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48)화 (48/86)

48.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내가 보았다니.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졌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끝낸 유란은 무척 화사했고, 그 얼굴과 지한을 연관 짓는데 꽤 시간이 소요됐다.

키스라는 단어 덕분에 한 장면이 소현의 머리에서 걸려들었다. 처음 지한과 만났을 때 키스하고 있던 여자. 소현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서요?”

하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제게 할 말 있으신가요?”

지한의 옆에 여자들이 많다는 건 이미 예상한 거였다.

“할 말이 없겠어요?”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서도. 소현은 저보다 놀랐을 유란에게 걱정 말라는 듯 답했다.

“제가 그날 술이 과해서 장유란 씨인 줄 모르고 있었네요. 사생활 관련해 알려지면 곤혹스러운 거라면 염려마세요. 말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지금도 장유란 씨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기억 못 했을 거예요.”

유란은 모욕감을 감추려 더 화사하게 웃었다.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기억을 못 하시나 봐요?”

네가 아닌 날 보고 있었다는 지한의 말대로, 소현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날 모델로 쓰고 싶다고 단내 나는 말을 흘렸던 건 소현이었다.

“아니, 제가 이번 촬영에 어울리는 사람이기는 한가요?”

“술에 취한 상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맨정신 아닌가요?”

“맞아요. 정신 멀쩡한 사람으로서, 장유란 씨 모델로서 지금 완벽할 만큼 멋진 모습이에요. 이견 없어요. 누가 봐도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소현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유란은 그 평온함을 깨뜨리는 것처럼 깊숙이 말을 박아 넣었다.

“그럼 지한이한테 고마워하세요. 여기 온 것도 지한이가 내게 해준 일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두고서 유란은 걸어갔다. 홀로 남은 소현은 다물린 입술을 조금 벌려 틈을 만들었다. 심호흡을 하는데 어질러진 머릿속이 쉽게 정렬되지 못 했다.

그때 지한과 키스했던 게 장유란이었다니.

놀라운 건 찰나였다. 이제야 왜 지한이 미팅 자리에서 장유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기억 못 하냐는 말도 연이어 납득이 갔다.

정말로 소현은 그때 지한이 누구와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얼굴은 보았지만 퇴폐적인 강렬함 앞에 유란은 흑백 화면이었다. 소현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지한처럼 남기지 못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한에게 부탁이나 하고. 아니, 그건 그렇게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장유란은 이번 광고에서 히든카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심정이 왜 지금 후회로 변질됐는지 소현도 알 수가 없었다. 소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세트장에 선 유란을 보았다.

지한과 어떤 사이인걸까.

그 호기심이 예전과 달리 도화선처럼 시작돼 소현의 안에서 불거졌다. 그땐 적어도 유란이 지한과 키스했을 거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친한 사이, 아니면 몸까지 친한 사이. 상상으로 짐작하던 것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

촬영을 부탁할 때 지한은 과연 유란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자, 촬영 시작합니다.”

뜨거워지는 소현의 머릿속과 달리 초록색 크로마키에 둘러싸인 유란은 아름다웠다. 스물여섯에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자리매김했듯이 지금도 사뿐하게 높은 구두로 계단을 밟았다. 우아하고 한편으로는 거침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변모하는 눈빛이 소현의 시야를 긴장시켰다. 강풍이 불자 드레스에 밀집된 반짝임이 유성우처럼 허공으로 넘실거렸다.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과 긴 머리카락을 허공에 흩날렸다. 난간을 쓸어 만지며 계단 중턱에 멈춰 선 유란은 절경이었다.

“컷, 다시 한 번 갈게요.”

그런데 감독은 까다롭게 표정과 포즈를 요구했다. 촬영 현장의 열기에 소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한에게 전화하고 싶은 손을 묶어두는 심정으로 주머니 안으로 손을 껴 넣었다.

유란이 지한과 잘 어울리는 외형의 소유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김 부장이 나타났다. 소현은 숨을 터트리며 미소를 장착했다.

“어서 오세요, 부장님.”

“벌써 시작했나?”

촬영장을 방문한 김 부장은 장유란을 보더니 입매를 까다롭게 굳혔다. 그것이 호의적인 표시인지 관찰하던 소현은 감독에게 김 부장을 데려가 소개했다. 잠깐 중단된 촬영이 재개됐다. 조명을 한몸에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김 부장이 말했다.

“음. 이렇게만 봐서는 잘 모르겠구만.”

“배경은 CG로 들어가게 될 거라, 배우의 표정만 봐주시면 됩니다. 제가 보기엔 훌륭한데요.”

