 마시고요.”
그때도 지한이 십만 원과 만난다고 해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했다. 정지한이 여자에게 고백이라니. 거기다 그 여자는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지한의 곁을 차지하려고 혈안이었던 여자들을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터라 당연한 생각이었다.
대체 어떤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에 정지한을 한낱 남자로 전락시킨단 말인가.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적막을 뚫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한의 핸드폰이었다. 무음이 아닌 것도 낯선데, 지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조이며 귓가로 핸드폰을 가져다 대었다.
“어.”
「나 지금 퇴근하는데, 너 어디야?」
“호텔.”
들고 있던 잔까지 내려둔 채 지한은 통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거기서 잘 거야?」
“아니. 부르면 가게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었지.”
희미하게 웃는 입술을 본 성우는 목이 타는 듯 술잔을 금세 비웠다. 발톱을 숨긴 짐승의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나 집 보러 나와서 일찍 못 들어간다고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저녁 안 먹었으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집?”
「주말에 본 집도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곳 하나 더 급하게 보기로 했어. 이젠 결정 내려야지, 언제까지 네 집에 짐 둘 수도 없고.」
반쯤 열린 지한의 입술로 혀가 위험하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하지.”
「충분히 시간 많이 보냈어. 이따가 집에 갈 때 전화할게. 친구들하고 같이 있니?」
“아니. 혼자야.”
「혼자서 청승맞게 뭐 하고 있어?」
“네가 주워가든가.”
삐딱하게 지한의 다리가 올라와 꼬였다.
“나 얼마나 더 기다려?”
「집 보고 나면……글쎄, 끝나고 전화할게.」
지한이 곤두선 제 허벅지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지금 데리러 갈까.”
「아니.」
전화가 먼저 끊겼다. 지한은 핸드폰을 느리게 떼어내더니 소파에 처박으며 술잔을 비웠다. 빈 잔을 입술에서 떼어낸 지한이 미간을 구겼다.
“아. 술 마셨네.”
애당초 운전을 못 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지한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잔을 테이블로 놓았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세 사람은 침묵을 유지했다. 딱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전화 하나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양면적인 남자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너 요즘 달라졌다? 변했다? 어느 쪽이든 지한의 심기를 건드릴 거다.
지한조차 이런 제 변덕스러움을 인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회색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색을 비췄다.
“내가 요즘 불쾌한 일이 많아.”
“사랑싸움을 하면 그럴 수 있지.”
민준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가 봐도 사랑싸움이 맞았지만, 아직 애인 사이가 아니라고 했던 지한에게 꺼냈다는 건 큰 실수였다. 지한은 교차된 다리를 조이며 말했다.
“그래. 그 싸움을 몸으로 안 풀어서 곤란하다고.”
그 말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지한의 골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놀란 듯 시선이 빠르게 올라오는 건 짜 맞춘 듯 똑같았다. 언제부터 저런 상태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한은 귓가에서 흘러내리던 소현의 숨을 되새겼다.
“미치겠어.”
숨소리 하나에 아래까지 긴장시키는 여자를 옆에 두고 묵언수행을 하듯 아무런 짓도 안 하고 있다니. 손만 잡고 잔다는 것도 수작질에 불과하다. 그거라도 안 하면 괴로운 건 저라는 것을 지한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소현의 안에서 경계심이 풀어질 때까지, 허락으로 이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소현의 심신이 누구와 연애할 상태가 아니라는 건 성민의 아래를 밟아주면서 직감했었다.
남자라면 꼴도 보기 싫겠지.
“착한 짓도 어울리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지한은 열이 몰린 감각을 참으며 턱을 씹었다.
“꼴려서 돌아 버릴 지경이야.”
더군다나 저 같은 사람에겐 말이다.
*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소현의 인사에 수염이 까슬하게 돋은 남자가 턱을 문질렀다.
“오늘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와야 할 텐데요.”
“김경수 감독님이라면 걱정 안 하는 걸요.”
소현은 눈웃음을 지으며 감독과 스텝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다. 바닥으로 긴 선이 덩굴처럼 엮여 있었다. 선을 피해 수십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소현은 촬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할 중요한 현장인데 소현은 급속도로 피곤함이 밀려왔다.
성민 때문에 성욕이 시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요즘 지한과 함께 있는 시간이 소현을 힘들게 했다. 지한이 손을 잡아도 그렇고, 평소처럼 저를 안고 잠만 자는데도 심장이 가만 있질 않았다. 잠결에 허벅지로 반쯤 들어온 다리와 엉덩이 뒤로 맞닿은 형체의 윤곽이 감질나게 소현의 취약점을 건드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묵직한 숨결과 짙어지는 체향까지. 거친 존재감을 등에 두고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맞잡은 손이 제 몸을 탐미하듯 문지르고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상상에 젖었다. 살결 위로 입술이 미끄러지며 혀끝으로 뭉갤 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기에.
“……걘 나랑 자도 아무렇지도 않나.”
지한은 고작 손만 잡고 자는 거로 만족하는데, 곤히 잠든 남자를 두고 저 혼자만 이러는 것만 같아 심란했다. 소현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선 팔짱을 꼈다.
잡다한 생각은 그만 하고 일에 전념해야 한다. 김 부장을 떠올리며 시선을 내리깐 소현은 복작거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걸어오는 인물을 본 소현의 눈빛이 일순 반짝였다.
화사한 미소가 스포트라이트처럼 빛났다.
“안녕하세요.”
고대하던 배우가 등장했다. 소현은 끼고 있던 팔을 풀며 촬영장에 온 주인공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장유란 씨. 현진 기획에 강소현 대리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화사하게 웃던 유란의 안면이 일순 굳었다. 명함을 내민 소현은 그걸 받지 않고 저를 빤히 보는 눈빛에 의아해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매니저가 서둘러 명함을 대신 받았다.
“우리 유란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촬영 앞두고 유란이가 신경 쓴다고 어찌나 열심이던지, 하하.”
“아닙니다. 자기 관리 잘하시는 분이라는 건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한걸요.”
소현은 미소 지으며 매니저와 얘기를 나눴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불발될 뻔한 걸 다시 엮은 거나 다름없어 매니저는 오늘 촬영에 의욕이 넘치는 것처럼 유란을 포장했다. 그 포장 실력이 형편없더라도 소현은 모른 척 해줄 거였다. 그녀가 제격이라는 생각은 실제로 본 순간부터 굳건해졌으니. 지난 날이 어땠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감독님과 콘티 확인하시죠.”
“네. 가자, 유란아.”
유란은 굳은 안면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감독과 인사했다. 콘티를 확인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의욕적이지 않았다. 마치 신경은 다른 곳에 팔린 것처럼 옆에 선 소현의 얼굴을 의식했다. 설명이 끝나고 메이크업을 받으러 공간에 들어가자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너 왜 그래?”
“내가 뭘?”
“아니, 뭐 씹은 표정이잖아.”
대꾸하지 않고 유란은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제 얼굴은 놀라움과 표독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포커페이스엔 자신 있었지만, 지금은 조절이 되지 않았다. 유란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 놓으며 등을 기댔다.
“피곤해서 그런가. 메이크업 받을 동안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을게.”
눈꺼풀을 내린 유란은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얼굴을 되새겼다. 제게 강소현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지한과 같이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확실했다. 일반인치고는 화려한 이목구비라 유란마저 처음 보았을 때 긴장할 정도였으니까.
그 여자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 지한은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유란을 두고 따라갔었다. 자신이 키스에 헝클어진 감정을 추스를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온 지한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너 그만 가라.
―어?
흥미를 잃은 듯한 눈동자가 유란을 보았다.
―차비 줘?
거기에 기분이 상했지만 풀린 눈이 여전히 질척한 욕심이 생길 만큼 섹시했다.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그래서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다. 매달리는 것보다 유란은 다음을 약속하며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었다.
그런데, 다음 날 호텔 라운지에서 만났을 때 지한은 제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왔던 여자, 지금 촬영장에 와 있는 강소현이란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니.
지한이 제게 왜 연락을 했나 싶었는데, 이제야 변덕스러운 성미에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재상과는 엮이고 싶지 않던 유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리까지 마련한 게, 다 저 여자 때문이었다. 유란은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 올렸다.
“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경련하는 손끝에 힘을 줘 의자를 짚고 일어났다. 준비된 의상은 반짝거리는 큐빅이 가슴부터 치마 끝까지 빼곡히 박힌 드레스였다. 조명을 받으면 흰 살결과 조화를 이뤄 하나의 보석처럼 빛이 날 거였다.
의상까지 점검하고 밖으로 나서자 소현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예쁘신데요?”
저를 칭찬하는 얼굴이 유란은 가증스러운 연기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촬영해보고 나중에 눈 화장만 더 들어갈게요.”
제가 부탁했을 땐 거절하더니, 지한과 만나고서 수락한 것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촬영을 앞두고 머리를 손보는 아티스트를 뒤로 물리며 유란이 소현에게 다가갔다.
“강소현 씨라고 했나요?”
“네.”
“나 알죠?”
그 말에 소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네. 장유란 씨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요.”
소현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어떤 얘기인지 듣겠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유란이 표면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때 지한이랑 키스하는 거 봤잖아요.”
그 말에 소현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