제 감정과 기분을 잘라낸 채 소현이 말했다. 김 부장은 영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 표정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 파티에 참석하는 스타의 느낌이 나야 하는데 지금은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네.”

“……그런가요? 지금 다방면으로 연기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김 부장은 감독 뒤로 가 촬영되는 화면을 보았다. 강렬하다고 말했던 김 부장의 말이 납득될 정도로 화면 속 유란은 마치 질투의 여신 같았다. 컷을 외친 감독은 다시 유란에게 표정을 세세하게 요구했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계속된 강풍으로 인해 유란의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이 잔뜩 엉킨 터라 촬영이 멈추었다. 머리카락을 다시 정비하고 메이크업을 고치는 사이, 소현은 스튜디오 밖에서 김 부장의 비위를 맞췄다.

“우려하시는 부분은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모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광고는 TV를 겨냥한 거다. 배우는 고화질을 장점으로 돋보이게 해줘야 하는데 시선을 빼앗을 만큼 강한 인상은 독이었다. 모델이 예쁘다는 의견만 소비자에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현은 입을 열었다.

“촬영하면서 분위기에 적응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아니, 장유란 정도 되는 배우가 그 정도도 못 해서야.”

“배우도 사람이에요. 거기다가 바람도 계속 불고 있어서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을 테고요.”

“강 대리, 너무 감싸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지금 이 순간 유란에게 편협한 시선을 가진 건 저일 거였다.

“대한민국에서 탑에 속하는 배우예요. 단면적인 면만 보고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건 제 감정일 뿐이지, 결과물에까지 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

“김 부장님. 잠시만요.”

소현은 지끈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배우에게 마련된 대기실 천막 앞에 서자 안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 봐, 드레스 날리면서 피부 다 쓸렸잖아. 이 의상 입어나 보고 만든 거야?”

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매니저가 어르고 달래는 음성을 가만히 듣던 소현이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천막을 팔로 밀어내며 들어가자 유란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왔다.

“잠깐 배우님과 얘기할 게 있는데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아, 그럼 저도 같이…….”

“오빠. 나가 있어.”

유란은 응수하듯 매니저를 차단했다. 눈치를 보던 매니저가 사람들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소현은 골이 깊게 파인 유란의 등을 보며 말했다.

“많이 따갑죠?”

“네. 바람 불 때마다 천이 쓸려서 곤혹스럽네요.”

소현은 반쯤 열린 입을 닫았다. 지금도 지한이 어떤 식으로 부탁을 했는지, 어떤 사이인지 묻고 싶었다.

“……그럼 빨간 드레스로 갈아입어요.”

회피하듯 소현의 시선이 한쪽에 걸려 있는 다른 의상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큐빅이 없는 실크로만 된 드레스를 본 유란이 말했다.

“감독님께 이 의상 촬영을 끝내란 소리 못 들었어요.”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려보죠. 그 의상이 고화질을 표현하기엔 적합하지만 배우가 그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고 표정이 잘 안 나온다면 문제니까요.”

유란은 울컥해 말했다.

“지금 제 표정을 지적하는 건가요?”

“아니요,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겁니다. 빨간 드레스는 지금 입으신 의상보다 가벼워서 바람에 날리는 세밀함을 돋보이게 할 수 있어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겁니다.”

“…….”

“갈아입어요. 촬영 길어지면 서로 힘들잖아요.”

심호흡한 소현이 입을 앙다문 유란을 보았다.

“예쁘네요.”

“……뭐라고요?”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 예쁘다고요.”

지한과 유란은 어떤 사이일까.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장유란 씨.”

제게 한 것처럼 유란에겐 안 그랬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다른 여자를 대하는 지한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거기다 유란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대한민국 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자가 지한의 마음을 거머쥐지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드는데 장유란 씨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제 입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싶으신데요. 똑같이 칭찬해주길 바라요?”

“아니요. 의상 바꿔서도 똑같은 문제로 촬영이 지체되면, 그래서 내 기대감을 꺾으면.”

소현이 유란에게 다가갔다.

“제가 다른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유란의 얼굴이 옅게 구겨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오목조목 담긴 이목구비가 더욱 탐스러웠다.

“우리 촬영장에서 만났으면 오늘은 일만 생각하도록 해요.”

어떤 관계인지 묻고 싶은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다른 곳에서 만난다면 그땐 제대로 상대해 줄 테니까 털 세우지 마. 여긴 일터야.”

지한을 양보하자니, 소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 남자 때문에 서로 신경전하기엔, 우리 둘의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오히려 더 빼앗고 싶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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